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2) 부체제
  • (3) 부의 구조와 기능

(3) 부의 구조와 기능

 이사금은 진한 소국들의 연맹체의 장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이사금시대에 왕위는 유력한 집단의 장들에 의해 선임되기도 하였고 세습되기도 하였는데,≪삼국사기≫에서는 이를 흔히「國人」에 의해 추대되거나 세워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국인은 바로 사로국을 구성하고 있는 연맹체의 대표자들이라고 여겨진다. 즉 신라 전체의 국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로국을 구성하였던 유력집단 즉 6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이 당시의 6부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라의 6부는 그 하나 하나가 영역과 정치조직을 가진 단위 정치체로서의 독자적인 기능을 가졌던 것이다.

 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3세기 무렵의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각 부의 장의 아래에는 使者·早衣·先人 등의 독자적인 관원이 있어 부내의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였으며, 消奴部는 독자적으로 靈星과 社稷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부여의 경우에도 적이 있으면 諸加들이 스스로 전투에 나선다고 하여18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高句麗. 독자적으로 전투에 나설 정도로 강한 정치적 독립성을 갖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신라의 경우에도 이들 6부가 연맹하여 연맹체를 형성하던 시기에는 각 집단별의 독자성이 매우 강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다음의 기록은 신라 초기의 6부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8월에 音汁伐國이 悉直谷國과 지경을 다투어 왕에게 와서 재판을 청하므로 왕이 이를 난처하게 여겨 이르되, 金官國 首露王이 年老하고 知識이 많다 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立議하여 所爭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은 六部에 명하여 모여서 수로를 대접하게 하였는데 五部는 모두 伊湌으로 接待의 主를 삼았으나 오직 漢祇部만이 位卑者로 하여금 主管하게 하였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3년).

 위의 글에서 5부가 모두 이찬을 내보냈다고 하였으니 원래 이들 6부가 모두 이찬이란 관직 내지는 관등을 가진 자를 포함한 독자적인 관료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한지부에는 이찬인 許婁와 摩帝가 파사왕을 영접하였을 때 마제의 딸을 太子妃로 삼고 허루에겐 酒多 곧 角干의 위를 주었다고 하며,181)≪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지마니사금 1년.≪삼국유사≫에서도 祗摩尼師今의 비를 마제국왕의 딸로 기록하고 있음을 보면(≪삼국사기≫에는 葛文王 摩帝의 딸이라 하였음) 한지부내에도 몇 개의 세력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왕국을 칭할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혼인관계를 통해 박씨계 왕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연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석씨의 탈해계도 한지부와 같은 지역을 근거로 한 집단이었다고 추측되는데182)金哲埈,<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歷史學報≫1, 1952), 28∼35쪽. 이들은 각각의 단위체로 존재했으나 때로는 완만한 하나의 지역집단으로 기능하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의 신라의 왕은 한 部의 대표자로서 여타 다른 부의 대표자와 동질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여러 干들 가운데 우두머리라는 뜻이므로, 마립간시기의 신라의 왕은 여타의 간들과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간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법흥왕대에 만들어진<울진 봉평 신라비>에는 牟卽智寐錦王(法興王)이 部(梁部)에 소속된 것으로 나오고, 지증왕대의<迎日 冷水里碑>에는 至都盧葛文王(지증왕)이 沙梁部 소속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까지의 왕도 특정한 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부의 대표자의 직위를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즉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왕권이 아직 6부의 세력을 초월할 만한 지위에까지는 오르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영일 냉수리비>에 6부의 유력자들이 王으로 표기되어 지도로갈문왕과 함께 ‘7王等’으로 호칭되고 있음을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울진 봉평비>의 예로 보아 적어도 법흥왕대 초기까지는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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