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2. 성립과 발전
  • 3) 발전
  • (2) 진한 소국의 복속

(2) 진한 소국의 복속

 그러면 사로국이 인근의 소국들을 복속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소국의 복속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① 居道는 脫解尼師今 때에 벼슬하여 干이 되었다. 그 때 于尸山國·居柒山國이 이웃 지경에 介在하여 자못 나라의 근심이 되었는데…이에 병마를 출동하여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하였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道).

② 군대를 일으켜 音汁伐國을 치니 그 임금이 무리와 더불어 스스로 항복하였고, 悉直·押督의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3년).

③ 군사를 보내어 比只國·多伐國·草八國을 쳐서 아울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9년).

④ 波珍湌 仇道와 一吉湌 仇須兮를 拜하여 左右軍主를 삼아 召文國을 치니 軍主의 名은 이에서 시작된 것이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벌휴니사금 2년).

⑤ 伊湌 于老로 大將軍을 삼아 甘文國을 쳐 깨뜨리어 그 땅을 郡으로 삼았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조분니사금 2년).

⑥ 骨伐國王 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邸宅과 田莊을 주어 安居케 하고 그 땅을 郡으로 삼았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조분니사금 7년).

⑦ 尙州는 沾解王 때에 沙伐國을 취하여 州를 삼은 것이다(≪三國史記≫권 34, 地理志 1, 상주).

 먼저 B-①의 기록은 탈해니사금대(57∼79)에 거도가 馬叔이라는 희락을 통해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였다는 것인데, 이보다 몇 세기 뒤인 지증왕대(500∼513)에 異斯夫가 加耶를 공격할 때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가야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우시산국을 蔚山, 거칠산국을 東萊 근처로 비정하였을 때 탈해니사금대의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074)李丙燾, 앞의 책(1976), 645쪽.
千寬宇, 앞의 책, 291∼292쪽.
또 두 나라를 병합한 중요한 사실이 거도열전에만 보이고 신라본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이 일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말해 주는 증거로 생각된다. B-②의 기록도 다분히 설화적인 요소가 짙은 것으로 파사니사금대의 사실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특히 悉直國의 위치가 현재의 三陟 부근이고 음즙벌국을 安康 부근으로 비정할 경우 이 두 나라의 위치가 너무 떨어져 있어 양국 사이에 영토분쟁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며, 首露王이 이 분쟁에 관여한다는 것도 사실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 종래의 지배적인 견해였다.075)千寬宇, 위의 책, 292쪽. 그러나 실직국의 위치는 현재의 삼척 부근이 아니라 경주나 興海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며,076)崔炳云은 悉直谷國을 月城郡 川北面 北部로 비정하고 있으며(崔炳云,<西紀 2世紀傾 新羅의 領域擴大>,≪全北史學≫6, 1982, 17∼49쪽), 李丙燾(李丙燾, 앞의 책, 1976, 17쪽)와 方龍安(方龍安,<悉直國에 대한 考察>,≪江原史學≫3, 1987, 51∼66쪽)은 安康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 안강읍과 천북면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곳이므로 이 부근을 실직곡국의 故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삼국사기≫지리지에도 음즙벌국과 실직국의 복속이 파사니사금대의 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077)≪三國史記≫권 34, 地理志 1, 義昌郡 및 권 35, 地理志 2, 三陟郡. 신라본기에도 파사니사금대에 실직이 叛했다는 기록과 압독에 行幸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078)≪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5년·27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079)다만 首露王이 이 분쟁에 간여하였다는 부분은 후대의 粉飾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추측과 같이 파사니사금 23년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 이후의 소국 병합의 기록도 모두 사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B-③의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의 정벌 기사는 사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080)李丙燾, 앞의 책(1976), 17쪽.
千寬宇, 앞의 책, 292∼295쪽.
李鍾旭, 앞의 책, 83∼90쪽.
다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081)李丙燾는 比只國을 昌寧, 多伐國을 大邱, 草八國을 陜川郡 草溪面에 비정하고 있으나, 千寬宇는 이들을 각각 安康邑과 迎日郡의 義昌邑·杞溪面에 비정하고 있어서 상당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주 46) 참조). 비지국을 昌寧, 다벌국을 大邱, 초팔국을 陜川郡 草溪面에 비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로국은 永川의 골벌국이나 義城의 소문국 등을 복속하기에 앞서 이보다 멀리 있는 대구·합천 등지를 점령하였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사로국의 영토확장이 반드시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차례로 복속시켜 나간 것은 아니고 또 복속이 곧 영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B-④·⑤의 소문국과 감문국의 복속은 모두 군대를 동원한 본격적인 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소문국은 현재의 義城 부근으로, 감문국은 金泉市 開寧面 일대로 비정된다.082)≪三國史記≫권 34, 志 3, 地理 1, 聞韶郡條에 “聞韶郡은 召文國인데 景德王이 개명하였다. 지금의 義城府니 領縣이 넷이다” 하였고, 開寧郡條에 “開寧郡은 옛날 甘文小國이다” 하였다. 즉 2세기 말인 벌휴니사금 2년(185)에 의성지방에 진출한 신라는 3세기 초인 조분니사금 2년(231)에는 金泉 부근까지 진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B-⑦의 沾解尼師今代(247∼261)의 사벌국 점령은 이러한 세력확장의 결과 낙동강 이서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라는 파사니사금대(80∼111)에 安康·慶山을 획득하고 나아가 대구·창녕·합천군 초계면 등지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고, 벌휴니사금대(184∼195)에는 소문국을, 조분니사금대(230∼246)에는 감문국과 골벌국을 그리고 첨해니사금대에는 사벌국을 복속하여 3세기 중엽까지는 경상북도 일원을 그 세력권 안에 넣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달라니사금대(154∼183)에 鷄立嶺과 竹嶺의 길을 개척하였다는 기록은083)≪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아달라니사금 3년·5년. 계립령이나 죽령의 위치 및 그 연대에 대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신라가 일찍부터 이 방면으로의 진출에 적극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라 생각된다.

