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2. 성립과 발전
  • 3) 발전
  • (3) 복속 소국에 대한 통제의 강화

(3) 복속 소국에 대한 통제의 강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첨해니사금대의 사벌국 복속 이후 더 이상 소국의 병합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근 소국에 대한 복속은 3세기 중엽에 일단락지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복속지역을 州·郡으로 편제하는 것은 지증왕대인 6세기 초의 일이므로 양자 사이에는 약 250년간의 시차가 존재한다. 즉 대개 3세기 중엽까지 진한계 소국들의 명목상의 복속을 일단락지은 신라가 이들 지역을 영토화하는 데에는 약 2세기 이상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복속 소국에 대한 지배는 지역이나 복속의 과정 등에 따라 달랐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대체적으로 초기에는 구소국 지배층의 독자성을 인정한 채 그들과의 타협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이 채택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방법은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록 후대의 일이기는 하나 복속한 金官國에 대한 처우나 報德國의 지배방식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금관국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E-① 金官國 왕인 金仇亥가 妃와 세 아들 즉 큰 아들인 奴宗, 가운데 武德, 막내인 武力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禮를 갖추어 대접하고 上等의 位를 주고, 本國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角干에 이르렀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9년).

②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오므로 왕은 친히 군사를 사용하여 막았으나 적의 수는 많고 이 편은 적어 마주 겨루어 싸워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의 형제인 脫知爾叱今은 본국에 남겨 두고 王子 上孫卒支公 등이 신라로 들어가 항복하였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駕洛國記).

 위의 두 기록은 모두 금관국 멸망 당시의 사정을 전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복속한 소국과 그 지배자들에 대한 처리 방식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E-①의≪삼국사기≫에서는 금관국의 왕인 구해에게 본국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그 지배권을 허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②의≪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는 대로 구해의 형제인 탈지에게 금관국의 지배를 맡기고 구해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을 경주로 이주시킨 것이 사실일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복속한 소국의 왕에게 본국을 食邑으로 하사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대외적인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었고, 실제 내용은 복속국의 지배층을 분산시켜서 원활한 지방지배를 꾀했던 것이다. 신라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복속 지배층의 일부만을 우대해 줌으로 인해서 그들을 본래의 지배기반으로부터 유리시켜는 한편 더 이상의 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라고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금관국의 경우에서만이 아니고 조분니사금대에 복속한 골벌국의 왕 阿音夫에게 第宅과 田莊을 하사하여서 경주에 머무르게 하였던 것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한 예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방법은 신라가 적극적으로 구소국 지배층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비교적 그 세력이 약한 소국을 대상으로 한 지배방식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이는 아마도 복속된 지역이 금관국과 같이 무력으로 정벌한 지역이거나 골벌국과 같이 경주에 아주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지배계층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통치원리는 唐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왕족을 비롯한 상당수의 지배계층을 본국으로 송환한 것과 같은 원리라 생각된다.

