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1.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 3) 김알지 신화

3) 김알지 신화

 김씨의 시조 金閼知에 대한 신화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김알지의 신화도 신성성이 농후하다.

9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金城 서쪽 始林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어 보니 금색의 조그만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함을 취하여 열게 하였더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그 중에 있었는데 모습이 매우 뛰어났다. 임금이 기뻐 좌우에 이르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자손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데려다 길렀는데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고 시림을 고쳐 계림으로 명하였는데 인하여 이로써 국호를 삼았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탈해왕 9년(65) 3월에 왕이 밤에 금성의 서쪽 시림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도 박혁거세 신화와 마찬가지로 신화의 현장은 숲이다. 또한 알지의 탄생을 알리는 데 닭의 우는 소리가 난 것은 혁거세의 탄생을 알린 말 우는 소리와 그 구조가 같다. 알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사람은 호공인데 호공은 바로 석탈해에게 집을 빼앗기고 탈해왕 2년(58) 정월에는 대보에 오른 자이다. 금색의 조그만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고 한 것은 신이 나뭇가지를 통해서 내려왔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함 안에 사내아이가 있었다는 것은 탈해가 난생이 아니라 태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금으로 된 함은 매우 귀중하다는 점을 말하므로 금함 안에 있다는 것으로 귀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것은 난생신화보다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라 하였는데 알지는 곧 아기라는 뜻이다. 이것을 난생으로 생각하여 알로 파악한 것030)三品彰英, 앞의 책, 530쪽.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시림은 계림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鳩林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031)박은용,<시림 표기의 원어 측정>(≪한국전통문화연구≫창간호, 1985), 77쪽.

 ≪삼국유사≫에는 보다 자세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永平 3년(60) 庚申 8월 4일 호공이 밤에 月城 西里를 지나다 시림 중에서 큰 광명을 보았다. 붉은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드리워졌고 구름 중에는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이 궤에서 나왔으며, 또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으므로 그 상황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행차하여 궤를 열어 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난 즉 혁거세의 故事와 같았으므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하였는데 알지는 鄕言에 어린아이를 칭하는 것이다. 안아서 싣고 대궐에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고 기뻐 날뛰고 깡충깡충 뛰었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태자에 책봉하였으나 뒤에 婆娑에게 양보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알지는 熱漢을 낳고, 열한은 阿都를 낳고, 아도는 首留를 낳고, 수류는 郁部를 낳고, 욱부는 俱道를 낳고, 구도는 未鄒를 낳고, 미추가 왕위에 오른 즉 신라 김씨는 알지로부터 비롯한 것이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金閼智 脫解王代)

 ≪삼국유사≫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다. 먼저 연대가 다른데≪삼국사기≫에는 탈해왕 9년(65)으로 되어 있으며≪삼국유사≫에는 탈해왕 4년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기서는 왕이 먼저 들은 것이 아니라 호공이 월성 서리를 지나다 먼저 보고 왕에게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궤를 열고 사내아이를 얻어 대궐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새와 짐승들이 기뻐 날뛰고 좋아하는 모습은 축제를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택일하여 태자로 책봉한 사실과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한 사실까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世系를 서술하고 미추왕이 왕위에 오른 사실까지 기록함으로써 김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파사에게 왜 양보하였는지 하는 점과 미추왕 이전에 왜 왕이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文武王陵碑>를 비롯한 금석문 자료에는 김씨 왕실의 시조를 星漢이라 하여, 이를 알지로 보는 견해032)今西龍,≪新羅史硏究≫(近澤書店, 1933), 492쪽.와 미추로 보는 견해033)前間恭作,<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つきて>(≪東洋學報≫15-2, 1925), 56쪽.가 있다. 위의 世系에서 역사적 인물은 구도로서 그는 8대 阿達羅尼師今에서부터 9대 伐休尼師今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미추왕 2년(263)에 葛文王으로 추봉되었다.034)木下禮仁,<新羅始祖系譜の構成-金氏始祖を中心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 1966),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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