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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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삼한사회가 각기 맹주국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적 통합을 달성한 결과 남한지역에 등장한 것이 百濟와 新羅 그리고 加耶였다. 즉 馬韓세력이 백제로, 辰韓세력이 신라로, 弁韓세력이 가야로 재편성된 것이다. 그런데 삼한 가운데서도 특히 진한과 변한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강한 종족적 및 문화적 친연성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이 두 세력은 소백산맥 동쪽에 펼쳐진 영남지방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성장 발전했다. 3세기 후반에 쓰여진≪三國志≫魏書 東夷傳은 요동지방으로부터 한반도 남해안에 이르는 여러 韓族 국가들에 대한 民族誌的 기술로 유명한데, 이 책의 韓條 기사에 의하면 진한과 변한은 서로 뒤섞여 살았으며, 의복과 가옥, 언어·法俗이 서로 비슷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에서는 진한과 변한을 굳이 구별하지 않은 채 종종「弁辰」이라고 合稱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한조에는 진한 耆老들의 “우리들은 옛날에 망명해 온 사람으로 秦나라 때 苦役을 피해서 한국으로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우리에게 분할해 주었다”는 전승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赫居世居西干조에는 신라 건국 前夜의 사정을 설명하여,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들이 경주평야로 이주하여 山谷 사이에 흩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어 살았다고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남한지역에서의 삼한사회의 성립을 소위 주민이동설에 입각하여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같은 논자들 중에는 진한과 변한이 오랜 기간에 걸쳐 一團을 이루어 남쪽으로 이동한 끝에 영남지역에 정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이러한 견해가 大勢論的으로 볼 때 큰 잘못이 아니라면 진한과 변한은 서로 분리하여 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뒤에 변한의 후신인 가야 여러 나라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6세기 중반경 신라에 의해서 모두 통합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삼국통일 이전 시기까지의 신라 역사와 가야의 전 역사를 함께 다룬 것은 대략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 및 전개과정을 고려한 때문이다.

 신라의 母胎는 진한 12國 중의 하나인 斯盧國이었다. 사로국은 오늘날의 慶州盆地에 있었던 6개 邑落의 연합에 의해서 형성된 듯하다. 다만 국가 형성의 시기와 초기의 발전과정을 둘러싸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것은≪삼국사기≫신라본기 초기 기록이 중국측의≪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 기사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다가 그 기술 자체가 매우 모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朴·昔·金 세 부족의 始祖신화와 그 후예들의 소위 3姓 世系 및 紀年문제는 신라국가 형성사 연구에서 부딪치게 되는 첫번째 난관이라 할 수 있다.

 3성 시조신화는 국가 형성시기 경주 6村사회의 모습과 上古 신라인의 관습, 신앙 및 종교의 한 단면을 전해 주는 문화사적 자료로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朴氏 赫居世 신화는 신라의 건국신화이기도 한데, 이는 우리 나라 건국신화의 典型이라 할 수 있는 天降신화와 卵生신화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또한 金氏 시조인 閼智 신화는 혁거세 신화와 서로 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3성 시조신화 중에서 특이한 것이 昔氏 脫解 신화인데, 주인공이 바다를 표류한 끝에 동해안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해양세력 출신일 것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주인공이 본래 冶匠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시베리아지방 내지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3성 시조신화에는 다양한 계통의 신화 요소가 뒤섞여 있어 초창기 신라사회와 문화가 매우 복잡한 重層性을 띠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 3성 세계와 그 실제 연대에 있어서는 거의 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즉 신라본기에 繼起的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3성 세계를 그 자체 竝列的인 것으로 수정해서 파악한다거나 또는 역대 왕의 在位 年數를 축소 조정하여 파악하려는 견해가 유력한 실정이다.

