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2. 성립과 발전
  • 2) 성립
  • (1) 사로 6촌의 위치와 성격

(1) 사로 6촌의 위치와 성격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은 사로 6촌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사로 6촌의 연맹에 의해 사로국이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사로지역에 閼川 陽山村·突山 高墟村·嘴山 珍支村·茂山 大樹村·金山 加利村·明活山 高耶村의 여섯 촌이 있었고, 이들 6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삼국유사≫에 나오는 6촌의 명칭 등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표 1>과 같다.

村 名 村 長 始 祖
誕 降 地
改 定 名
(儒禮王 9년)
更 定 名
(高麗 太祖)
位 置 姓氏 俗說
閼川陽山村 竭 平 瓢 嵓 峯 及梁部(梁部) 中 興 部 中 央
突山高墟村 蘇伐都利 兄 山 沙 梁 部 南 山 部 南 村 鄭(崔)
茂山大樹村 俱 禮 馬 伊 山 漸(牟)梁部 長 福 部 西 村  
嘴山珍支村 智 伯 虎 花 山 本 彼 部 通 仙 部 東南村 崔(鄭)  
金山加利村 祗 沱 明 活 山 漢(韓)岐部 加 德 部 東 村
明活山高耶村 虎 珍 金 剛 山 習 比 部 監 川 部 東北村

