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2. 성립과 발전
  • 1)≪삼국사기≫초기 기록의 문제점

1)≪삼국사기≫초기 기록의 문제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첫 왕인 赫居世는 기원전 57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의심하는 견해가 있었다. 고구려·백제에 비해 그 발전이 늦은 신라의 건국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신라 중심의 우월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혁거세가 즉위한 기원전 57년은 간지로 甲子年에 해당되는데, 이는 특히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의 첫번째 갑자년에 해당하는 까닭에 이는 讖緯說의 甲子革命說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赫居世居西干 다음의 南解次次雄이 즉위한 연대 또한 갑자년(A.D. 4)인 것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이뿐만 아니라≪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 신라본기에 한정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라본기에는 脫解尼師今代에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지역에서 백제와 전투를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탈해는 57∼80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에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에서 백제와 교전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백제가 이미 이 지역을 석권하였으며 신라 또한 이 지역에까지 세력권을 확대한 것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3세기 전반의 한반도 상황을 전하는 중국의≪三國志≫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당시 한반도의 중남부에는 辰王이 다스리는 目支國이 가장 큰 세력으로 馬韓의 50여 국을 통솔하고 있었고, 伯濟國은 마한 소국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사로국 또한 弁辰 소국들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을 뿐 다른 소국들에 비해 아무런 우위를 설명할 만한 자료가 없다. 또≪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비교적 신라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다고 생각되는 押督國(慶山)·伊西國(淸道) 등을 완전히 복속하지 못한 상태에서 百濟·樂浪·靺鞨·加耶 등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즉 압독국의 경우≪삼국사기≫ 地理志에는 祗摩尼師今 때에 伐取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 의하면 婆娑尼師今 23년(102)에 항복하였다가 逸聖尼師今 13년(146)에 모반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서국은≪삼국유사≫에 의하면 儒理尼師今 19년(A.D. 42)에 일단 항복하였으나 그 뒤 儒禮尼師今 14년(297)에 金城을 공격하여 크게 위협한 것을 보면 이들 소국에 대한 복속이 완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탈해니사금대(57∼79)의 백제와의 전투지역이 蛙山城(報恩)·狗壤城(沃川?, 槐山?)035)蛙山城을 충북 報恩으로 비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나, 狗壤城은 충북 沃川(李丙燾,≪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12쪽), 또는 충북 槐山(千寬宇,≪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184쪽)으로 비정된다.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伐休·奈解尼師今代를 거쳐 味鄒尼師今代(262∼283)까지 계속되고 있다.036)백제와의 전투기록은≪三國史記≫ 新羅本紀의 脫解尼師今 8년(64)·10년·14년·18년·19년, 婆娑尼師今 6년(85), 阿達羅尼師今 14년(167)·17년, 伐休尼師今 5년(188)·6년·7년, 奈解尼師今 4년(199)·19년·23년·27년·29년, 沾解尼師今 9년(255), 味鄒尼師今 5년(266)·11년·17년·22년조에 보인다. 미추니사금 22년(283) 이후에는 백제와의 전투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眞興王代(540∼575)에 이르러 다시 나타난다. 경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서국·압독국에 대한 지배조차 확실치 못한 상황에서 백제와의 전투를 위해 충청도지역까지 군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037)≪三國遺事≫ 王曆에는 “제16대 乞(訖)解尼師今…의 왕대에 백제병이 처음 來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여겨진다.

 또 탈해의 즉위에 관한≪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의 즉위 당시의 나이가 62세라고 하였는데, 같은 기사에서 그가 동해안의 阿珍浦에 도착한 것이 혁거세 재위 39년(B.C. 19)이라 하고 있다. 탈해가 즉위한 연도를 기준으로 그의 탄생년도를 찾아 보면 그가 즉위한 해가 서기 57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는 기원전 5년에 출생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출생하기 14년 전에 이미 동해안에 도착한 것이 된다. 이는 단순한 기록상의 오기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나, 이 이외에도 초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경우 100년이 훨씬 넘는 수명을 가진 왕들이 다수 나타나게 되는 등의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038)姜鍾薰,<新羅 上古紀年의 再檢討>(≪韓國史論≫26, 서울大, 1991), 7∼9쪽. 또 초기에 보이는 靺鞨에 대한 기록은 말갈이란 종족 명칭이 6세기에 들어와서야 중국 문헌에 나타나고 그 거주지가 만주지역이므로 이를 기록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며, 유리니사금 32년(A.D. 55)에 6部의 명칭을 고치고 李·鄭·孫·裵·薛·崔 등의 姓을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이 시기의 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견해이다.

 과거 우리 역사를 이른바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일인 학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기 기록 전부를 불신하는 태도를 취하였다.039)이 문제에 관한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崔在錫,≪韓國古代社會史方法論≫(一志社, 1987), 10∼263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초기의 일본 학자 중에는 신라 말기에 神德·景明·景哀의 세 왕이 박씨 성을 칭한 까닭에 박씨를 김씨 왕통 이전에 존재한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으며, 여기에 다시 陰陽 三才사상에 입각하여 昔氏姓을 추가하여 3姓 세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040)前間恭作,<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つきて>(≪東洋學報≫15-2, 1925), 56∼82쪽.
池內宏,<新羅の骨品制と王統>(≪東洋學報≫28-3, 1941;≪滿鮮史硏究≫上世篇 2, 吉川弘文館, 1960, 557∼561쪽).
그 뒤에도 이러한 이론은 더욱 발달하여 법흥왕 이전의 22명의 왕 이름이 알(卵)·날(生)·불(火)로 분류되는 점과 특히 내물마립간 이전의 16명의 왕 이름이 대부분 내물왕 이후의 6명의 왕 이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물마립간 이전의 신라본기의 기록을 허구로 보기도 하였다.041)末松保和,<新羅上古世系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49∼115쪽.

