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1.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 2) 석탈해 신화

2) 석탈해 신화

 신라 제5대 임금인 昔脫解는 제4대 임금인 儒理王을 이어 즉위하였다. 그는 昔氏의 시조로서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도 신이함을 바탕으로 신화로서 전하고 있다. 그의 신화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먼저 그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탈해는 본디 多婆那國 소생이다. 그 나라는 倭國 동북쪽 1천 리에 있다. 처음에 다파나 국왕이 女國의 왕녀를 들이어 처를 삼았는데 임신하여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버리려고 하였다. 그녀가 참을 수 없어 알을 비단으로 싸서 보물과 함께 함에 넣어 바다에 띄워 그 가는 바에 맡겼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탈해는 다파나국 소생이라고 하였으나 다파나국의 위치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다는 것밖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임신하여 7년 만에 알을 낳았다는 사실로서 난생신화임을 알 수 있다. 보통사람은 임신하여 10개월이면 출산을 하며, 胎生인데 대하여 난생을 하였다는 것에서 박혁거세 신화와 같이 그의 신성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탈해를 바다에 띄어 보낸 것을 볼 때 그는 바다와 관련된 해양세력으로 볼 수 있다.027)李炯佑,≪新羅 初期國家 成長史 硏究≫(建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160쪽. 탈해를 북쪽에서 남하해 온 북방세력으로 보는 견해028)千寬宇,<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25∼26쪽.도 있으나 무리한 해석이라 하겠다. 탈해가 처음 이르는 곳이 金官國 해변이며 나중에 도착하는 곳이 辰韓의 阿珍浦口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金官國 해변에 이르니 金官人들이 괴이히 여겨 취하지 아니하다. 다시 진한 아진포구에 이르렀는데 이 때가 시조 혁거세 재위 39년이다. 이 때 해변의 노모가 끈으로 당겨 해안에 매고 함을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노모가 데려다 길렀는데 자라서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신이하고 빼어났으며 아는 바가 보통사람을 능가했다. 혹자가 이르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모르므로 처음에 함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 울며 따라왔으므로 鵲자를 생략하여 昔을 氏로 삼고 또 넣어져 있던 함을 풀고 나왔으므로 그 이름을 脫解로 하자고 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탈해가 처음에 금관국에 도착하였을 때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서 이를 취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한편≪삼국유사≫탈해왕조에는 수로왕이 臣民과 더불어 북을 치며 맞이하여 머무르게 하려고 하였으나 나는 듯이 달려 계림 동쪽 下西知村 아진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삼국유사≫에 실려 있는≪駕洛國記≫에는 탈해가 김수로왕과 둔갑술을 가지고 겨루게 되자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가락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고≪삼국사기≫탈해니사금조와≪삼국유사≫탈해왕조는 신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므로 관점의 차이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하여튼 탈해는 금관국과는 인연이 닿지 않아 신라의 아진포구에 다다랐다. 해변의 노모가 함을 열어 보니 알이 이미 사람으로 변해 사내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 노모는≪삼국유사≫탈해왕조에는 노구로 기록되어 있는데 무당으로서 새 생명을 탄생시켰다. 알영을 데려다 기른 노구와 같은 존재로서 왕실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여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이다. 탈해의 신이함은 체구와 지식에서 보통사람을 능가하였다. 탈해의 등장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까치의 존재를 유의해야 한다. 까치가 울며 날아왔으므로 노모는 탈해가 이른 것을 알았으며 끈을 당겨 잡아매고 함을 열어 사내아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발견된 고성 동외리 패총에서는 제1단 제4유구에서 큰새 2마리를 중심으로 모두 42마리의 새가 조각되어 있는 鳥紋靑銅器가 발견되었다.029)국립진주박물관,<고성 동외리 패총 설명자료>, 1995, 2쪽. 이러한 까치의 존재는 혁거세의 등장을 알리는 말 우는 소리와 같은 효과라 하겠다. 신이한 이의 등장에는 그것을 알리는 동물의 소리가 있다는 것이 공통점임을 알 수 있다. 김알지의 등장을 알리는 것은 닭이었다. 탈해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게으른 표정이 일찍이 없었다. 노모가 이르기를 너는 비상한 사람으로 骨相이 뛰어나니 마땅히 학문을 좇아 공명을 세우라 말하였다. 이에 학문에 정진하고 겸하여 지리를 익혔다. 楊山 아래를 바라보니 瓠公宅이 吉地이므로 거짓 꾀를 내어 취하고 거기에 거하였다. 그 땅이 뒤에 月城이 되었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탈해의 신화는 혁거세 신화보다 매우 사실적이다.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고 학문과 지리를 익혀 자기의 노력을 통하여 실력을 과시하였다. 물론 탄생의 신이함과 골상이 비상한 점 등은 신화적 요소를 지니지만 그의 노력은 매우 인간적이다. 親母도 있고 養母가 있는 점도 인간적 묘사라고 하겠다. 또한 거짓 꾀를 내어 호공의 집을 취하는 대목은 매우 사실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을 마치자 어린아이가 지팡이를 끌고 노비 둘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돌무더기를 쌓고 7일간 머물렀다. 城中에 살 만한 곳을 바라보니 한 봉우리가 초승달 같은 형세로 오래 살 만한 곳이므로 내려와 찾아보니 호공댁이었다. 이에 거짓 꾀를 내어 숫돌과 숯을 몰래 그 옆에 묻었다. 다음날 아침 문에 이르러 이르기를 이는 우리 할아버지대의 집이라 말하니 호공이 아니라 하므로 다툼이 해결되지 않아 관에 고하였다. 관에서 이르기를 어떤 근거로 이 집이 너희 것이라 하느냐고 물으니 어린아이가 이르기를 나는 본디 冶匠으로 잠시 가까운 마을에 나갔었는데 다른 사람이 취하여 살고 있으니 땅을 파서 조사해 보기를 청합니다 하여 그대로 하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되었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四脫解王).