 한편 경상남도 지역으로의 진출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시도되었던 것 같다. 위의 B-①에서 탈해니사금대에 이미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정복하였다는 것은 후대의 기록이 잘못 편입된 것이라 생각되지만 파사니사금대에 蔚州지역에까지 진출한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084)≪三國史記≫권 34, 志 3, 地理 1, 臨關郡條에 “河曲縣(河西縣이라고도 한다)은 婆娑王 때에 屈阿火村을 취하여 縣을 둔 것인데 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蔚州이다”라고 하였다. 이 지역으로의 진출에도 결코 소홀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가야지역을 확보하는 것은 후대의 일이나 일찍부터 가야와의 전투기록이 빈번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소국들이라 생각되는 浦上八國과의 전투는 이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사로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여겨진다.085)浦上八國과의 전투기록은≪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나해니사금 14년조와 권 48, 列傳 8, 勿稽子傳에 보이는데, 구체적인 나라 이름은 물계자전에 骨浦·柒浦·古史浦의 세 나라만이 보인다. 포상 8국이라는 명칭이나 골포·칠포·고사포 등의 國名으로 보아 이들 나라가 강어귀나 해안에 위치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李丙燾는 그 위치를 昌原郡(골포)·泗川郡(칠포)·固城郡(고사포)에 비정하고 있으나(李丙燾, 앞의 책, 1976, 701쪽), 이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무리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신라가 가야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보낸 것이라면 포상 8국의 위치는 사로국과 가야 사이인 울주군이나 양산군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가 인근의 소국들을 복속하는 것은 파사니사금∼첨해니사금대, 즉 2세기 초∼3세기 중엽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이 뒤에는 지증왕대의 于山國 歸服과 법흥왕대의 가야정복에 이르기까지 소국의 병합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경상북도 일원의 진한계 소국의 복속은 3세기 중엽에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로국은 경주에 가까운 이서국·골벌국보다 압독국·감문국·소문국 등을 먼저 복속시켰다. 이는 사로국의 발전이 꼭 경주에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차례로 인근의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의 복속이 곧 영토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뿐더러, 복속 그 자체도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B-⑤·⑥·⑦에서는 복속한 감문국·골벌국·사벌국 등의 땅을 곧 郡이나 州로 편입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이 지역들이 나중에 군이나 주로 편제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신라 지방제도의 성립이 지증왕대에 와서야 가능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086)신라가 전면적인 州郡制를 시행한 것은 智證王代의 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며, 이는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浜田耕策,<新羅の城·村設置と州郡制の施行>,≪朝鮮學報≫84, 1978, 1∼24쪽).≪삼국사기≫에 보이는 피복속 소국들의 반란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직접 증명해 준다 하겠다.