<표 1>≪三國遺事≫에 보이는 斯盧 6村

 사로 6촌의 위치에 관하여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경상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이고,047)斯盧 6村의 위치를 경상도 일원에 비정하는 견해는 처음 金哲埈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는 閼川 陽山村을 慶州에, 金山 加利村을 金泉과 星州 부근에, 茂山 大樹村을 淸風과 醴泉에, 突山 高墟村을 靑山과 尙州에, 明活山 高耶村을 경주와 永川에 비정하고 嘴山 珍支村은 불명이라 하였다(金哲埈,<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歷史學報≫1, 1952, 29쪽). 그 후 千寬宇는 이 견해를 발전시켜 茂山을 淸風이 아닌 義城으로, 明活山을 慶山 방면으로 수정하였으며, 嘴山 珍支村은 寧海의 丑山과 蔚珍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였다(千寬宇, 앞의 글, 18∼46쪽). 둘째는 경주분지 및 월성군 일대로 보는 견해이며,048)李鍾旭, 앞의 책, 22∼25쪽 및 李炯佑,≪新羅 初期國家 成長史 硏究≫(建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11∼25쪽. 셋째는 그 범위를 경주분지 안에서 찾는 것이다049)李丙燾,<新羅의 起源問題>(≪震檀學報≫8, 1937;≪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596∼604쪽).
李鍾恒,<新羅六部考>(≪國民大論文集≫1, 1969), 1∼51쪽.
金元龍,<斯盧六村과 慶州古墳>(≪歷史學報≫70, 1976), 1∼14쪽.
崔在錫,<新羅의 六村·六部>(≪東洋學≫16, 檀國大, 1986), 205∼226쪽.
. 그런데≪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사로국은 진한의 12개의 소국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진한의 영역이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일대이므로 사로국을 구성하는 6촌을 경상도 일대에 비정한 견해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시의 소국들은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인접하여 하나의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대구의 경우 新川 유역의 범람원을 무대로 몇 개의 취락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대구지역의 초기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데,050)尹容鎭,<大邱의 初期國家 形成過程>(≪東洋文化硏究≫1, 慶北大, 1974; 歷史學會 編,≪韓國史論文選集 古代篇≫, 一潮閣, 1976, 231∼243쪽). 사로국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로 6촌은 경주분지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들 6촌인과 6촌의 지배세력인 6村長의 출자에 대하여≪三國志≫辰韓條에는 秦의 亡人이라 하였고,≪삼국사기≫에는 고조선의 遺民이라고 하였으며,≪삼국유사≫에는 진한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건국 주체세력인 3성 집단이 모두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이주민 세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는 기록은 단순하게 보아 넘길 수 없다. 이는 아마도 고조선 멸망 이후 유이민들의 한반도 남부로의 유입을 말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삼국유사≫에서는 ‘진한의 땅에 옛부터 6촌이 있었다’고 하여 이들이 원래 진한지역 출신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6촌의 시조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天降族 설화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또한 사로 6촌의 지배세력들이 북방으로부터의 유이민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사로국의 모체인 사로 6촌은 북방으로부터의 유이민 세력이 주축이 되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의 고고학 계통의 연구 성과를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해서 본다면 경주분지에 정치적 지배계층의 묘제로 등장한 최초의 것은 지석묘라고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의 묘제를 대표하는 지석묘는 기원전 7∼2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며,051)金載元·尹武炳,≪韓國支石墓硏究≫(國立博物館, 1967), 18∼19쪽.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경주분지도 예외는 아니다.052)경주분지에 분포하는 지석묘에 대한 정확한 보고는 없으나, 대략 경주군과 월성군 일대에 30여 개 정도의 支石墓群이 존재한다고 하며, 토함산 이동의 동해안 지역을 제외한 월성군 내에만도 100여 기의 지석묘가 존재한다고 한다(李鍾旭, 앞의 책, 31∼32쪽 및 李炯佑, 앞의 책, 14∼16쪽). 지석묘 다음으로 경주에 등장한 묘제는 土壙墓인데, 시기의 선후에 따라 土壙木棺墓와 土壙木槨墓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토광묘 다음으로는 積石木槨墳이 나타난다. 이 묘제들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새로운 지배계층의 등장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 6촌이 진한지역의 원주민과 북방으로부터의 유이민의 결합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그 연대는 아무래도 철기문화의 도입 이후가 될 것이며, 그들의 묘제는 청동기시대의 전통적인 묘제인 지석묘와는 다른 묘제가 등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주 九政里나 入室里 등의 세형동검을 동반하는 초기 철기의 유적은 이러한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경주지역의 토광묘의 기원이나 편년에 대해 합치된 견해가 있는 것은 아니나, 이들이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나무곽 무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다면,053)崔秉鉉,≪新羅古墳硏究≫(一志社, 1992), 82∼90쪽. 이들은 이 지역에 새로운 유이민의 도래와 이에 따른 새로운 정치질서의 성립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054)이 문제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지 않다. 토광목곽묘의 주인공을 6촌의 지도자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金元龍,<고분문화>,≪慶州≫, 열화당, 1984, 258쪽), 토광목관묘를 대개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에 경주에 도달한 선발 유이민 세력 즉 박씨계의 묘제로 보고 토광목곽묘는 서기 2세기 후반에 남하한 후발 유이민 세력의 것으로 석씨계의 지배세력의 묘제였다는 견해도 있다(崔秉鉉, 위의 책, 80∼109쪽). 즉 고조선의 멸망과 이로 인한 북방의 정치적 변동에 따른 유이민의 波動은 남부지역에서의 소국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 진한인들이 낙랑지역의 주민들을 阿殘이라 부른 것을 당시의 중국인들이「阿」를「我」로 보아 ‘뒤에 남은 우리 족속’이란 뜻으로 풀이한 것이나, 辰韓을 혹은 秦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秦의 役을 피해 韓으로 간 종족’이라는 식의 중국인의 설명05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은 고조선 멸망 이후 연속적인 남쪽으로의 유이민의 파동이 있었음을 인식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이들 사로 6촌의 촌장들은 각기 독자적인 정치조직과 통치영역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들이 비록 하나의 연맹체를 형성하고는 있었겠지만, 그 유대는 그렇게 강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느슨한 연맹체제를 형성하여 공동의 관심사가 있을 때 6촌의 지도자들이 모여 협의를 하기도 하였으나 아직 어느 한 촌락의 장이 다른 촌장들을 압도할 만큼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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