 ≪삼국사기≫탈해니사금조에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고 학문과 지리를 익힌 다음 호공댁을 취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여기서는 아진포구에 도착하자마자 토함산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토함산은 탈해와 매우 관련이 깊은 곳으로 나중에 탈해는 토함산의 산신이 되어 東岳神으로서 국가제사의 中祀에 편제되었다. 石塚을 쌓고 7일간 머무른 것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한 기도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숫자 7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탈해의 어미가 임신한 후 7년 만에 알을 낳았으며 석총에서는 7일간 머물렀다. 단군신화에서는 곰이 삼칠일 금기하여 사람이 되었다. 우리 민속에서는 아이를 낳고 삼칠일을 금기하고 있다. 하여튼 그의 눈에 들어 온 집은 양산 아래 나중에 월성이 된 호공의 집이었다. 탈해는 이미 풍수지리에 능숙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이 신화에서 주목을 받은 부분은 그가 야장이라는 점과 숫돌과 숯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이 야장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야장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 바로 숯과 숫돌인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가지고 탈해를 북방세력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꾀인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 현명함을 듣고 그 딸로서 처를 삼게 하고 7년에 이르러 大輔로 등용하여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죽으면서 이르기를 先王의 顧命에 내가 죽은 후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서 왕위를 잇게 하라 하여 寡人이 먼저 왕위에 올랐으니 지금은 마땅히 왕위를 전하노라 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남해왕은 탈해를 사위로 삼고 대보로 등용하여 중책을 맡겼으며, 마침내는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탈해는 현명함으로써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으며 중책을 맡게도 되었고 왕위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탈해의 신성성은 遙乃井의 고사에서도 볼 수 있다. 탈해가 죽은 후 疏川丘에 장례를 지냈는데 神이 뼈를 묻어라 명령하여 다시 장례를 지냈다.

建初 4년 己卯에 崩御하자 소천구 중에 장례를 지냈는데 神詔가 있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매장하라 하였다. 그 해골의 둘레가 3尺 2寸이며 身骨의 길이가 9척 7촌이고 이빨은 엉겨 하나가 된 듯하고 골절은 모두 연결되어 소위 천하무적의 力士의 뼈였다. 이것을 빻아서 궐내에 안치하니 또 신조로서 나의 뼈를 東岳에 安置하라 하므로 동악에 안치하였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四脫解王).

 탈해의 뼈는 크고 신이하였으며 또한 신조로서 동악에 안치하였으므로 토함산인 동악과의 관계가 긴밀하게 나타나 있다. 주석에는 ‘붕어한 후 27世 文武王代 調露 2년 庚辰 3월 15일 辛酉 밤에 太宗의 꿈에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는 탈해인데 토함산에 나의 塑像을 동악에 안치하라 하므로 왕이 그 말을 따랐으며 그리하여 지금까지 국가제사가 끊이지 않았으니, 곧 동악신이라’ 하였다. 통일전쟁을 전후하여 노구나 노모가 보이지 않고 노옹이나 노인으로 나타난다.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양산을 바라보고 호공의 집을 취하였으며 요내정에서 白衣의 충성을 시험하였으며 문무왕대부터는 동악신으로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어 그 제사가 고려시대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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