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 구조
  • 1) 신분제
  • (4) 노비

(4) 노비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형성하면서 공동체사회는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갔다. 이와 더불어 노비 및 천인집단이 사회구조의 한 계층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노비는 고조선의「八條法禁」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즉 도둑질한 자에 대해서는 그 벌로 남자는 소유주의 家奴로 여자는 家婢로 각각 되었으며, 自贖하려면 한 사람당 50만 전으로 보상해야만 하였다.761)≪漢書≫권 28, 志 8, 地理 8下2(分野志), 古朝鮮의 八條犯禁. 이와 같은 고조선의 법속은 삼국시대 부여를 비롯하여 백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살인·도둑·간음과 같은 죄에 대한 형벌, 채무로 인한 보상, 인신매매 등에 의해 노비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삼국사기≫온조왕 22년조에는 王이 靺鞨과 싸워 사로잡은 포로를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말갈이란 東濊 혹은 濊貊을 뜻한다고 하여 僞靺鞨로 알려졌다.762)李丙燾,<百濟史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5). 靺鞨은 濊貊(東濊)을 지칭한 것 같고 후일 신라 史家가 개필한 것으로 보고 있다.
兪元載,<三國史記僞靺鞨考>(≪史學硏究≫29, 1979).
權兌遠,<濊貊文化圈과 肅愼問題>(≪論文集≫43, 忠南大 人文科學硏究所, 1994).
(靺鞨은 수·당대 불린 것이고, 그 이전은 肅愼·挹婁로 통했다). 또 근초고왕 24년(369)에도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얻은 포로를 역시 장수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례로 보아 전쟁포로를 노비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형벌에 의한 노비이다.≪북사≫백제전에는 결혼한 여자가 간통한 경우에 그 신분을 천민으로 낮추어 남편집의 婢로 삼았다고 하였다.≪구당서≫·≪신당서≫백제전에서는 살인을 범한 자가 노비 3명을 제공하면 무죄로 방면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형률은 백제지배집단의 발원으로 보이는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더욱 가혹하였다. 가령 부여의 경우에는 투기하는 부인은 모두 죽이고 그 시체를 산상에 버리며, 남녀가 간음하면 다같이 죽이고 살인자는 본인을 사형함은 물론 그 가족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763)≪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夫餘國.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여기에서 家父長社會로 옮겨 간 고대국가 초기의 엄격한 형률을 적용한 노비의 성립과정을 엿볼 수 있다.

 셋째로 채무로 인한 노비이다.≪북사≫고구려전에는 집안이 빈곤하여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경우나, 공사간에 빚을 져야만 할 경우 자녀를 노비로 팔아 넘기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양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매매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심지어≪구당서≫고구려전에 의하면 우마의 도살자는 양민신분을 박탈하고 노비로 삼기까지 하였다.764)≪北史≫권 94, 列傳 82, 高(句)麗.
≪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高麗.
이는 농경사회에 들어갔으나 아직도 우·마 등 가축을 소중히 여겼던 부여나 고구려 같은 북방사회에서만 엿볼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백제에서도 고구려사회처럼 곤궁한 양민층 가운데 매매로 인한 전락노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한편≪삼국지≫위지 부여전에는 下戶와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그것은 그 판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武英殿本에는 “邑落有豪民民下戶皆爲奴僕”이라 한 데 비해, 百衲本·元本 등에는 “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이라 하였고,76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일반적으로는 무영전본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해석에 있어서는,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民인 下戶는 모두 노복이다”라는 견해와 “읍락에는 호민·민·하호가 있는데 모두 노복이다”라는 견해로 나뉜다. 대체로 전자의 해석이 옳은 듯한데, 이에 따른다면 부여의 경우 加가 다스린 일정한 부족권역내의 읍락에는 부농인 호민이 있고, 이에 예속된 민이 소작을 하는 隷民과 같은 처지에 있어 노복과 같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앞서 살펴 본 대로 민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고, 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이들 사이에는 자연히 빈부의 차이가 생겼다. 따라서 예민과 같이 하호로 지칭되는 민은 호민의 토지에 매여 살며 나라에 가혹한 세와 부역까지 부담하였으므로 그들을 노복의 상태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 백제사회의 노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볼 수는 없으나,≪삼국지≫위지 한전의 漢人 戶來사건에서처럼 漢人들이 韓지역에 벌목하러 왔다가 사로잡혀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사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삼한시대에 영역과 재산을 침해하였다가 포로가 됨으로써 노비로 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 德興里壁畵古墳의 玄室 북벽에서 주인의 실내 생활도에 보이는 남자 종복(私奴), 舞踊塚의 말탄 주인을 시중드는 노복(私奴), 長川 제1호분의 불교공양도에서 여주인의 몸종으로 보이는 시녀(私婢) 등에서 삼국시대 노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766)朱榮憲,<고구려 벽화무덤에 대하여>(≪高句麗古墳壁畵≫, 朝鮮畵報社,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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