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3) 마립간시대의 정치적 발전
  • (1) 왕권의 강화

(1) 왕권의 강화

 마립간시대의 김씨 왕족의 정치적 위상은 그 이전의 이사금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과거에는 신라의 실질적인 건국 연대를 내물마립간으로부터 보는 견해도 있었을 만큼 이 시기는 정치·사회적인 대변혁의 시기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묘제의 변천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묘제인 積石木槨墳은 高塚古墳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태가 커다란 봉분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략 5세기 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皇南大塚(98호분)은 경주의 고분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남북직경 120m, 동서직경 80m, 봉토의 높이 23m에 달하며, 이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천마총도 봉분의 높이가 12.7m이고 지름은 47m로 전체 체적은 9,812㎥나 된다.139)천마총은 5세기 말 내지 6세기 초의 능으로 추정되며, 황남대총은 炤知麻立干의 능으로, 천마총은 智證王陵으로 추측되기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봉분은 적석이라는 말 그대로 대부분 냇돌을 운반하여 쌓은 것인데, 여기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5세기에 들어와 신라의 왕권이 급속히 성장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눌지마립간대에 牛車의 사용법을 널리 알려 물자의 수송을 편하게 하였고, 소지마립간 9년(487)에는 사방에 郵驛을 설치하고 3년 후인 12년에는 수도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화를 유통하게 하였다. 이는 경제의 발달로 인한 운송 수단의 개발과 도로망의 정비,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교역 규모의 확대를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발전과 함께 당시 수도인 경주의 인구도 상당한 증가를 보여 수도의 규모가 확장되었을 것이다. 자비마립간 12년(469)에 서울의 坊里 이름을 제정하였다는 기록은 바로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당시까지의 정치운영의 실체인 部體制를 어느 정도 극복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삼국사기≫소지마립간 10년조에 “東陽에서 六眼龜를 바쳤는데 배에 글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여섯 개의 눈을 가진 거북은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6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40)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1975), 19쪽. 따라서 이는 당시의 6부가 어느 정도 왕권에 귀속한 정치체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지마립간 9년(487)에는 시조의 誕降地인 奈乙에 神宮을 지었다. 신궁의 설치에 대해≪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는 소지마립간 9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祭祀志에는 지증왕대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 중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문제와 또 신궁의 主神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된 문제이다. 주신에 관해서는 크게 박혁거세라는 견해와 김씨의 시조인 聖韓이나 미추 또는 내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당시의 정치적 발전 상황을 고려한다면≪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시조란 김씨의 시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봄이 옳다고 여겨진다.141)이와는 달리 신궁의 主神을 天地神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崔光植,<신라의 신궁제사>,≪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205∼209쪽). 그렇다면 이는 내물왕계 혈연집단의 강한 결합의식을 전제로 하는 종교적 상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또한 왕권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142)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2·53, 1972),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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