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1) 내물왕의 등장과 김씨 세습왕조의 성립

1) 내물왕의 등장과 김씨 세습왕조의 성립

 신라가 낙동강 동쪽의 경상북도 일대를 완전히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奈勿麻立干(356∼402) 때의 일로 생각된다. 그는 김씨로서는 처음 왕이 된 味鄒尼師今(262∼283)의 조카·사위 혹은 동생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계보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계보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가 미추와 어떤 형태이건 연관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내물마립간의 등장에서 주목되는 점은 우선 그의 등장 이후 김씨의 왕위 계승이 본격화되어 신라의 마지막 세 왕을 제외하고는 신라 멸망에 이르기까지 김씨 세습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이고,111)崔彦撝가 지은<眞空大師碑>에 “金氏는 聖韓에서 비롯하여, 奈勿에서 興盛하게 되었다”고 하였다(≪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35쪽). 다른 하나는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립간이란 왕호는 내물에서 시작하여 炤知麻立干(479∼499)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는데, 이 시기 약 150년간을 흔히 마립간시대라고 부른다.≪三國史記≫에는 내물 다음다음 왕인 訥祗에서부터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三國遺事≫에는 내물왕 때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의 차이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내물대에 마립간의 칭호를 쓴 것으로 보겠다.

 마립간의 뜻에 대하여는≪삼국사기≫에서는 金大問의 말을 인용하여 “마립이란 말뚝(橛)을 이른 것이고, 이는「諴操」의 뜻으로 자리를 정하여 두는 것이니, 王橛이 주가 되고 臣橛이 아래에 벌려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112)≪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년.≪삼국유사≫에서는「함조」를「橛標」로 쓰고 있어 동일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를 우리 말의 머리(頭), 마루(宗·棟·廳) 등의 말과 같은 어원의 말일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113)李丙燾,≪譯註 三國史記≫(乙酉文化社, 1977), 43쪽. 이 해석에 따르면 마립간은 우두머리, 또는 제일의 干이라는 뜻이 되어 최고 지배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연장자라는 의미를 갖는 尼師今에 비하여 한층 정치 지배력이 강화된 통치자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내물마립간 22년(377)과 27년의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내물마립간 때에는 신라가 그 이전 단계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커다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내물마립간 27년에 사신으로 간 衛頭가 前秦王 苻堅과의 문답에서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으니 (海東의) 지금이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114)≪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마립간 27년.라 한 것은 신라가 이제는 국제무대에 등장할 만큼 세력이 확대되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내물마립간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實聖麻立干(402∼417)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은 大西知 伊湌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을 뿐 내물마립간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은데,≪삼국유사≫ 王曆에서는 대서지를 味鄒의 동생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석씨계로 되어 있어, 아직은 김씨의 세습왕권이 튼튼히 자리잡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또 실성은 내물마립간 37년에 고구려의 인질로 가 있다가 내물이 죽기 전해인 내물마립간 46년에 귀국하였는데, 내물왕이 죽자 그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즉위의 배후에는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는 자신을 인질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하여 즉위한 다음해에 내물왕의 아들인 未斯欣을 왜에 인질로 보내고, 실성마립간 11년(412)에는 또 다른 아들인 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파견하였다. 특히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낸 이유는 일종의 군사적 동맹을 맺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阿莘王도 재위 6년(397)에 왕자 腆支를 왜에 인질로 파견하는데, 이것이 일종의 군사외교였던 것임은<廣開土王陵碑>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대항해 신라도 미사흔을 인질로 파견하였으나, 결국 이러한 외교전은 백제의 승리로 돌아가 미사흔이 왜에 억류된 것으로 보인다.115)李基白,<古代 韓日關係>(≪韓國古代史論≫, 探求堂, 1975).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힘을 이용하여 내물왕의 큰아들인 訥祗를 제거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오히려 고구려의 후원을 받은 눌지에게 타도되고 말았다.

