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1.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 1) 박혁거세 신화

1) 박혁거세 신화

 박혁거세 신화는≪삼국사기≫·≪삼국유사≫·≪帝王韻紀≫등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먼저≪삼국사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高墟村長 蘇伐公이 陽山 기슭을 바라보니 蘿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으므로 가서 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어 이를 가르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데려다 길렀다.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고 夙成하여 6部人이 그 탄생이 신이하였으므로 높이 받들었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 임금을 삼았다. 辰人이 瓠를 朴이라 하므로 처음의 큰 알이 호와 같아 박을 姓으로 삼았다. 居西干은 辰言으로 王이다(혹은 貴人의 칭호를 이른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始祖 赫居世居西干).

 고허촌장 소벌공이 바라본 양산은 지금의 남산인데, 남산은 일찍부터 신라인들의 성스러운 장소였다. 불교가 수용된 후 특히 통일기 이후 많은 불교 미술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은 본래부터 이곳이 신라인에게 성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토착신앙의 성소였던 이곳에 불교적 조형물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마치 이것은 天鏡林이나 神遊林에 興輪寺와 四天王寺가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005)崔光植,<新羅 上代 王京의 祭場>(≪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6, 1995), 71∼73쪽.

 이 신화의 현장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것은 閼英의 등장에도 나와 이로써 우리 고대사회의 井泉信仰을 알 수 있다.006)李丙燾,<韓國 古代社會의 井泉信仰>(≪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782쪽. 또한 우물 옆의 수풀은 신라의 樹木信仰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前佛七處伽藍의 천경림·神遊林,≪삼국사기≫祭祀志에 나오는 文熱林 등에서 보듯이 신라의 수목신앙은 매우 보편적이었다. 이는 김알지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 바로 鷄林이다. 그리고 신라 金冠에 보이는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007)朴普鉉,<樹枝形 立華飾冠 型式分類 追補>(≪大丘史學≫32, 1987), 1쪽. 신라 금관의 조형이 시베리아 샤먼의 관이라는 견해도 있다.008)張籌根,<神話學에서 본 韓國文化의 起源>(≪文化人類學≫2, 1969), 16쪽.

 여기서 신화의 현장이 된 산·우물·수풀은 모두 신라인들의 현실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천신이 강림할 때 산의 나무를 통해 내려오는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009)이필영,≪샤마니즘의 종교사상≫(한남대 출판부, 1988), 89쪽. 桓雄이 내려온 太白山頂 神檀樹와 金首露王이 내려온 龜旨峰도 마찬가지이다.010)龜旨峰은 굿을 하는 봉우리인 굿峰을 한자로 음차(구지=굿)한 것이다. 혁거세의 등장을 알리는 말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였으며, 말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신라의 마문토기·마형토기와 함께 신라 지배층의 문화적 성격의 일면을 나타내 준다.011)張志勳,<建國神話에 대한 一考察-高句麗·新羅를 中心으로>(≪釜山史學≫19, 1990), 15쪽. 天馬塚의 天馬圖도 혁거세 신화와 관련시켜 보았으나 최근 그림의 동물이 말이 아니라 기린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발표된 바 있다.012)李在重,<三國時代 古墳美術의 麒麟像>(≪美術史學硏究≫203, 1994), 21∼25쪽. 여기서 말을 박씨 토템으로 보는 견해013)金哲埈,<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上 (≪歷史學報≫1, 1952), 27쪽.가 있으나 말은 그야말로 메신저의 역할이지 그 자체가 신화의 주인공이 아님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신라의 발전과정을 원시적인 단계로 보고 부족사회에 나타나는 토템으로서 박씨족의 말, 김씨족의 닭으로 인식한 것이다. 박혁거세 신화의 주인공은 하늘과 관계를 가진 존재였다.014)金和經,<新羅建國說話의 硏究>(≪民族文化論叢≫6, 嶺南大, 1984), 4쪽. 김알지 설화에서도 닭은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에 불과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오히려 부족사회의 단계를 극복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신화의 주인공은 큰 알로서 이는 흔히 난생신화로 보아 남방문화의 신화로서 이해하기도 하였다. 천강신화는 北方型 신화이며 난생신화는 南方型 신화라는 것이다.015)三品彰英, 앞의 책, 531쪽. 그러나 부여와 고구려의 신화도 난생신화의 요소가 있으며, 신라와 가야의 신화도 천강신화의 요소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의 건국신화는 천강신화와 난생신화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천강신화의 요소만이 있는 것은 단군신화로서 지역적인 차이가 아니라 시대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천강신화적 요소가 앞선 시기에 나타나고 난생신화적 요소가 보다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적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데려다 길렀는데 십여 세에 이르자 뛰어나고 숙성하여 6부인이 그 탄생의 신이하였으므로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는 것을 볼 때 유이민세력과 토착세력 사이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신화의 천강적 요소와 난생적 요소의 신이함이 바로 왕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혁거세를 추대한 6부인들의 조상들도 모두 천강신화를 가지고 있다.016)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三國遺事≫권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 나타나 있다. 閼川 楊山村長 謁平은 瓢巖峰에, 突山 高墟촌장 蘇伐都利는 兄山에, 茂山 大樹촌장 俱禮馬는 伊山에, 觜山 珍支촌장 智伯虎는 花山에, 金山 加利촌장 祗沱는 明活山에, 명활산 高耶촌장 虎珍은 金剛山에 내려왔다. 이와 같이 6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제들을 거느리고 閼川가에 모여 덕이 있는 자를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혁거세가 이들과 다른 점은 난생이라는 점이다. 그 성을 박으로 삼은 것도 그 큰 알의 모습이 표주박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6부의 시조들도 천강신화를 갖고 있으나 혁거세는 천강적 요소와 난생적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또한 그 신이함을 말이 증명하였으며, 새와 동물들이 따라오며 춤을 추었다.

