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 구조
  • 2) 법률과 풍속
  • (1) 법률

(1) 법률

 ≪한서≫지리지가 전하는 고조선사회의 8조법금[犯禁]은 초기 로마법과 같이 관습법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모든 인류의 사회발전단계에서 적용되어 온 것처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8조의 법금은 중국 동북지방의 부여를 위시하여 고구려·백제·신라에 이르기까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유사하다. 그 간략한 내용이 중국정사 동이전에 전하고 있다.

 ≪한서≫高帝紀에 보이는 “命 蕭何次律令”이라는 구절에 대해 王定謙이 ‘令 이란 民에게 반포하는 법령을 말하며 이와 같은 영을 범하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을 律이라고 하였다’고 주를 덧붙였다.≪삼국사기≫고이왕(234∼286)조에서는 중국의 6전례에 합치되는 6좌평제도와 더불어 관등·관위(품계) 및 관부·직무의 성격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도적과 동일하게 받은 재물의 3배를 배상하고 종신 禁錮의 형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또한 왕이 친히 참석하여 정사 및 나라의 중대한 형벌까지 논의하는 南堂制가 있었다는 것은767)≪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27·28·29년. 당시 백제사회가 율령제에 의한 정치체제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고이왕대의 기사는 남천 이후 백제의 정치제도가 성숙해진 후대의 사실을 끌어올린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첨(점)해이사금(247∼261) 및 미추이사금(262∼284) 때 즉 백제 고이왕대와 같은 시기인 3세기 후반에 이미 남당정치의 기록이 보이며 특히 미추왕대에는 여러 신하를 남당에 모아 놓고 왕이 친히 정치와 형벌이 적합한지의 여부를 물었다고 하였다.768)≪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첨해이사금 3년 7월 및 미추이사금 7년.

 ≪주서≫백제조에는 16등급의 품계, 내·외관 22부와 복식, 혼·상풍속 등 당시 백제의 사회풍속과 함께, 율령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反叛(모반)·退軍 및 살인자는 참하고, 도둑은 유형(귀양)에 처하며 훔친 물건의 2배를 징수한다. 결혼한 부인이 간통하면 그 신분을 박탈하여 천류로 내려 남편집의 종으로 삼았다(≪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이와 동일한 내용은≪북사≫백제전에도 보인다. 그리고≪구당서≫동이전 백제조에서는 반역자에 대하여 그 가족과 재산을 몰수하고, 살인자는 노비 3인을 제공하면 속죄되며, 관인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그 액수의 3배를 배상하고 아울러 평생 벼슬길에서 추방당하는 금고형을 받는다고 하였다.769)≪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百濟. 이와 같은≪구당서≫백제전의 형률에 관한 내용은≪신당서≫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데,≪주서≫백제전에 전하는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만≪삼국사기≫고이왕 29년(262)에 관리로서 뇌물을 받은 경우 및 도둑질한 자에게 3배의 재물을 징발하고 종신토록 금고에 처한다는 사실은770)≪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29년. 일찍이 고조선사회의 ‘盜者自贖’에 관한 만민법적인 법속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고대국가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삼국시대의 형률은 이와 같은 법속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또 온조왕 34년(16)에는 반란을 일으킨 마한의 옛장수 周勤의 시체를 허리까지 자르고 동시에 처자를 주살하였으며, 또한 무령왕 즉위년에도 반란자 좌평 苩加를 참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白江에 버렸다.771)≪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34년 및 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즉위년 정월.

 부여를 비롯한 삼국시대 형률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져 실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후한서≫부여전에 전하는 바와 같이 형률이 지극히 엄한 것은 부여를 비롯한 삼국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즉≪후한서≫부여국전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모반이나 살인이 포함된 사형수 가족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 가족연좌법이 시행되었고, 도둑의 보상을 12배로 하였으며, 남녀간의 사통간음이나 질투한 부인은 사형시키고 그 시체를 산상에 유기하는 등의 가혹한 처벌이 있었다.772)≪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夫餘國. 또한 형벌의 유형에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고구려에서도 같은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주서≫열전 고구려조에는 내란 및 외적과 내통한 반역자에 대하여는 火刑시킨 후 다시 참형하며, 그 가족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고, 도둑질한 자는 물건을 10배(≪구당서≫고구려전에는 12배)로 갚든지, 갚을 능력이 없는 자는 그 자녀를 노비로 팔아 보상하는 등의 형률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구당서≫고구려전에는 우마를 함부로 도살하는 자는 신분을 낮추어 노비로 삼으며, 형률이 엄하므로 범죄자가 적어 길바닥에 물건이 떨어졌어도 줍지 않았다고 하였다.≪후한서≫부여국전에는 죄인을 수용할 감옥(牢獄)이 있었다고 하였는데≪남사≫고구려전에는 형률이 매우 엄하여 범인이 드물고 감옥이 없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백제의 발원과 관계가 깊은 부여나 고구려와 같은 북방사회의 경우, 남방으로 이동하여 마한 토착세력을 정복 또는 동화시켜 정착한 백제사회보다 형률이 오히려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세기를 전후한 때 중국 동북지방에서 선비를 위시하여 말갈 여러 족과의 끊임없는 대결을 위해 결속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형률은 살상·도둑·간음을 금했던 이른바 고조선의 8조법금처럼 고대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관습법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률의 집행에서는 수·당률인 5刑(答·杖·徒·流·死)에 바탕을 두고 속죄하는 방식이 가미되어 있다. 또한 삼국이 병립하여 상호 항쟁하는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반역·모반, 전투할 때의 도망자 등에 대한 형벌이 가혹했으며, 가부장사회의 특징으로 부녀자의 간음을 규제하고 노비제 및 사유재산제가 강조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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