 진한 12국 시대는 국가간에 영토의 확장을 목표로 자유로이 경쟁을 벌이던 때였는데, 사로국은 이 경쟁에서 실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사로국은 인접한 小國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차츰 진한의 맹주국으로 位相을 확립해 갔다. 이 연맹왕국 형성은 대체로 2세기 말경부터 시작되어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단 완료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연맹왕국을 완성하기까지의 사로국의 지배체제는 다소간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속된 소국들은 사로국에 貢物을 바치면서도 각기 고유의 지배영역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때때로 맹주국에 대해서 반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4세기 중엽에 奈勿王(356∼402)이 등장하면서 金氏 세습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종래의 尼師今이라는 王號 대신 최고의 首長이란 뜻을 가진 麻立干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칭호는 530년대 초에 漢式의 太王號로 바뀔 때까지 150년 이상 사용되었으므로 이 기간을 흔히 마립간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 시대에 역대 왕과 그 일족들은 積石木槨墳을 만들어 썼는데, 몽골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특이한 墓制와 또한 거기서 출토되고 있는 북방 계통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에 근거하여 일부 연구자들은 김씨왕조를 북방 유목민족 출신에 의한 정복왕조가 아닐까 주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 마립간시대에 사로국은 일약 신라로 비약했는데, 사실 그 만큼 이 시대는 신라 역사상 보기 드문 격동기였다.

 무엇보다도 신라는 이 시대에 본격적인 삼국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4세기에 들어와 고구려는 樂浪·帶方 兩郡을 일거에 멸망시키면서 한반도 중부지역에까지 그 세력을 뻗쳐 왔다. 마한세력을 통합함으로써 大國이 된 백제는 帶方郡 故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황해도 방면에서 자주 고구려와 군사적 충돌을 벌였다. 이와 동시에 백제는 신라에 대해 외교적 압박을 가해 왔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손잡고 난국을 타개해 갔다. 신라는 내물왕 25년(380)을 전후한 시기에 두 차례에 걸쳐 북중국의 覇者이던 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는 고구려 사신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뒤 내물왕 44년(399)에 신라는 백제가 끌어들인 倭兵이 국경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자 고구려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廣開土王陵碑>에서 보듯이 신라는 그 이듬해 고구려 동맹군과 함께 왜병을 추격하여 가야지방으로 쳐들어가 백제군 및 가야군과 연합한 왜병을 섬멸했다. 그러나 한편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예속은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등 그 폐해가 적지 않았다. 더욱이 고구려가 長壽王 15년(427) 압록강 가의 集安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한반도 남부지방을 넘보게 되자 신라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백제와의 관계를 개선, 공동으로 대처하려고 했다. 433년 양국간에 友好관계가 성립된 이래 신라는 급속히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났고, 450년대 이후에는 백제와의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등 羅濟攻守同盟體制로 발전하였다.

 마립간시대를 통하여 신라의 지배체제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지배층의 세력기반으로 王都에 6부조직이 완성되었으며, 수도와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망 및 운송수단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는 6세기의 대변혁을 위한 정지작업에 불과하였다. 智證王을 거쳐 法興王(514∼540) 때에 들어오면서 신라는 국가체제 전반에 걸쳐서 거대한 전환을 맞게 되었다. 즉 법흥왕 7년을 기하여 律令이 반포되어서 국가의 지배체제는 종전의 무질서 상태를 청산하고 바야흐로 법제화·조직화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또한 이와 거의 동시에 佛敎가 공인되어 새로운 시대에 알맞는 정신세계를 이끌어 갔다.≪三國遺事≫의 저자는 신라의 전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누면서 법흥왕 때로부터 654년 太宗武烈王이 즉위할 때까지의 140년간을 소위「中古」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시대로 설정했는데, 사실 이 시대에 신라의 기본적인 國制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소위 중고시대의 변혁은 다만 지배체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신라는 야심적인 정복사업을 추진하여 후일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眞興王(540∼576) 때에 본격화된 영토 확장사업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신라는 진흥왕 14년(553)에 한강유역을 모조리 차지했고, 다시 진흥왕 23년에는 가야 여러 나라를 전부 병합했다. 그렇지만 영토 팽창의 대가로 신라가 치룬 희생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120년간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는 이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은 신라의 안전을 크게 위협했다. 특히 중고시대가 끝날 무렵이던 640년대부터 강화된 백제와 고구려 양국 군대의 대규모 국경 침입은 신라를 위기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그간 신흥 강국으로 대두한 신라는 온갖 시련과 난관을 극복해 가면서 唐과의 군사외교를 강화하여 삼국통일의 大業을 달성하게 되었다.

