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3) 마립간시대의 정치적 발전
  • (2) 축성사업

(2) 축성사업

 마립간시대의 업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축성사업이다. 지방에 대한 신라의 정책 목표는 복속된 지역을 완전히 영토화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것이었겠지만, 지방관의 파견이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巡行이나 지방인을 동원한 축성사업을 통하여 간접적인 지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마립간시대에 들어와서는 전대와는 달리 복속된 지역에서의 축성사업이 활발히 진행된다는 것은 지방 통치에 있어 커다란 진전이었다고 하겠다. 마립간시대까지의 상고기에 있어서 지방에서의 축성에 관한 기록을≪삼국사기≫에서 찾아보면 1∼3세기 사이에 6곳에서 축성을 하였고 4세기에는 보이지 않다가 5세기 이후의 자비마립간대로부터 지증왕대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자비마립간대에 11곳, 소지마립간대에 5곳, 지증왕대에 12곳에서 새로 성을 쌓거나 증축하였다. 그런데 자비마립간대에 축조된 성 중 9개가 신라의 동북변 및 서북변에 축조되었으며, 소지마립간대의 5개 성은 모두 고구려와의 접경지에 축조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소지왕 19년(497)부터 眞興王 9년(548)까지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와 한번도 전쟁을 치루지 않았다.

 또 축성에 관한 기록도 구체적으로 役夫의 동원 실태를 전해 주는 것이 있다. 자비마립간 11년(468)에 何瑟羅人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泥河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소지마립간 8년에 一善界의 丁夫 3,000명을 동원하여 일선(善山)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三年山城(報恩)과 屈山城(沃川郡 靑山面)을 쌓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당시의 신라가 지방인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제도와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일선군에서 3,000명이란 계획된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초보적이나마 이들 지역에 대한 호구조사가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삼년·굴산의 두 성의 축성은 일선 지역의 주민의 이익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신라의 지배력이 향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쌓기 3년 전(483)과 2년 후(488) 두 차례에 걸쳐 왕이 일선에 순행한 것은 이 두 성의 축성사업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복속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舊小國 내부의 지배계층을 신라의 방식대로 편제하고 통제할 수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제가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邑落 내부의 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지위에 불안을 느낀 소국 渠帥層이나 유력 세력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노력으로 축성사업에 적극 협조했을 가능성이 있고, 또 축성을 통하여 지방인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측면도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미 5세기의 상황은 고구려나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었고, 소지마립간대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침입이 네 차례나 있었으므로 변경지역의 주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신라의 중앙정부에 적극 협조하여 축성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복속된 소국들에 대한 영토화 작업이 일단락되는 것이 바로 지증왕대의 지방제도의 정비와 외위제의 마련이라 하겠다.

<李宇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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