•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 구조
  • 1) 신분제
  • (2) 귀족·관료

(2) 귀족·관료

 백제사회의 귀족을 대표하는 대성8족은≪北史≫를 비롯하여≪翰苑≫에서 인 용한≪括地志≫, 그리고≪通典≫·≪新唐書≫등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正史로서는≪隋書≫百衲本에서 처음으로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746)“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劦氏·解氏·貞氏·國氏·木氏·苩氏”(≪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8성에 대한 내용은 중국 사서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비교적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통전≫에서는 沙氏·燕氏·劦(@)氏·解氏·眞(貞)氏·國(骨)氏·木氏, 苩氏로 전하고 있다.747)“……沙氏·燕氏·劦氏·解氏·眞氏·國氏·木氏·苩氏”(≪通典≫권, 邊防 1, 東夷上, 百濟). 그 기재 순서가 우열에 따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웅진으로 옮긴 이후에는 사·연·협씨가 해·진 양씨를 제치고 상위의 유력씨족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남천 이후 귀족사회의 권력구조에 변동이 있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웅진으로 남천한 이후로 한동안 세력을 떨쳤던 동성왕 때의 내법좌평 沙若思와 무령왕 때의 달솔 沙烏로 대표되는 사씨세력, 삼근왕 때에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 은솔 燕信과 더불어 동성왕 때의 병관좌평이 된 燕突 등의 연씨세력을 비롯하여 동성왕을 시해케 한 衛士佐平 苩加 등 백씨세력의 성장을 볼 수 있다.

 그리고≪북사≫백제전에 “國中大姓有族”이라고 하여 대성8족이라는 8자가 보이지 않으나 역시 이어 사·연·례(劦)·해·진·국·목·묘(苗)씨 등 8성을 들고 있다. 그러나 8성 이외에도 유력한 성씨족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령≪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대에 우보로 활약했던 乙音, 다루왕 때 동부인 좌보 屹于 및 昆優와 초고왕 때 서부인 茴會가 있었다.748)≪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온조왕 41년 및 다루왕 4년·7년, 초고왕 48년. 중국측≪南齊書≫에는, 토호출신 관료로 추정되며 동성왕이 중국에 작위의 제수를 청한 인물 중 高達·楊茂·會邁·慕遺·王茂·張塞·陳明 등이 보인다.749)≪南齊書≫권 58, 列傳 39, 百濟國. 또한 백제 말기에 활약한 允忠을 비롯하여 좌장 殷相(의자왕대), 부흥장 鬼室福信·遲受信·黑齒常之 등이 있었다. 이로 보아 대성8족에는 들지 않았더라도 고구려계 대족 성씨의 계통으로 보이는 乙氏(乙支氏)·高氏와 낙랑·대방의 漢人계 王氏성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밖에 백제가 망한 후 일본에 귀화한 망명귀족들 가운데 일본 天智天皇 (661∼671)의 명령으로 筑紫國에 大野·椽 두 성을 쌓은 達率 憶禮福留와 달솔 四比福夫가 있고, 역시 近江지방 長門國(琵琶湖東岸 伊吹山)에 축성했다는 달솔 答㶱春初가 있다.750)≪日本書紀≫권 27, 天智天皇 4년. 또≪新撰姓氏錄≫에는 달솔 名進·支母未惠遠, 은솔 納比旦止, 한솔 答他斯智·古都助, 덕솔 吳伎側 등 솔계 관리출신이 보인다.751)≪新撰姓氏錄≫(吉川弘文館, 1962).

 ≪삼국사기≫에서 고이왕 27년(260)에 시행했다는 6좌평과 16품관을 비롯하 여 백제의 관부에 대한 중국측 기사는 각 사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周 書≫·≪北史≫백제전에는 5左(좌평) 22부라 하고,≪隋書≫나≪北史≫에서는 16 등관과 대성8족에 대하여, 그리고≪新唐書≫·≪舊唐書≫에는 6좌평의 직무에 대하여 각각 전하고 있다.752)≪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北史≫권 94, 列傳 82, 百濟.
≪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百濟.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百濟.
관부와 관직체계는 미흡하나마 중국의≪周禮≫6 典체제에 바탕을 두었으며, 3세기 후반에 외형상 이미 品(官等), 階(官位), 司 (官府), 職(官職務)이라는 중국식 직관제의 형식을 갖추었다. 그 후 호남 일원 에 존속했던 마한을 통합하여 명실공히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비한 근초고왕 때에 이르기까지는, 정치·군사의 대권을 장악한 좌평의 자리에 왕족으로 보이는 우씨와 더불어 왕실의 외척인 진씨·해씨가 귀족관료로서는 최고의 권좌를 한동안 차지하였다. 이들 좌평을 포함한 제1관료군인 솔계관과, 제2관료군인 덕계관 이상은 자·비색 옷을 입게 하여 신분을 구분하였는데 이들은 실제적으로 백제사회를 지배한 귀족계층이었다. 이는 신라에서 제1골인 진골과 제2골인 득난(6두품)층이 각각 자·비색의 공복을 입었던 최상위집단의 지배층이었던 사실과 비교된다. 따라서 백제에서 문독 이하의 제3관료군은 그들 사회를 지배했던 상위집단의 귀족에 속한 관료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신당서≫백제전에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후 당나라장수 蘇定方에게 포로가 되어 長安에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자·왕족과 추장 58인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구당서≫백제전에서는 이들을 僞將 즉 백제의 위장된 장군이라고 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하여 참전한 이들은 아직도 부족에 바탕을 둔 토호들로 추측되므로 백제의 지방사회는 후기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 족단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3세기 무렵에 출현하여 4세기부터 5세기 말까지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계의 장고분 및 方臺形 봉토분유적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백제사회에서 품계를 받은 것으로 전하는 계층으로는 악인을 비롯하여 易博士·曆博士·醫博士·採藥師 등을 들 수 있다. 악공과 더불어 잡류 및 공장 등 전문인 계층들은 백제 성왕 때 일본에 易博士 施德(8품) 王道良, 曆博士 固德(9품) 王保孫, 의박사 奈率(6품) 王有悛陀, 채약사 시덕(8품) 潘量豊, 고덕 丁有陀, 악인 시덕(8품) 三斤 등을 보냈으며,753)≪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5년 2월. 그 후에도 寺工(사원건축기술자) 太良未太·文賈古子, 鑪盤博士(露盤 즉 사탑의 상륜부 주조기술자) 將德(7품) 白昧淳, 瓦博士(기와제조 기술자) 麻奈文奴·陽貴文·忄夌貴文·昔麻帝彌, 화공 白加 등을 보내어754)≪日本書紀≫권 21, 崇峻天皇 원년. 이른바 아스카[飛鳥]문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로 보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良人이나 中人계층에 속하면서도 천시되었던 악공과 더불어 의술·역술·공장·화공 등 전문인 및 기술자들이 백제사회에서는 귀족·관료계층에 포함되어 우대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백제에서는 전문지식인의 자격을 인정받아 박사 호칭을 가진 사람이 다시 덕계에서 솔계에 이르는 상위직 관료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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