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2) 나제동맹의 결성
  • (2) 고구려의 남하와 나제동맹의 성립

(2) 고구려의 남하와 나제동맹의 성립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은 79년이란 오랜기간 재위하면서 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極盛期를 현출하였다. 그는 중국과는 南朝와 北朝의 대립된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정책을 펴는 한편 남쪽으로의 진출에 전념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427). 천도의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은 대내적으로는 종래 國內城(通溝)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뿌리깊게 잔존하고 있던 옛 고구려의 5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고,130)≪魏書≫百濟傳에 백제가 보낸 國書 속에 “지금 璉(장수왕)이 나라를 스스로 魚肉을 만들어 大臣과 强族을 살육함이 끝이 없으니 죄가 가득 차고 악업이 쌓여 백성이 무너져 이반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데서 장수왕의 정책을 짐작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남쪽 특히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게 밀리기 시작한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북쪽의 땅을 되찾는 것이 중대한 과제였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왕 즉위년(391)부터 나제동맹이 맺어진 장수왕 38년(454)까지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3회였고, 공격을 준비하다가 중도에 그만둔 것도 3회에 이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일련의 고구려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에게 연패하는 상황이었다. 백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다각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 하나는 신라에 접근하여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北魏와 연결하여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를 견제케 하는 것이었다. 백제의 蓋鹵王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북위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포기하는 상황이 되었다.131)≪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18년. 이에 반해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신라의 이해관계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무렵의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직·간접으로 많은 간섭을 받고 있었는데, 그 결과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영토에 주둔하고 심지어는 왕위계승까지도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이는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 고구려의 천도 이후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구하게 되자 신라가 받는 압력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눌지마립간은 비록 고구려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후 고구려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먼저 전왕대에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파견된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귀환시켰는데 이 때에 활약한 인물이 유명한 박제상이다.132)박제상은≪三國遺事≫에는 金堤上이라고 하였으나,≪三國史記≫列傳에 의하면 그는 박혁거세의 후손이고, 婆娑尼師今의 5대손이라고 했으므로 박씨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소급하여 붙여진 것일 뿐 당시에는 아직 姓은 쓰이지 않았다. 또 복호와 미사흔이 인질로 간 시기에 대해서도≪삼국사기≫에서는 실성마립간 때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서는 각각 눌지 3년(복호)과 내물 36년(미사흔)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귀환의 시기에 대해서도≪삼국사기≫에서는 눌지 2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서는 같은 왕 10년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후의 사정으로 보아≪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즉위한 지 17년이 되던 433년에 백제가 먼저 화친을 요청해 오자133)≪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7년 및 권 25, 百濟本紀 3, 비유왕 7년. 이에 응하였다. 그 이후 양국의 관계는 백제가 良馬와 白鷹을 보내자 신라는 황금과 明珠로 보답하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134)≪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7·18년 및 권 25, 百濟本紀 3, 비유왕 7·8년. 이리하여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안에서 고구려세력에 대항하는 견제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이와 같이 외교노선을 수정함에 따라서 고구려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마찰은 450년에 신라의 何瑟羅城主가 悉直原에서 사냥하고 있던 고구려의 邊將을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신라의 이러한 도발적인 행위에 대해서 고구려의 장수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의 서쪽 국경을 공격하는 강력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신라는 말을 낮추어 사죄함으로써 일단 고구려의 침입은 저지하게 된다.135)≪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34년 및 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38년. 그러나 신라의 이러한 조처는 고구려의 태도가 완강한 것임을 알고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려는 고식책이었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기본정책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삼국관계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맞서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는 백제 蓋鹵王 원년(455)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자 신라가 원병을 보내어 백제를 구원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136)≪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39년 및 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1년. 그러나 이러한 신라와 백제의 접근은 고구려의 대규모 침입을 초래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은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재위 18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남침을 호소하고 군사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도리어 고구려의 침략을 유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장수왕 63년(475) 왕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와 먼저 백제의 전진기지인 北城을 함락시킨 다음 江南의 수도 漢城에 육박하였는데, 한성은 공격을 받은 지 7일 만에 함락되었다. 개로왕은 성이 함락되기 직전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 붙잡혀 阿旦城으로 끌려가 참살되고 말았다. 이 때 왕뿐만 아니라 太后·王子들이 고구려군에게 몰살을 당하였고 8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 일대를 송두리째 고구려에 빼앗기게 되었다. 당시 백제의 개로왕은 그 아들 文周를 시켜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므로 신라가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미처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수도는 함락되고 말았다.137)≪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자비마립간 17년 및 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한강유역을 점령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영유하려 들었으므로 백제는 하는 수 없이 남쪽 熊津(公州)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竹嶺·鳥嶺 일대로부터 南陽灣을 연결하는 선까지 뻗치게 되었다.

 백제가 웅진으로 南遷한 이후에도 신라와 백제 사이의 동맹관계는 계속되었다. 소지마립간 3년(481)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여 狐鳴 등 일곱 성을 취하고 彌秩夫(興海)로 진군하였는데, 신라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더불어 이를 격퇴하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泥河 서쪽에서 격파하여 천여 급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같은 왕 6년에도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는 고구려군을 맞아 백제와 협력하여 母山城138)母山城은 현재 鎭川의 大母山城으로 추측된다. 아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렇듯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밀접해지자 소지마립간 15년에는 백제의 東城王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므로 왕은 이벌찬 比智의 딸을 시집보내어 두 나라 사이에는 혼인관계가 맺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나제간의 밀접한 관계는 바로 이듬해인 소지마립간 16년과 17년에 양국의 합동작전으로 나타난다. 16년 7월에 신라의 北邊인 薩水原에서 신라장군 實竹이 고구려군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犬牙城으로 물러나와서 지키고 있었는데, 그 때 고구려군이 견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의 동성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어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어 17년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雉壤城을 포위하므로 백제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장군 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러한 신라와 백제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진흥왕 9년(548) 고구려의 군대가 백제의 獨山城을 침입했을 때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 군대를 격파한 것으로 보아 6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나제동맹으로 인해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에도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의 공격을 일단 저지할 수 있었고, 신라와 백제는 각자 내부정비를 통하여 중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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