C-① 悉直이 叛하매 군사를 동원하여 討平하고 그 餘衆들을 南鄙로 옮기었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5년).

② 獐山郡은 祗味王 때에 押梁小國을 쳐서 취하여 郡을 둔 것이다(≪三國史記≫권 34, 志 3, 地理 1, 獐山郡).

③ 押督이 叛하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쳐서 평정하고 그 나머지 무리들을 남쪽으로 옮겼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일성니사금 13년).

④ 沾解王 때에 沙梁伐國은 이미 우리에게 복속하였으나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歸服하였으므로 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討滅하였다(≪三國史記≫권 45, 列傳 5, 于老).

⑤ 伊西古國이 金城을 공격하므로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물리치지 못하였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유례니사금 14년).

 위의 C-①의 기록은 파사니사금 23년(102)에 복속한 실직국이 2년 후에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를 평정하였다는 것이고, C-③은 파사니사금 23년에 항복한 압독국이 40여 년 뒤인 일성니사금대에 와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압독국의 복속에 대해서는 C-②에서 보는 바와 같이 地理志에는 祗味王(祗摩尼師今)代에 복속한 것으로 나와 있어 파사니사금 23년조의 기록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파사니사금대의 실직국이나 압독국의 복속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에 두 나라 모두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보아, 지마니사금대의 압독국 복속 기사는 파사니사금대의 불완전한 복속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재차 압독국으로 하여금 복속을 약속하게 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바꾸어 말하자면 파사니사금대의 압독국과 실직국의 복속이란 실질적인 영토의 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로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소국 지배자들의 복종의 서약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종류의 서약에 대해 사로국의 입장에서는 이를 ‘와서 항복하였다(來降)’, 또는 ‘복속하였다’고 표현하였으나 실상은 복속이라기보다는 적대행위의 중지나 의례적인 조공의 약속 등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소국의 내부적인 통치질서에는 커다란 변화는 없었을 것이고, 그 뒤 대내외적인 조건이 변화하게 되면 얼마든지 종전의 서약을 어기고 사로국에 대해 적대적인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C-④의 사벌국이 원래 신라에 복속하였으나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歸服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예는 C-⑤의 伊西國의 경우를 살펴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이서국을 이서고국이라 표현했으므로 당시의 이서국이 이미 신라에 복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서국이 언제 신라에 복속하였는가를 말해 주는 기록은≪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서국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에 몇 차례 보이는데, 이 기록들에 의하면 이서국은 제3대 弩禮王 14년(A.D. 37)에 금성을 공격하였고, 그 4년 뒤인 노례왕 19년에는 신라에 복속되었으나, 제14대 유리왕대에 다시 금성을 대거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087)≪三國遺事≫권 1, 紀異 2, 伊西國·第三弩禮王條·味鄒王竹葉軍. 여기서 유리왕대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므로 사실로 볼 수 있으나, 노례왕 14년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제14대 유례니사금대의 기록이 잘못 삽입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088)이는 아마도 제3대 儒理尼師今과 제14대 儒禮尼師今의 왕명이 비슷한 데서 오는 착각이었을 것이다.≪삼국유사≫에서는 제3대 유리니사금을 弩禮王이라 하였고 제14대 유례니사금을 유리왕이라 하였는데,≪삼국사기≫의 제3대 유리와≪삼국유사≫의 제14대 유리는 동일한 왕명이 된다. 