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2) 부체제
  • (2) 6부의 기원과 성립

(2) 6부의 기원과 성립

 이러한 신라의 6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170)신라 6부에 대한 연구사적 정리는 다음 논문들이 참고가 된다.
李基東,<新羅 骨品制 硏究의 現況과 그 課題>(≪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3∼20쪽.
崔在錫,<新羅의 六村·六部>(≪韓國古代社會史硏究≫, 一志社, 1987).
李文基,<蔚珍鳳坪新羅碑와 中古期의 6部 問題>(≪韓國古代史硏究≫2, 1989), 152∼163쪽.
全德在,≪新羅 六部體制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5), 1∼8쪽.
姜鳳龍,<新羅 中古期 部의 性格 變化와 姓氏制>(≪典農史論≫1, 서울市立大, 1995), 4∼6쪽.
이들을 크게 나누면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사로국이 영역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지배세력을 경주로 이주시키면서 차례차례 성립하였다는 단계적 성립설, 둘째는 6부의 기원을 사로국을 구성하는 경주지역의 지역집단에서 구하는 6촌기원설, 셋째는 원래 3개의 집단이 분화하여 6부가 형성되었다는 분화설 등이 그것이다.

 첫째의 단계적 성립설은≪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허구로 보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즉 斯盧 6村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고 사로국의 팽창과정에서 6부가 축차적으로 성립하였다는 학설이다.171)末松保和,<新羅六部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299∼305쪽. 이 견해에 따르면 喙部는 原新羅로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가장 먼저 자리잡았고, 4세기 중엽에 沙伐國을 복속하고 그 지배자 집단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沙喙部가, 그리고 6세기 초에 半跛國(星州)을 병합하여 本彼部가 성립되어 3部가 되었으며, 그 이후 100여 년 동안에 역시 지방세력 집단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3부가 단계적으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측 사서의 초기 기사를 철저히 불신하고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던 단편적인 금석문 자료에만 의거하여 구성한 가설인데, 최근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 특히<蔚珍 鳳坪碑>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견해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두번째로 6부의 기원을 6촌에서 찾는 학설은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사로 6촌의 위치를 경상북도 일대로 보는 견해와 경주분지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눌 수 있는데, 6촌을 경상북도 일원에 비정하는 입장에서는 6부의 성립시기를 소지마립간대로 상당히 늦추어 잡고 있다.172)金哲埈,<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下 (≪歷史學報≫2, 1952), 87∼88쪽.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6촌의 위치는 경주분지 부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6촌의 위치를 경주평야 일대로 보는 학자들도 6촌에서 6부로 전환된 시점에 대하여는 赫居世代說,173)崔在錫, 앞의 글, 373∼374쪽. 儒理尼師今 9年(32)說,174)丁仲煥,<斯盧六村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歷史學報≫17·18, 1962).
李鍾旭,<新羅 上古時代의 六村과 六部>(≪震檀學報≫49, 1980), 31쪽.
―――,≪新羅國家形成史硏究≫(1982), 70쪽.
李文基,<金石文資料를 통하여 본 新羅의 六部>(≪歷史敎育論集≫2, 1981), 110쪽.
慈悲麻立干 12年(469)說175)李丙燾,<新羅의 起源問題>(≪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602쪽.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 중에서 자비마립간 12년설은≪삼국사기≫의 ‘京都의 坊里 이름을 정하였다’176)≪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자비마립간 12년 정월.는 기록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는 6부의 성립시기로서보다는 6부의 성격변화의 시점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177)자비마립간 6년의 기록이 6부의 성격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주장에는 다소의 차이점이 있다.
李鍾旭, 앞의 글(1980), 47쪽.
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 古代篇≫(一潮閣, 1982), 151쪽.
李文基,<新羅 中古의 六部와 王統>(≪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8, 1987), 71∼73쪽.
따라서 신라의 6부는 이사금시대에 이미 성립해 있었다고 보인다.

 셋째의 분화설은 최근의 학설인데, 이 설에 의하면 원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喙·彼·岐의 3부만이 존재하다가 5세기 후반경에 喙部는 喙部·沙喙部·牟喙部(漸喙部)의 3부로 분화되고, 彼部는 本彼部와 斯彼部(習比部)의 2부로 분화되어서 (漢)岐部와 함께 6부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78)朱甫暾,<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14쪽. 沙喙部의「沙」나 斯彼部의「斯」가 모두「새」(新)라는 뜻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 견해는 매우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라 생각된다. 다만「朴·昔·金」의 3姓을「3부」의 실체로 보는 점은 앞으로 좀더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 견해의 6촌기원설이나 셋째 견해의 분화설 중 어느 것을 취하든 신라의 6부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성립해 있었던 것이 된다. 또 지증왕대에 만들어진<迎日 冷水里碑>에는 4개 부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원래의 6부 중 이름이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부는 이미 그 세력이 미약해져서 도태된 상태라고 생각되므로 6부의 성립시기는 이보다 훨씬 올려 잡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이미 이사금시대에 6부는 성립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니사금대에 6촌을 6부로 改名하고 각각의 부에 姓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179)≪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니사금 9년. 이는 그 사실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기록이기는 하지만 유리니사금대에는 6부의 전신인 6촌사회를 어떠한 형태로든 재편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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