 혁거세의 신이함을 더해 주는 것이 알영의 등장과 神聖婚이다.017)金烈圭,≪韓國神話와 巫俗硏究≫(一潮閣, 1977), 53쪽.

5년 춘정월에 용이 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 老嫗가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이름은 우물 이름을 따서 閼英이라 하였다. 자라자 德容이 있어 始祖가 이를 듣고 들이어 왕비로 삼으니 어질고 내조를 잘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二聖이라 불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始祖 赫居世居西干).

 혁거세의 왕비가 된 알영이 춘정월 용의 갈빗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매우 신이한 것이다. 또한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혁거세의 탄생의 경우도 양산의 나정 우물과 관련이 있어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용과 우물은 물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농경생활을 의미한다고 하겠다.018)張志勳,<農耕文化와 彌勒信仰>(≪三國時代 彌勒信仰 硏究≫, 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4), 114쪽. 혁거세 17년(B.C. 41) 왕이 6부를 순행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랐으며 農桑을 장려하고 땅의 이로움을 다하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알영을 이상히 여기고 데려다 길른 노구는 단순한 할머니가 아니라 무당이었다.019)崔光植,<三國史記 所載 老嫗의 性格>(≪史叢≫25, 1981), 22쪽. 석탈해를 데려다 길른 해변의 노구 阿珍義先도 마찬가지로 무당이었으며 이 노구는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일에 관여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신이한 존재인 알영을 들이어 왕비를 삼음으로써 혁거세의 신성성은 더욱 높아져 이 두 사람을 二聖으로까지 부르게 되었다. 알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자세하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지금 天子가 내려오셨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자를 찾아 배필로 삼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이 날 沙梁里 閼英井가에 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빗대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탄생했는데 그 자태와 용모가 수려하였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음으로 月城 북쪽 냇가에서 목욕을 시키니 그 부리가 떨어졌으므로 그 내를 撥川이라 불렀다. 宮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조영하고 二聖의 아이들을 받들었다. 사내아이는 卵生으로 알이 박(瓠)과 같았다. 鄕人들은 박을 朴이라 하는 까닭에 그 성을 朴이라 하였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써 이름을 삼았다. 二聖이 십삼세에 이르자 五鳳 元年 甲子에 사내아이는 왕이 되어 여자아이로 왕후를 삼고 국호를 徐羅伐로 하였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