 이보다 강한 결집력을 지닌 소국에 대해서는 報德國의 지배방식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보덕국의 高延武는 大將軍이라는 관직과 太大兄이라는 고구려 관등을 갖고 있었으며,093)≪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23년에 報德國王 安勝이 보낸 表의 말미. 首德皆는 小兄이란 고구려의 관등을 사용하고 있었다.094)≪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원년 8월 13일. 또 보덕국에서 일본에 갔던 사신들도 고구려의 고유한 部名과 관등을 사용하고 있는데,095)報德國 使臣들의 일본 왕래에 관한 기록은 村上四男,<新羅國と報德國安勝の小高句麗國>(≪朝鮮學報≫37·38, 1966;≪朝鮮古代史硏究≫, 東京;開明書院, 1978, 267∼277쪽)에 年表로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일본에 갔던 보덕국의 사신들은 신라의 사신과 함께 동행한 기록도 자주 보이며, 前部·後部 등의 部名과 主簿·大兄 등의 고구려 관등을 소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보덕국을 반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해 주는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096)특히 文武王 20년에는 金銀器와 비단 100단을 보내고 왕의 妹를 보덕국왕 安勝과 혼인케 하는 등 적극적으로 회유하고 있다(≪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文武王 20년 3월). 이러한 보덕국의 통치방법은 상고기에 있어서 대부분의 복속 소국들에 대한 초기의 통치방법과 동일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의 이서국이나 사벌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통치방식이 상당히 오랜기간 적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C-①·③의 실직국이나 압독국의 경우처럼 무력을 사용한 정벌을 행하고 그 餘衆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극단적인 방법도 동원되었겠지만, 이 경우에도 徙民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일부 반란의 주동자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押督國의 故地인 慶山 林堂洞 古墳에서 5세기대의 금동관이 출토되는 것은 압독국의 지배세력이 여전히 온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복속된 소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신라는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였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경상도 일원에서 발견되는 5세기 말까지의 金銅冠의 존재이다. 경상북도 일원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그 수는 많지 않으나 義城 塔里, 慶山 林堂洞, 大邱 飛山洞, 善山郡 海平面 洛山里 등지에서 발견된 예가 보고되어 있으며, 이 이외에 당시 가야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東萊·昌寧·梁山·高靈·星州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097)金載元·尹武炳,≪義城塔里古墳≫(國立博物館, 1960).
尹世英,<韓國古代冠帽考-三國時代 冠帽를 中心으로->(≪韓國考古學報≫9, 1980), 23∼44쪽.
鄭永和,<林堂洞古墳發掘槪報>(≪韓國考古學年報≫10, 1983), 23∼26쪽.
尹世英,<裝身具>(≪韓國史論≫15, 國史編纂委員會, 1985), 391∼409쪽.
―――,≪古墳出土 副葬品 硏究≫(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62∼76쪽.
이 중 특히 의성 탑리, 경산 임당동, 대구 비산동 등은 이를 각각 소문국·압독국·다벌국 등의 소국과 연관시켜 볼 수 있는데, 이 금동관들이 발견된 고분의 연대는 의성 탑리 고분이 5세기 이전, 경산·선산·대구 등지의 것은 5∼6세기 초로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금동관들은 대개 5세기를 경계로 해서 그 이전의 것을 古式, 그 이후의 것을 出字形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5세기 이후에 발견되는 금동관들 중 경주에 가까운 경상북도 지역의 것들은 대개 출자형으로 형식이 통일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관해 진한 맹주국이었던 신라가 그들과 연관관계를 맺고 있던 정치세력에게 금동관을 분배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 보는 견해와098)崔鍾圭,<中古期古墳의 性格에 대한 약간의 考察>(≪釜大史學≫7, 1983). 그러한 金工品을 생산하는「工人集團」을 신라세력이 직접 통제·장악한 결과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099)全德在,<新羅 州郡制의 成立背景硏究>(≪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그런데 금동관의 형식이 5세기 이후에 획일화된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형태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기 때문에100)같은 出字形 金銅冠이라 하더라도 세부적인 양식에는 차이가 많다. 慶山 林堂洞古墳, 昌寧 校洞, 善山 海平面 洛山里 출토된 것은 그 형식이 비슷하나, 大邱 飛山洞, 梁山 夫婦塚, 東萊 福泉洞 1號墳에서 발견된 것은 그 형식이 위의 것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全德在, 위의 글, 37∼45쪽). 후자의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금동관의 형식상의 통일은 공인집단을 신라가 직접 통제함으로써만 가능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인집단이 아니라 그보다 상층부의 지배세력에 대한 압력이나 통제를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금동관 이외에도 土器가 낙동강 동안에서 형식적인 통일을 보이는 것이나 철제 농기구의 형식 통일은 5세기보다 훨씬 앞서는 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모두 당시의 신라가 각 지역의 공인집단을 개별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5세기대의 금동관이 경북지역 각지에서 출토된다는 사실은 이 때까지 경상북도 각지의 진한계 소국들이 그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압독국의 故地라 생각되는 경산군 임당동의 고분에서 5세기의 금동관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위의 사료 B-②·C-②·C-③에서 보듯이 파사니사금대와 지마니사금대에 복속된 압독국이 일성니사금 13년(146)에 반란을 일으키자 그 세력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 餘衆을 남쪽으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압독국의 지배계층은 5세기까지 그 세력을 온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대구지방의 경우 고분의 분포를 보면 石棺墓나 石槨墓의 축조단계에 까지는 네 개의 세력 집단이 대등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다음 단계인 石室墓는 이 중 가장 유력한 집단이었던 飛山-內唐洞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101)대구지방 고분의 분포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큰 墓群을 이루고 있는 達城 부근의 飛山-內唐洞 古墳群에는 石棺墓와 石槨墓를 비롯해 다수의 石室墓가 분포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大明洞 丘陵의 고분군에는 석관묘와 석곽묘가 주를 이루고 여기에 소수의 석실묘가 있으며, 山格洞-伏賢洞 一帶의 구릉 고분군과 斗山洞의 수성저수지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는 석관묘와 석곽묘가 散在되어 있을 뿐 석실묘는 발견되지 않았다(尹容鎭, 앞의 글, 231∼243쪽). 이로 미루어 보아 대구지방의 소국은 석실묘 축조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비산-내당동지역의 세력이 다른 세 지역의 세력을 압도하고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대구지방의 소국인 다벌국의 국읍은 비산-내당동에 있었고 이 세력이 석실묘의 축조단계에 이르러서는 다른 세개의 읍락들을 누르고 대내외적으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구지방에서 발견된 금동관이 5세기 무렵의 비산동 석실묘에서 발견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02)금동관이 발견된 飛山洞의 석실묘에서는 銀製 內冠飾, 귀금속의 장신구를 비롯하여 鐵製 武器類 및 馬具類가 다수 발견되어, 이 지역 고분의 부장품이 양과 질의 양면에서 타지역보다 월등함을 보여 주고 있다(野守建·小泉顯夫,<慶尙北道達城郡達西面古蹟調査報告>(≪朝鮮古蹟調査報告≫, 朝鮮總督府, 1923). 이 금동관의 존재는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의 성장을 말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형식이 출자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다벌국의 지배계층이 사로국과 일정한 복속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사료 B-③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다벌국은 파사니사금 29년(108)에 신라에 복속하였으나, 이 지역에서 5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음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의 신라의 진한계 소국의 복속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즉 2세기 초의 다벌국의 복속은 명목상의 복속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마도 진한의 연맹주인 사로국과 다벌국 사이의 연맹관계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지역에 존재하는 네개의 읍락들을 개별적으로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사로국은 이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집단인 비산-내당동 세력과의 적극적인 유대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노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첨해니사금대의 達伐城의 축조는103)≪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첨해니사금 15년. 이러한 과정에서 사로국과 비산-내당동 세력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달벌성의 위치는 대구지방으로 비정되는데,104)李丙燾, 앞의 책, 1976, 31쪽. 그 명칭으로 보아 지금의 達城임에 틀림없다고 보인다. 그런데 비산-내당동지역의 고분군은 바로 달성과 인접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105)尹容鎭, 앞의 글, 231∼243쪽. 여기에서 첨해니사금대에 달벌성을 쌓고 奈麻 克宗을 城主로 삼았다는 것을 지방관의 파견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5세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여 상당한 규모의 석실묘를 축조할 정도의 능력이 있었던 지역에 3세기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克宗은 사로국의 인물이 아니라 대구지역의 인물, 즉 비산-내당동지역의 다벌국 국읍의 主帥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 여겨진다.106)이 경우 克宗이 가졌던 奈麻라는 관등은 後代의 粉飾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아직 外位 體系가 따로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라 볼 수 있으므로 지방세력가인 극종에게 나마라는 경위를 수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추측이 옳다면 3세기 중엽의 달벌성의 축조는 이 지역에서 비산-내당동세력이 다른 세력들을 누르고 지배권을 확립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로국의 입장에서는 진한 연맹체의 방위를 위해 변경 지역의 축성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소국내의 특정한 세력과 결탁함으로 인해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산동의 석실묘에서 발견된 금동관의 존재는 다벌국의 지배계층이 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이들이 사로국과의 관계를 통해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하겠다.