 신라의 국가체제는 6세기에 들어와 정비되기 시작했다. 사실 麻立干시대의 지배체제는 연맹왕국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듯 신라에 복속된 여러 소국들의 지배층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던 일종의 모자이크 형태를 띤 것이었다. 그러나 마립간시대를 통하여 왕권은 꾸준히 성장하여 6세기 초에 이르면 연맹왕국체제를 청산하고 중앙집권국가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면서 종전의 多元的인 지배방식으로부터 국왕을 중심으로 한 一元的인 지배체제로 재편성되었다.

 통치제도의 기초가 된 것은 官等제도였다. 본래 관등은 연맹왕국시대 조정의 南堂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여러 소국 지배층의 席次를 표시한 것이었다. 이는 동시에 관직의 요소도 내포하고 있었는데, 법흥왕 때 17등급으로 정비되었다. 다만 이 17개 관등은 왕도의 6부 사람만을 그 대상으로 했으므로 말하자면 京位制였다. 이 경위 관등의 高下에 따라 일정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경위제도는 관직제도를 규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행정관부는 법흥왕 4년(517) 兵部 설치를 시작으로 하여 진흥왕 26년(565)에 租·調의 출납을 담당하는 稟主가 설치되고, 다시 眞平王代 초인 580년대에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位和府와 의례 및 외교를 담당하는 禮部 등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관원조직이 단순한 편이었으나, 진평왕 때에 이르면 주요 관부의 경우 4등관제로 확대되었다. 그 뒤 眞德女王 5년(651) 2월에 종래 왕실의 家臣的 성격이 농후했던 품주를 執事部로 개편하여 왕정의 기밀 사무를 맡게 하는 관제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그 장관인 中侍는 병렬적으로 놓여 있던 部·府 등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를 사실상 유기적으로 통제하게 됨으로써 국가권력은 집사부를 통해서 국왕에 귀속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시에게는 행정적인 失策뿐 아니라 국토를 기습적으로 강타한 천재지변의 발생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왕권의 안전판과도 같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른바 和白회의의 존재이다. 중국측 역사서인≪隋書≫·≪新唐書≫신라전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였는데, 이를 화백이라고 하였으며 단 한 사람이라도 異議가 있으면 그만두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화백회의의 기원은 마립간시대에 성립된 王京 6부의 대표자회의였던 것 같은데, 지증왕 4년(503)에 만들어진<迎日 冷水里 新羅碑>나 법흥왕 11년(524)에 만들어진<蔚珍 鳳坪 新羅碑>에는 葛文王이 6부 대표자들과 政務를 함께 논의·결정한 사실이 보인다. 그 뒤 律令이 공포되면서 6부 대표자회의는 大等회의로 개편된 듯하며, 법흥왕 18년(531)에 설치된 上大等이 이 대등회의를 주재한 것으로 짐작된다. 소위 中古시대를 통해서 대등회의는 때로는 국왕의 교체까지 결의하는 등 정치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행사했으나,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상대등 毗曇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더욱이 4년 뒤 집사부가 설치되면서 그 권위에 크나큰 손상을 입고 차츰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들어와 智證王 때 지방행정기구로 州·郡제도를 제정하여 국가권력이 지방의 촌락사회에까지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계기가 된 것은 5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고구려와의 전쟁이었다. 이 때 신라는 국경지대에 많은 山城을 쌓아 군대를 배치했으며 또한 王京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개척하여 전국적인 물자의 유통뿐 아니라 신속한 병력 이동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半獨立的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小國들의 해체작업이 현저히 촉진되었다. 이처럼 지방지배가 軍政的 성격을 띠었으므로, 주·군의 책임자인 軍主·幢主는 모두 군대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한편 진흥왕 18년(557)에는 새로운 점령지에 중앙의 사회조직이나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中原지방에 國原小京을 설치하여 王京 6부 사람들을 비롯한 加耶 사람들을 徙民시키기도 했다.