 이러한 일본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반박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는데, 중요한 관점을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그 하나는≪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보이는 기록들은 紀年상의 문제점은 있으나 대체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초기 기록을 대체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불신론」또는「허구론」이라 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국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수정론」과「긍정론」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042)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古代篇(一潮閣, 1982), 143∼147쪽.

 수정론에도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우선≪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三姓世系를 계기적인 것이 아니라 병렬적인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이는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기년상의 문제점을 일단 인정하고 이의 합리적 해석을 통하여 사료적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수정론의 선구적인 견해에 따르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계승적으로 되어 있는 박·석·김 3성의 세계는 실제로는 병렬적인 것으로, 부족연맹 시기에 실제 연맹장에 오르지 못한 자기 부족의 부족장들을 후대에 이들도 尼師今이었던 것처럼 인식하여 이사금의 대수가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史書의 편찬과정에서 奈勿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된 金氏世系와 내물 직전까지 이사금들을 배출한 昔氏世系는 기년상의 위치를 비교적 원형 그대로 두고, 석씨·김씨와 병렬적인 朴氏世系를 그 이전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전반적인 기년의 인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3성 세계를 병렬적인 것으로 고치고, 실제 이사금이 아니었던 인물들을 세계에서 제외한다면 사실과 가까운 紀年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祗摩·逸聖·阿達羅·助賁·沾解·基臨尼師今 등을 제외하고, 언어학적인 해석을 통해 박씨 세계 속에 끼어 있는 탈해를 기록상 그의 손자로 되어 있는 벌휴와 동일인물이라고 보아 세계에서 제외시켰다.043)金哲埈,<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歷史學報≫17·18, 1962), 151∼192쪽.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 학자로는 金光洙가 있다. 그는 朴·昔·金 3성의 계기적 계승을 사실로 인정하였으나, 朴氏世系 가운데 있는 脫解와 昔氏世系 속에 끼어 있는 味鄒의 경우에는 世系상의 위치를 의심하였다. 그래서 탈해와 伐休를 세계에서 제외시키고, 미추의 위치를 奈勿 직전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기년의 인하를 추구하였다. 또 奈解尼師今 초반의 12년과 미추니사금 초반의 10년, 訖解尼師今 후반의 36년을 제외시켜 전체적으로 70여 년의 기년을 인하시키고자 하였다(金光洙,<新羅 上古世系의 再構成 試圖>,≪東洋學≫3, 檀國大, 1973, 363∼391쪽).

 또 최근에는 3성 세계 자체는 인정하고 왕들의 재위 연수만을 수정할 것을 주장한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백제와의 교전 기사가 탈해왕대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기년의 조정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기존 연구에서 탈해를 3세기 전반에 위치시킨 문제점을 지적하고, 3성 족단의 계보를 출생시기를 중심으로 역추적하여 탈해를 약 250년대로, 파사니사금은 260∼270년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044)姜鍾薰, 앞의 글, 1∼58쪽.

 이에 반해「긍정론」의 입장에 서는 학자들은 신라 왕통에 있어 박·석·김 3성 교립은 사실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 밖의 일반적인 기사도 대체로 파사니사금(A.D. 80∼113) 이후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는 해방 이후의 고고학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045)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관한 一考察>(≪東亞文化≫7, 1967), 1∼33쪽. 긍정론의 대표적인 견해에 따르면 초기에는 朴氏系와 金氏系의 두 부족 집단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에서 박씨계의 세습적인 首長權이 성립·발전하였는데, 이것이 일종의 冶匠의 성격을 갖고 있는 탈해니사금(A.D. 57∼80)에 의해 한때 단절되었다고 한다.

 탈해는 冶鐵의 능력을 가진 자였으나 족적인 기반이 약하여 그 일대로 끝났으며, 뒤에 탈해의 후손을 자처하는 석씨계의 벌휴니사금(184∼196)이 박씨계를 대신하여 등장하였으나 이는 탈해의 후예가 아니라 실은 마한·백제세력에 밀려 한강 유역에서 忠州→報恩→小白山脈을 거쳐 마침내 경주에까지 이동해 온 이른바 진한세력으로 본다. 그리고 이 석씨계는 사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왕성한 정복력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3세기 중엽에는 사로국이 진한의 전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탈해대에 보이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투기록 또한 남하하는 진한세력과 백제세력 사이의 분쟁이 나중에 이렇게 기록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046)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 上 (≪韓國學報≫2, 1976), 18∼46쪽. 이 이외에도 긍정론의 입장에 서는 학자로 李鍾旭이 있다. 그는 儒理王代 이후의 기록은 그 기년을 인정할 수 있고, 赫居世와 南解代의 기록들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신라 국가 형성기의 모습을 복원하고자 하였다(李鍾旭,≪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1982), 4∼9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모든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신뢰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이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으나, 특히 기년상의 문제에는 아직도 상당히 커다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세론적으로는 수정론의 입장이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보이나, 이 또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본서에서는≪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서술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절충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