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2. 성립과 발전
  • 3) 발전
  • (1) 내부체제의 정비

(1) 내부체제의 정비

 ≪三國志≫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三韓의 小國들은 기본적으로 邑落으로 구성되었으며 읍락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읍락이 國邑이었다. 읍락과 국읍의 관계는 소국의 발전정도에 따라 달랐겠지만 초기에는 국읍의 정치적 실권은 미약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斯盧國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사로국의 성장은 안으로 사로국 내부의 읍락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이렇게 모아진 힘으로 인근의 소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이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로국을 구성하는 읍락들 즉 후대의 6부가 된 집단들은 상당히 독자성이 강한 집단이었고 그 전통은 상당히 늦게까지 계속된다고 보이지만, 삼한 지역에서는 대개 2세기 말경부터 국읍을 중심으로 읍락사회가 통합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므로069)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一潮閣, 1984), 132∼164쪽. 이 지역에서 가장 발전이 빨랐다고 생각되는 사로국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국읍을 중심으로 하는 읍락사회의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삼국사기≫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들을 통해 읍락사회의 통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A-① 脫解로서 大輔란 벼슬을 삼아 軍國政事를 맡기었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남해차차웅 7년).

② 倭人이 兵船 백여 척을 보내어 해변의 民戶를 노략질하므로 六部의 精兵을 발하여 막게 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남해차차웅 11년).

③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姓을 하사하니 楊山部를 梁部라 하고 그 姓을 李라 하고…(≪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니사금 9년)

④ 박씨의 貴戚으로 국내의 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니 號를 州主·郡主라 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탈해니사금 11년).

⑤ 使者 10명을 分遣하여 州·郡主로 公事에 게을리하여 田野를 많이 거칠게 한 자를 廉察하여 貶黜케 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11년).

⑥ 波珍湌 仇道와 一吉湌 仇須兮를 拜하여 左右軍主를 삼아 召文國을 치니 軍主의 名은 이에서 시작된 것이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벌휴니사금 2년).

 위의 기록들은≪삼국사기≫의 벌휴니사금대(184∼195)까지의 기록들인데, 이를 통해 당시 사로국이 대내적으로 결속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대략 살펴볼 수 있다. 먼저 A-①의 대보는 그 임무가 군국정사를 맡았다는 것으로 보아 사로 6부의 연합군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보라는 직명은 탈해니사금대에는 伊伐湌으로 바뀐다고 보이지만070)≪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탈해니사금 11년조에 順貞을 伊伐湌으로 삼아 政事를 맡겼다고 하였는데, 大輔라는 직명이 그 뒤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보의 직제는 이 때에 폐지되고 이벌찬이 그 임무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연합군의 통수권이 왕 자신이 아닌 관료에게 위임된다는 사실은 사로국에 있어서 연맹장인 왕의 지위가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겠다. 대보 임명 기사의 4년 뒤의 기록인 A-②에서 6부의 정병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보의 임무가 연합군의 통수에 있는 것임을 반증하는 동시에 당시 사로국의 발전 단계가 다른 소국에 비해 앞서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하겠다. 즉 당시의 사로국은 이미 연맹장인 사로국의 왕이 연합군의 지휘자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6부의 군대를 동원해서 대외전투에 나설 정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A-③의 6부 改名 및 賜姓의 기록은 그 사실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기록이기는 하지만 유리니사금대에는 6부의 전신인 6촌사회를 어떠한 형태로든 재편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탈해니사금대(A.D. 57∼79)와 파사니사금대(A.D. 80∼111)에 州主와 郡主를 임명했다거나 이들을 감찰하였다는 A-④·⑤의 기록은 비록 주주·군주 등의 이름이 당시에 이미 사용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6부의 지역과 일부 복속지역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치질서를 마련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071)≪三國史記≫권 48, 列傳 8, 勿稽子에 “물계자는 奈解尼師今 때의 사람이다.… 이 때에 八浦上國이 함께 阿羅國을 칠 것을 모의하니 아라국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王孫 奈音으로 하여금 近郡 및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여 드디어 八國 군사를 격파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동원된 군대가 ‘근군 및 6부의 군사’라고 한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나해니사금대(196∼229)에 동원된 군대는 단지 6부에서 동원한 6部兵뿐만이 아니라 인근 郡의 사람들도 동원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당시에 사로국은 인근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여 군사를 동원할 정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A-⑥의 처음 軍主를 두었다는 기록도 智證王代(500∼513)의 기록과 중복되는 까닭에 그 사실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072)≪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6년조에 “2월에 왕이 친히 국내 州郡縣의 제도를 정하고 悉直州를 두어 異斯夫로 軍主를 삼으니, 군주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의 군주는 좌우군주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지증왕대의 군주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좌우군주는 慈悲麻立干 16년(473)에 “正月에 阿湌 伐智와 級湌 德智로 左右將軍을 삼았다”는 좌우장군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때에 마련된 군사제도의 골격이 자비마립간대(458∼478)까지 지속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기록의 좌우군주는 남해차차웅대의 대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중앙의 六部兵을 지휘하는 책임자의 명칭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073)6部兵에 관한 기록은 위의 A-② 이외에도≪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나해니사금 14년(209)조에도 보이는데, 이로 보아 2∼3세기까지의 신라의 군대는 6부의 군대를 연합한 것이 주축임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두 명의 군주를 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군대의 규모가 커졌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장군을 복수로 임명함으로써 병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상호견제케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召文國을 정벌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제 사로국은 적극적으로 인근의 소국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조직을 재편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추측이 옳은 것이라면 대개 2세기 말경에 이르러 사로국은 국읍 중심의 내부단결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정벌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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