 영토의 팽창에 따라 군사조직도 정비되어 갔다. 처음에는 6부민을 대상으로 하여 병력을 징발하다가 진흥왕 5년에는 상비군단으로 大幢을 편성했는데, 뒤에는 지방민까지 동원하여 순차적으로 6개의 군단으로 增編되었다. 그리고 삼국통일전쟁 때는 임시군단으로 行軍을 편성, 대규모의 병력을 징발 동원했다. 한편 군의 간부 요원을 양성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半官半民단체의 성격을 띠는 花郞徒가 제정된 것은 주목되는 점이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화랑을 수령으로 하여 6부민의 子弟로서 편성된 청소년집단이었는데, 3년간의 수련기간이 끝나면 군부대에 배속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世俗五戒를 단체이념으로 하여 정신무장된 화랑도 출신들은 武士道의 權化로서 國難期의 시대정신을 이끌어 갔다.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전환하던 시기에 경제도 크게 발전했다. 경제의 주요한 기반은 농업이었는데, 이는 철제 농기구의 개량, 水田 및 牛耕의 보급에 따라 그 생산력이 급속히 향상했다. 또한 수공업 부문에서는 왕궁 혹은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 조달하는 宮中·관영수공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에 들어와서는 민간수공업이 일부 분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농업과 수공업 부문에서의 변화는 자연스레 교환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켜 상업의 양상도 변화했다. 당시 교환수단으로는 종래의 鐵鋌 대신 布가 널리 사용되었고, 소지마립간 12년(490)에는 왕경에 공영시장이 개설되고 뒤에 이를 관리하는 관청인 東市典이 설치되기도 했다.

 끝으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분제도인 骨品제도이다. 이는 17등 관등제도가 성립되면서 왕경 6부민에게 부여할 관등을 조절하는 방편으로 제정되었는데, 왕족의 신분은 聖骨과 眞骨로 나뉘었고 일반귀족 및 평민의 신분은 6頭品에서 1頭品에 이르는 여섯 개의 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이 골품제도는 관등제도를 규제한 결과 중앙의 제1급 관청인 部·府의 장관을 비롯하여 州의 장관, 그리고 將軍직은 진골 출신에 한정되었고, 6두품은 차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처음에는 1두품 이상이면 최하급 관직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 듯하지만, 뒤에는 이를 4두품 이상으로 제한한 결과 3두품 이하는 이를 세분할 의의를 잃게 되어 平人 혹은 百姓으로 불려졌다. 한편 지방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골품제도에는 포섭되지 않았으나, 11등급으로 나눠진 소위 外位를 부여받아 그 관등의 高下 혹은 有無에 따라 신분이 구별되었다.