 여기서는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빗대에서 여자아이가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입술이 닭의 부리 모양이라 하여 닭과의 관련성이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 부리를 월성 북천에서 제거하였으므로 내와의 관련성을 갖고 있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조영하였는데 一然은 이를 昌林寺로 비정하고 있다. 二聖이 13세에 이르자 왕과 왕비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 나이는 바로 成人이 될 수 있는 나이이다. 五鳳 갑자년(B.C. 57)에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徐羅伐로 함으로써 국가가 건국되었다. 혁거세가 갑자년에 즉위하고 갑자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견해도 있다.020)末松保和,<新羅上古世系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115쪽.≪삼국사기≫시조 혁거세거서간조에는 혁거세가 前漢 孝宣帝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에 즉위하고 거서간이라 칭하고 이 때 나이를 13세라 하여 위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주석에는 정월 15일이라는 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때는 정월 대보름이며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서<蔚珍 鳳坪 新羅碑>021)韓國古代史硏究會,≪韓國古代史硏究≫2-蔚珍鳳坪新羅碑 特輯號(知識産業社, 1989), 92쪽.에도 갑자년 정월 15일로 되어 있다. 정월 15일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혁거세의 신성성은 그의 죽음에서도 나타나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에 왕이 昇天하였다. 7일 후에 遺體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 또한 죽었다. 國人들이 합하여 장례를 치루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따라와서 방해하여 五體를 각각 장례를 지내어 五陵으로 하고 巳陵이라 하였는데 曇嚴寺 북쪽의 능이 그것이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

 혁거세는 죽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며 7일 후에 유체가 땅에 떨어졌고 왕비도 죽었다. 그의 죽음 또한 보통사람과 다른 신이함을 보이고 있다. 큰 뱀이 합장하는 것을 방해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5체를 각각 장례를 지내어 오릉으로 하여 그 이름을 사릉이라 한데서도 뱀과의 관련이 나타나 있다. 이 오릉은 박혁거세·알영·南解王·儒理王·婆娑王의 능묘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시기의 고분인 조양동·다호리·양동 유적은 원형 봉토분이 완연하지 않다.022)崔鍾圭,<무덤에서 본 三韓社會의 構造 및 特性>(≪韓國古代史論叢≫2,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1), 157∼158쪽. 지금과 같은 원형 봉토는 후대에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五廟制가 시행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씨 왕실에서 5묘제를 시행하면서 박씨들도 5묘를 만들었는데 무덤에 사당을 만들어 5릉을 5묘로 한 것이다.023)崔光植, 앞의 글(1995), 75∼76쪽. 이는≪삼국유사≫味鄒王 竹葉軍條에서 미추왕릉을 大廟라 표현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시조 혁거세를 숭배하여 시조묘를 세워 4시로 제사를 지냈다.

제2대 남해왕 3년 봄에 비로소 시조 혁거세묘를 세워 4시로 제사를 지냈는데 친누이 阿老로서 제사를 주재하게 하였다(≪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

 이 시조묘 제사는 소지왕대 신궁이 설치되기까지 신라의 국가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였으며 임금의 즉위의례도 시조묘에서 거행하였다.024)崔光植, 위의 글, 81쪽. 또한 신궁을 시조가 탄생한 곳인 나을에 세웠으며 신궁이 설치된 이후에도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신라의 멸망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025)崔光植,<新羅 神宮設置에 대한 新考察>(≪韓國史硏究≫43, 1983), 69쪽. 시조묘의 제사를 친누이 아노가 맡았다는 데서 당시 여성 사제의 역할이 주목된다.026)羅喜羅,<新羅初期 王의 性格과 祭祀>(≪韓國史論≫23, 서울大, 1990), 82쪽. 이 제사는 중국적 유교적 제사가 아닌 우리 고유의 제사이며 샤머니즘적 제의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이 원화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신라는 불교의 수용단계에서부터 여승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신라의 종교상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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