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1) 배경
  • (1)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

(1)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

 신라가 4세기에 이르러 김씨 세습왕조가 성립하고 麻立干이란 왕호를 사용하면서 급격한 정치적 성장이 있었음은 앞서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급격한 정치세력 성장의 배경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요인을 중국세력과의 또는 삼국 상호간의 접촉이나 항쟁 등에서 찾으려 하였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인 접촉이 신라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촉진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러한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사회의 독자적인 성장이 있지 않고서는 안된다. 즉 정치세력의 성장과 변화에는 생산력의 발전과 인구의 증가,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타나는 사회구조의 변화 등이 먼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 나라의 농경은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으나, 청동기 후기가 되면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생산도구도 철제 농기구로 바뀌어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신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경상도 지역의 1∼3세기의 토광묘에서 철제 농구가 발견되는데 그 수량은 많지 않았다.144)金在弘,<新羅 中古期의 村制와 地方社會 構造>(≪韓國史硏究≫72, 1990), 15∼23쪽. 그러나 4세기 이후 신라지역에는 새로운 철기 제작 기술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그 결과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4∼6세기의 고분과 유적에서 발견되는 철제 농기구의 종류와 수량이 크게 증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145)金光彦,<新羅時代의 農器具>(≪民族과 文化≫Ⅰ, 正音社, 1988), 46쪽.

 특히 철제 농기구 중에서도 철제 따비와 괭이류 및 살포·삽날·쇠스랑 등의 보급은 深耕을 가능케 하여 제초작업의 효율화, 지력 회복기간의 단축, 그리고 황무지 개간에 의한 경작면적의 확대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146)李賢惠,<三國時代의 농업기술과 사회발전-4∼5세기 新羅社會를 중심으로->(≪韓國上古史學報≫8, 1991), 47∼56쪽. 그리고 낫 종류의 확대 보급으로 말미암아 수확작업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낫은 요동반도에서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나타나지만 매우 소수였고,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 손칼(半月形鐵刀子)과 함께 나타나다가 1∼3세기 이후에는 낫만이 발견된다.147)安承模,<韓國 半月形石刀의 硏究-發生과 變遷을 中心으로->(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85), 31쪽. 이는 철기의 보급 이후 처음에는 반월형석도를 본뜬 손칼이 낫과 함께 사용되다가, 4세기 이후에는 낫만이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반월형석도가 이삭 하나하나를 따는 것임에 반해 낫은 한꺼번에 여러 포기를 뿌리채 베어낼 수 있으므로 수확작업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많은 노동력도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낫의 이용으로 인하여 소규모 단위의 농업 경영방식이 결정적으로 확립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함께 농업생산에 결정적인 증대효과를 가져온 것은 牛耕의 보급이었다. 우경의 도입 이전에는 사람이 괭이와 따비를 이용하여 밭을 갈거나, 사람이 끄는 쟁기를 이용하여 밭을 갈았다. 그러다가 철제품의 제조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대형의 쇠보습을 소에다 매어 밭을 가는 우경이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다. 우경의 보급 사실을 증명해 주는 대규모의 쇠보습은 그 발견된 예가 그리 많지 않고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지증왕 3년(502)에 “처음으로 소를 밭가는 데 이용하였다”14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3년 3월.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의 신라에는 이미 우경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경의 보급은 농업생산력에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는데, 일반적으로 소를 이용할 경우 약 2.4배의 경작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149)木村正雄,<中國の古代專制主義とその基礎>(≪歷史學硏究≫217, 1958), 2쪽. 17배 정도의 경작능력의 提高를 가져왔다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150)中國農業科學院·南京農學院 中國農業遺産硏究室,≪中國農學史≫上(科學出版社, 1984), 153쪽. 신라의 경우 우경의 보급 시기와 그 효능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이로 인해 경작면적의 확대와 농업 경영방식의 소규모화를 초래해 기존의 농촌공동체를 급격히 와해시켰을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4세기 이후에는 철제품의 생산기술이 발전하여 농기구 이외에도 가공도구의 생산도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가공도구를 이용한 토목기술의 증가는 자연히 수리시설의 확충을 가져왔다. 訖解尼師今 21년(330)에 길이 1,800步의 碧骨堤를 개축했다는 기사가 있고151)≪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흘해니사금 21년., 訥祗麻立干 13년(429)에는 둘레 2,170보에 달하는 矢堤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152)≪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3년. 벽골제의 경우 그 소재지가 김제지역이기 때문에 이를 백제의 기록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이 기록을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려우나, 눌지마립간대에 시제를 축조했다는 기록은 사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규모가 2,170보에 이르는 대규모임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규모가 적은 수리시설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여러 곳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전국적으로 제방을 수리하라는 지시를 왕이 내리고 있는데153)≪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8년 3월. 이는 당시에 이미 상당수의 수리시설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수리시설이 확충됨으로 인해 생산량도 자연히 증가하였을 것이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旱田 1畝의 수확량이 1.5∼2石 정도였는데 비해 澆水田의 수확량은 6石 4斗에 달하여 水田이 한전보다 3∼4배 더 수확량이 많았다는 견해를154)天野元之助,<中國古代農業の展開-華北地方の形成過程->(≪東洋學報≫30, 1979), 139쪽. 참고한다면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당시의 농업생산량에 급격한 증가가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이러한 농업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경작된 곡물의 종류에도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보리나 밀이 잘 발견되지 않는데,≪三國史記≫에는 보리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느 시기엔가 보리농사가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155)全德在,<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사회변동>(≪역사와 현실≫4, 역사비평사, 1990), 29∼31쪽.
李賢惠, 앞의 글, 52∼56쪽.
보리는 경작 기간이 짧고 수확시기가 이를 뿐 아니라 벼만큼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콩과 함께 널리 재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관개시설이 확충되면서 점차 벼농사가 확대되어 6세기경에는 벼가 주곡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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