 이러한 방법 이외에 복속 초기의 조공관계를 보다 확실히 하고 복속된 소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사로국이 취한 능동적인 조치 중 가장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는 것이 왕의 巡幸이다. 왕의 순행에 대한 기록은 혁거세거서간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지역을 명시한 기록은 파사니사금 14년(93)에 古所夫里郡에 순행하였다는 데에 처음 보이는데, 上古期의 왕의 순행에 관한 기록을 표로 정리하면<표 2>와 같다.

번 호 연 도 지 역 구 분
1
2
3
B.C. 41년(赫居世 17)
A.D. 28년(儒理 5)
81년(婆娑 2)
6部
國內
州郡
A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93년(婆娑 14)
106년(婆娑 27)
138년(逸聖 5)
157년(阿達羅 4)
162년(阿達羅 9)
186년(伐休 3)
208년(奈解 13)
227년(奈解 32)
235년(助賁 6)
264년(味鄒 3)
284년(儒禮 1)
300년(基臨 3)
古所夫里郡
押督
太白山
長嶺鎭
沙道城
州郡
西 郡邑
西南 郡邑

東, 黃山
國西諸城
比列忽, 牛頭州
B
16
17
18
19
20
21
469년(慈悲 12)
481년(炤知 3)
483년(炤知 5)
488년(炤知 10)
496년(炤知 18)
500년(炤知 22)
國西
比列城
一善
一善
南橋
捺已郡
C