이러한 왕명의 유사성에 대하여는 이미≪삼국사기≫의 찬자도 의문을 제기하여,≪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儒禮尼師今 元年條에 “古記에는 제3·제14대 두 왕의 이름이 같아 儒理 혹은 儒禮라 하였으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또≪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三弩禮王에도 “朴弩禮尼叱今은 儒禮王이라고도 한다”고 하여≪三國史記≫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고 노례왕 19년에 신라가 이서국을 정벌하였다는≪삼국유사≫의 기록도 사실로 보기 힘들다.089)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로국이 인근의 소국들을 복속시키기 시작하는 것은 적어도 2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이서국 정벌의 기록은 어떤 착오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삼국사기≫에서 ‘이서고국’ 즉 옛 이서국이라 하였으므로 이서국은 유례니사금 14년(297) 이전에 일단 신라에 복속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090)三品彰英은 이서국 멸망의 기록은 조작된 것으로 보고,≪日本書紀≫권 17, 繼體紀 24년에 보이는 伊斯枳牟羅를 伊西國이라고 보아 실제 이서국이 신라에 병합된 것은 法興王 25년(538)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三品彰英,≪三國遺事考證≫上, 東京;塙書房, 1975, 480∼481쪽). 그러나 李炯佑는 이서국은 사로국의 대외 팽창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던 2세기 초엽에 압독국 등과 함께 병합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李炯佑,<伊西國考>,≪韓國古代史硏究≫1, 1988, 7∼2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말에 이서국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금성을 공격한 것을 보면,091)이서국이 동원한 군대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은 신라가 대병을 동원하여 막으려 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하였고, 味鄒王의 陰助를 받아 간신히 퇴각시킬 수 있었다는 다분히 설화적인 내용의 기록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유례니사금 14년 및≪三國遺事≫권 1, 紀異 2, 味鄒王竹葉軍 참조). 이서국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사로국에 복속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독자성을 조금도 잃지 않고 국가체계를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꾸준히 그 세력을 성장시켜 갔으므로 3세기 말의 신라에 맞설 만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속된 소국이 그 지배층의 세력을 유지한 채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 시기에 있어서 복속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형태는 어떠했는가가 문제이다. 추측컨대 초기의 복속이란 진한 연맹주인 사로국에 대해 그 종주권을 인정하고 의례적인 공물을 납부하는 정도의 것이라 생각되는데, 다음의 기록들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D-① 8월에 貊國의 渠帥가 禽獸를 사냥하여 왕에게 바치었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니사금 19년).

② 于山國이 귀복하여 해마다 土宜로써 조공하기로 하였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13년).

 위의 두 기록은 비록 연대의 차이는 많으나 모두 복속한 소국으로부터 공납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D-①의 맥국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또 언제 신라에 복속하였는지는 불분명하나 유리니사금 17년(A.D. 40)에도 華麗·不耐 두 현이 사로국을 침입하려는 것을 저지한 것을 보면 사로국의 북쪽 동해안 근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맥국의 왕이 사냥한 짐승을 바쳤다는 것은 일종의 朝貢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D-②는 지증왕대의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복의 기사인데, 이 때 복속한 우산국이 해마다 土宜(土産物)로써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東沃沮가 고구려에 대해 租賦로 貊布와 魚鹽 등의 海中食物을 千里나 져서 날랐다는 기록과09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흡사한 것으로 복속의 의미와 그 구체적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라 생각된다. 이상의 예로 미루어 보아 2∼3세기에 사로국에 복속된 진한 소국들은 자신들의 생산품의 일부를 조공으로 바쳤으나,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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