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2) 나제동맹의 결성
  • (1) 나제동맹 성립 이전의 대외관계

(1) 나제동맹 성립 이전의 대외관계

 내물왕이 등장하던 4세기 후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한마디로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는 故國原王(331∼371) 때에는 遼東郡 지역으로 진출해 있던 慕容氏와 충돌하여 그 침입을 받게 되었고 남쪽으로부터는 백제가 帶方郡 지역으로 진출하는 등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고국원왕 12년(342) 모용씨의 침입을 받은 고구려는 다시 丸都城이 함락되는 불운을 겪었고, 고국원왕 39년(369)부터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고국원왕 39년 왕은 군사 2만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경계를 쳤으나 백제 近肖古王의 태자 近仇首가 거느린 군대에 의해서 雉壤(白川)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백제를 쳤으나 浿江(禮成江)에서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또 다시 패배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백제 침입은 백제를 크게 자극하여 고국원왕 41년 겨울 왕은 백제의 근초고왕 부자가 거느린 3만 군대의 기습을 받아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前燕의 모용씨의 침입과 백제의 북진정책으로 말미암아 고전하던 고구려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국가체제의 개혁이 필요하였다. 이 임무는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小獸林王(371∼384) 때에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불교의 수용과 太學의 설립, 그리고 律令의 반포 등 국가체제의 개혁적인 조치가 이 때에 단행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탄탄한 내부정비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대외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수림왕의 뒤를 이은 정복군주 광개토왕(391∼412)과 長壽王(413∼491)의 등장으로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은 당시 고구려의 서울이던 國內城(滿洲 吉林省 通化專區 輯安縣 通溝)에 남아 있는 유명한<광개토왕릉비>에 의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永樂 6년(396)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친히 정벌하였는데, 이 원정의 동기에 대하여 비문에는 “百濟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未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이라 하였다. 종래부터 이 辛未年 기사는 해독이 어려워 연구자 사이에 여러 가지 엇갈린 견해가 제시된 바 있고, 일본에서는 이를 근거로 한 때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 일대를 지배하였다는 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 가운데 몇 자는 일본 參謀本部에 의해 고의로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23)李進熙,≪廣開土王碑의 探求≫(李基東 譯, 一潮閣, 1982), 85∼145쪽.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광개토왕의 백제원정 동기를 확실히 알 수는 없는 형편이다. 어쨌든 이 때에 고구려군은 海路로 臨津江 방면에 진출하여 關彌城(江華 喬桐)·阿旦城(서울시 城東區) 등 58개 성과 700여 개의 촌을 쳐부순 뒤에 다시 한강을 건너 백제 수도인 漢城에 육박하였다. 이에 백제의 아신왕이 항복하였으므로 광개토왕은 백제가 인질로 보낸 王弟와 大臣 10명을 끌고서 본국으로 개선하였다.≪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의 백제원정이 즉위 직후부터 5년(395)경까지 전후 몇 차례에 걸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永樂 9년(399)에 신라의 요청으로 그 이듬해에 步騎 5만 명을 보내 신라 국경 안에서 城池를 부수는 등 약탈을 자행하는 백제군과 그에 가담한 任那加羅·安羅·倭의 연합군을 격파함은 물론 이를 낙동강 중·하류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나 그 후 영락 14년에 백제가 또 다시 倭軍과 합세하여 옛 帶方郡 지역인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하였으므로 군대를 보내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아 이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 사이의 관계도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였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사건의 계기는 백제의 禿山城主가 주민 300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와서 투항하자 백제는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는데 신라가 이를 거부함으로 인해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124)≪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마립간 18년.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물마립간대에 신라는 처음으로 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125)李丙燾,≪韓國史 古代篇≫(震檀學會, 1959), 401∼402쪽.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자 신라는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내 고구려의 수호에 응하였다.126)≪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마립간 37년 및 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양왕 9년. 여기에는 물론 정적을 견제하려는 내물왕의 의도가 있었음은 다음에 즉위한 실성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내물의 아들인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파견하고, 내물의 큰 아들인 눌지마저도 살해하려 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일단 고구려의 요청에 의하여 인질을 파견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친백제적인 정책을 수정하여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게 된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는 고구려 국력의 상대적 우위이고, 둘째는 신라의 국내 정치상황, 그리고 셋째로는 고구려의 대백제 전략이 그것이다.127)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18, 延世大, 1981), 45∼107쪽.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삼국 중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고구려에 밀리고 있는 백제와 연결을 가짐으로써 오는 위험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도 고구려와의 관계개선은 필요한 일이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내물마립간대는 왕권의 안정을 도모해 나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아직도 불안한 김씨의 세습왕권을 강화하고 같은 김씨내에서의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고구려의 강력한 후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라를 백제와 떨어뜨림으로써 백제세력을 고립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게 하는 등의 배려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자구책으로 가야와 왜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광개토왕 당시에는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가야·왜 연합이란 구도로 당시의 국제정세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신라의 고구려 의존성은 점차 심화되어<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바와 같이 ‘新羅의 寐錦이 몸소 가서 조공하는’128)비문에 ‘昔新羅寐錦 未有身來朝貢…’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형편이 되었으며,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영토에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129)≪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十八實聖王條에 “왕이 전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하여 장차 해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를 청하고는 속여서 눌지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눌지가 賢行이 있음을 보고는 이에 창을 거꾸로 하여 왕을 죽이고는 눌지를 세워 왕으로 삼고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 당시의 신라에는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中原 高句麗碑>에 ‘新羅土內幢主’란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의 幢主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中原 高句麗碑>에 보면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호칭할 때「신라매금」또는「東夷寐錦」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스스로를 중국과 같은 위치에 놓고 신라를 자기의 주변에 있는 저급한 국가로 보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라의 왕과 신료들에게 의복을 下賜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과거 중국의 군현들이 주변의 이민족 국가들을 지배하는 방식과 동일한 것이다. 즉 고구려는 신라에 대해 종주국의 행세를 하고 있으며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굴욕적인 것이었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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