<표 2>상고기 왕의 순행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고기의 왕의 순행은 모두 21차례에 걸쳐서 있었는데, 이 중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대의 것(C 그룹)을 제외하면 모두 3세기 이전의 것이며, 특히 2∼3세기에 순행 기록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순행 기록에 대한 개별적인 검토는 생략하고 A·B 그룹의 순행에서 보이는 몇 가지 특징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A 그룹은 B.C. 1세기에서 A.D. 1세기에 이르는 초기의 순행으로 그 지역이 6部 또는 國內·州郡으로 막연하게 나타나 있다. 이 세 차례의 순행은 구체적인 지역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왕경 근처의 의례적인 순행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B 그룹은 비교적 순행의 지역이나 목적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으로 본격적인 순행이라 할 수 있겠다. B 그룹의 순행 중 몇 개만을 살펴보면 4번의 古所夫里郡은 그 지역이 어디인지 불명이나 구체적인 지역명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순행은 파사니사금대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또 5번의 파사니사금 27년(106)의 押督에의 순행은 같은 왕 23년에 복속한 압독국이 2년 뒤인 25년에 반란을 일으켜 이를 평정하고 난 2년 후의 일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파사니사금 27년의 순행은 복속한 압독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복속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상고기 순행의 목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로국의 인근 소국 복속이 파사니사금대에 시작된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볼 때 한층 더 뚜렷이 알 수 있다. B 그룹의 순행 중에는 9∼12번의 경우와 같이 그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6번의 경우처럼 산천에 대한 望祭가 그 목적으로 나타난 예도 있으나, 그 실상은 복속된 소국지역을 방문함으로써 소국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복속관계를 보다 확실히 하자는 목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7·8의 아달라니사금대의 長嶺鎭 순행과 沙道城 순행은 그 내용이 戌兵을 위로한다는 것으로 보아, 아달라니사금 3년과 5년에 있었던 계립령 및 죽령의 개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07)아달라니사금 3년의 鷄立嶺 개척과 5년의 죽령 개척에 대해 그 지역을 경주 인근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崔炳云, 앞의 글, 17∼49쪽). 계립령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몇몇 의견이 있으나 현재의 조령에서 약 4Km 떨어진 忠北 中原郡 上芼面 彌勒里에서 慶北 聞慶郡 聞慶邑 觀音里로 넘어가는 하늘재가 계립령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崔壹聖,<歷史地理的으로 본 鷄立嶺>,≪湖西史學≫14, 1986, 27∼53쪽). 그러나 도로망의 개척이라는 것도 신라가 영역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소국의 복속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B 그룹에 보이는 순행은 모두 영역의 확보와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지방관의 파견이 불가능했던 당시로는 왕이 직접 복속된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가장 좋은 지방 지배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의 왕의 순행에는 적지 않은 臣僚와 군대가 수행했을 것이라 여겨지는데,108)비록 후대의 기록이나<眞興王 巡狩碑>의 隨駕人名 중에는 大等급의 신료 이외에도 四方軍主 등의 軍官이 보이고 있으므로, 왕의 순행에는 다수의 군대도 수행했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순행은 일종의 무력의 시위라는 성격도 있었을 것이다. 또 비슷한 시기의 기록에 散見되는 閱兵의 기록도109)閱兵에 관한 기록은 순행처럼 자주 보이지는 않으나 최초의 기록은 파사니사금 15년에 “8월에 閼川에서 열병하였다”는 것이다. 이 후 일성니사금 5년(138)·미추니사금 20년(281)·실성니사금 14년(415)·자비마립간 6년(463) 등에 閱兵한 기록이 있다. 특히 최초의 열병이 파사니사금대에 보이는 것은 최초의 소국 병합이나 본격적인 순행이 同王代에 시작된다는 것과 아울러 생각해 보면 열병이 소국의 지배와 무관하지 않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당시의 지방에 대한 통치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관한 사항을 일임할 정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확보한 지역을 수시로 순행함으로써 새로이 복속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복속민에 대한 민심수습을 꾀하려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순행을 통하여 사로국의 왕이 복속된 소국의 지배자임을 과시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지역의 주민들과 접촉함으로써 이들에게 하나의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국가의식을 주입시키는 것도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파사니사금대에는 使臣을 10道에 나누어 보냈다는 기록이 두 차례 보이는데,110)≪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11년 7월 및 29년 5월. 여기서 10도가 어떤 종류의 행정구역인지 아니면 도로망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또한 지방관의 부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李宇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