 실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눌지는 아마도 석씨세력을 철저히 타도하였던 것 같은데,≪삼국사기≫에 실성이 죽기 전 해에 “토함산이 무너졌다”는 기록은 脫解가 산신인 토함산의 붕괴라는 표현으로 석씨세력의 몰락을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116)金哲埈,<新羅上代의 Dual Organization> 上 (≪歷史學報≫1, 1952), 32쪽.≪삼국사기≫에 눌지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아마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물왕대부터 마립간이란 칭호가 사용되었음은 틀림없으나, 아직까지 이사금시대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에 이사금과 마립간이란 칭호가 혼용된 것이 아닐까 한다.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였지만117)≪三國史記≫에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을 죽이고 自立하여 왕이 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十八實聖王條에 의하면 고구려의 군대가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은 것으로 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우선 즉위한 다음 해에 실성에 의해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파견되어 있었던 미사흔과 복호를 구출하여 신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때 朴堤上의 활약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와 羅濟同盟을 체결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 그는 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왕실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하여 왕위의 부자상속 제도를 확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慈悲와 소지는 모두 전왕의 長子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또 왕위계승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왕뿐만 아니라 왕비까지도 모두 김씨가 독점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고기에 들어가 박씨의 왕비가 등장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마립간시대는 김씨족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강화되어 여타의 박씨·석씨세력을 완전히 압도하고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4세기 중엽에 등장한 김씨족은 눌지대에 이르러 대내적으로는 왕위계승에 따른 갈등을 해소하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씨왕조의 등장과 관련하여 이를 騎馬民族의 도래와 이에 따른 정복국가의 성립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정복국가란 민족이동기에 만주방면에서 기병전 위주의 전쟁 수행능력을 지닌 집단이나 북방 유목민족이 한반도지역으로 남하하여 토착세력을 제압하고 세운 왕조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의 정복국가론의 출현 배경은≪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와 3성교립이라는 왕조의 교체, 그리고 積石木槨墳이라는 특이한 묘제의 등장 등과 관련하여 제기되어 왔다.118)정복국가론에 관한 연구사적 정리는 李道學,<4세기 정복국가론에 대한 검토>(≪韓國古代史論叢≫6,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4), 245∼278쪽 참조.

 한 정복국가설에 따르면 시베리아 동쪽의 오르도스 철기문화가 한국과 직결되는데,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은 漢의 팽창으로 일파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헝가리 즉 훈족의 나라를 세웠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일파는 한반도로 진출하여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거쳐 동남진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繩席文土器·金細工技術을 가지고 남하하였다는 것이다.119)李鐘宣,<오르도스 後期 金屬文化와 韓國의 鐵器文化>(≪韓國上古史學報≫2, 1989), 15∼90쪽. 또 다른 정복국가설에 의하면 경주에서의 주 묘제의 교체는 그 최고 지배세력의 변동 내지는 지배구조의 변화의 산물로 볼 수 있는데, 신라고분의 축조 시기는 土壙墓 축조기→적석목곽분 축조기→橫穴式 石室墳 축조기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그런데「高大封土」인 적석목곽분은 한반도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지역에서 비롯하였으며, 기동력을 갖춘 기마민족의 문화가 신라에 미쳤다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민족 대이동기에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하는 기마민족의 일파가 4세기 전반기에 경주에 도달한 결과 신라에서 김씨왕조가 성립되고 마립간이 등장했다는 것이다.120)崔秉鉉,≪新羅古墳硏究≫(一志社, 1992), 397∼415쪽.

 고고학적으로 적석목곽분의 등장 시기는 대략 4세기 중엽 무렵이므로 이는 문헌기록상으로 내물왕(356∼402)의 등장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121)이에 대하여는 일부 이견이 없지 않다.≪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9년(435)에 “2월에 歷代의 園陵을 修葺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수즙을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의 발생을 알리는「新葬制施行令」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申敬澈,<古式鐙子考>,≪釜大史學≫9, 1985). 적석목곽분의 기원 내지는 계통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북아시아의 묘제와 연관하여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122)金元龍은 흑해 북안에서 일어난 목곽분 문화가 시베리아지역으로 전파되어 前漢과 樂浪에도 미치게 되었는데, 경주의 적석목곽분은 그 마지막 형식이라고 하였으며(金元龍,<韓國文化의 起源>,≪文理大敎養講座≫1, 서울大, 10∼11쪽), 金秉模는 적석목곽분의 계통을 알타이 지역의 피지락 고분군과, 그리고 신라 금관의 계통을 중앙아시아 지역의 冠帽와 연결짓고 있다(金秉模,≪한국인의 발자취≫, 正音社, 1985, 208∼209쪽). 따라서 김씨왕족의 등장과 기마민족의 이동을 관련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정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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