 加耶의 역사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가 또한 종래 일본학계에서 끈질기게 주장해 온 이른바「任那日本府說」의 그릇된 영향 때문에 오랜 동안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放置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가야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발굴성과는 비로소 가야사를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主軸으로 하여 이에 문헌자료를 종합하여 가야 여러 나라의 정치적 전개과정과 문화양상을 究明하는 연구방법론이 학계에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 학계의 유력한 假說에 따르면, 가야사는 400년경을 경계로 하여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소위 前期 가야시대는 대체로 서기 1세기경에 성립되어 4세기까지 洛東江하류 주로 경남 해안지대를 무대로 활동했던 小國들이 주역이었고, 이는 金海의 駕洛國(金官가야 혹은 本가야)을 중심으로 하여 연맹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가락국을 비롯한 해안지대의 소국들은 그 立地조건을 최대로 활용하여 이 지방에서 많이 산출되는 철을 樂浪·帶方 兩郡이나 倭國에 수출하는 등 해운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가락국은 4세기 초 낙랑·대방 양군이 고구려에 의해서 멸망됨에 따라 유력한 교역 상대를 잃은 데다가 400년에는 고구려 廣開土王의 낙동강 방면 원정에 의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어 현저하게 약화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소위 後期 가야시대가 전개되는데, 이는 내륙 산간지대에서 그간 水稻作 농경을 배경으로 실력을 배양한 소국들이 주역이었고, 그 중 高靈의 大加耶가 연맹의 중심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 가야사는 많은 부분이 비밀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는데, 그 성립의 역사적 배경으로 생각되는 것이 古朝鮮 멸망(B.C. 108) 이후의 流移民의 이동 정착이다. 어쩌면 이들에 의해서 제철기술이 이 지방에 전래되면서 국가 성립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삼국유사≫에는 金海의 가락국이 서기 42년에 건국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대략 2세기경의 사실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변한 12국 시대였다.≪삼국지≫위서 한조에는 3세기 중엽 현재 변한 소국들이 삼한의 연맹장이라고 하는 辰王에 속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의례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는 이 무렵 가락국과 安邪國(일명 安羅, 현재의 咸安)을 중심으로 하여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기 가야사는≪日本書紀≫한국관계 기사와 고고학적 자료를 결합하여 복원되고 있다. 이 시기 가야 여러 나라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 및 倭國이 개입되는 등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갔다. 하긴 후기 가야의 주역인 대가야는 479년 남중국과 통교하는 한편 야심적인 영토팽창을 꾀하여 소백산맥 너머 南原郡 阿莫山城까지 그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백제의 반격에 부딪쳐 6세기에 들어가면 팽창은 정지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더욱이 520년대 이후에는 신라가 가야 여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쳐 왔다. 532년 南加羅(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뒤 이에 위협을 느낀 가야 제국은 백제군을 끌어들여 신라의 진출을 억제해 보려고 했으나, 이는 남부지역 가야 小國들이 백제와 신라 양국에 분할 점령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더욱이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가야 제국은 대가야와 安羅國의 二元체제로 분열되고 말아 마침내 신라에 의해 각개 격파당하는 형국이 되었다.≪일본서기≫에는 5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안라국에 倭國과 일정한 관련을 가진 듯한 관료들이 등장하는데, 그 성격을 둘러싸고서 학자들간에「왜국系 백제관료」 혹은「親백제 왜인관료」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이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어서 실로 핵심이 되는 사항이다. 그것은 어쨌든 대가야는 562년 9월 마침내 신라에 멸망되었는데, 이와 전후하여 가야 10국은 모두 신라에 병합되어 가야사는 그 최종적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최근 들어 가야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꾸준히 진전된 결과 적지 않은 물질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가야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의 산업은 立地조건에 따라 다양한 발전을 이룩했다. 즉 남해안 일대에서는 풍요한 해산물을 바탕으로 어업이 발달했고, 안정적인 농업 입지조건을 갖춘 내륙지방에서는 농업과 길쌈(縑布)이 크게 발달했다. 그 밖에 가야는 철기 생산과 토기 제작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한편 가야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샤머니즘을 중심으로 한 토착신앙이 장기간 지배했던 듯하다. 그들은 태양과 산악을 숭배했고 占卜과 禊浴·殉葬의 습속을 갖고 있었으며 풍요한 생산을 빌기 위해 土偶를 만들기도 했다.≪삼국유사≫에 실려 있는≪駕洛國記≫에 의하면 452년 시조 首露王(世祖)과 許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김해에 王后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만약 이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가야사회에 불교가 수용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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