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2. 정치체제의 정비
  • 4) 법흥왕대
  • (3) 불교의 공인

(3) 불교의 공인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가 왕실의 주도로 東晉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는 그 사정이 달랐다. 아마도 초기에는 고구려와 인접한 국경을 통해 민간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5세기 초 눌지마립간대에 고구려로부터 沙門 墨胡子가 一善郡(善山) 毛禮의 집에 와서 있었는데, 梁나라로부터 온 사신이 가져온 향의 용도를 모르자 이를 일러 주었으며 왕녀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눌지마립간의 재위 연대(417∼485)는 梁(502∼557)이 아직 건국되기 이전에 해당하므로 연대상의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또<阿(我)道碑>에 의하면 미추왕 2년(263)에 阿道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一然은 이 아도가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이며 묵호자와 동일인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214)≪三國遺事≫권 3, 興法 3, 阿道基羅. 그러나 전후 사정으로 보아 신라에 온 아도는 伊弗蘭寺에 있었던 고구려의 아도와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에는 법흥왕대 이전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어 지방은 물론이고 왕실에까지도 불교가 보급되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법흥왕대 이전까지는 신라의 불교 보급이 일부 한정된 지역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포교로 끝났다고 여기고 있다.215)李基白·李基東, 앞의 책, 248쪽. 그러나 소지왕대에 모례의 집에서는 몇몇 승려가 신도를 상대로 경전을 강의하였다고 하며,216)≪三國遺事≫권 3, 興法 3, 阿道基羅. 왕실에 焚修僧이 상주하고 있었음을 보아217)≪三國遺事≫권 1, 紀異 2, 射琴匣. 신라의 지방과 서울에는 법흥왕대 이전에 이미 불교가 상당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18)辛鍾遠,<新羅의 佛敎傳來와 그 受容過程에 대한 再檢討>(≪白山學報≫22, 1977), 139∼183쪽. 이는 5세기 초엽의 신라 왕릉 유물에서 연꽃무늬가 나타나고, 불교가 공인될 무렵에 만들어진 順興의 於宿知述干墓의 고분벽화에 불교적 소재가 많은 것으로 보아서도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다.219)辛鍾遠,<新羅 佛敎傳來의 諸樣相>(≪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 1992).

 법흥왕 8년(521)에는 南朝의 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두 나라 사이에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好佛의 군주로 유명한 양나라의 武帝가 보낸 사신인 승려 元表에 의해 비로소 왕실에 불교가 정식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하여 왕실과 불교가 인연을 맺은 이후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기 위해 왕경 안의 天鏡林을 베어서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법흥왕의 이러한 시도는 귀족들의 반대로 인하여 무산되었고, 법흥왕 14년에 왕의 젊은 寵臣인 異次頓은 왕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하여 創寺 준비의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흔히 이를 계기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이차돈의 죽음으로 인해 곧바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경림에 짓고 있던 興輪寺의 공사는 중단되었으므로 이 해는 오히려 불교가 박해를 받은 해이며, 법흥왕 22년에 그간 중단되었던 흥륜사의 공사가 재개되었는데 아마도 이 때에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20)李基白,<新羅 初期 佛敎와 貴族勢力>(≪震檀學報≫40, 1975), 25∼39쪽.
―――,<三國時代 佛敎受容과 그 社會的 意義>(≪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92), 4∼12쪽.

 이렇게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적극적인 주도로 불교가 마침내 공인되기에 이르렀는데, 왕실에 의해서 불교가 강력하게 지지받게 된 이유는 불교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 매우 적합한 정신적인 지주였기 때문이었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皇龍寺를 건립하였으며, 그는 불교에 있어 須彌四洲의 세계를 통솔하는 왕이며 輪寶를 굴리며 四方을 위엄으로 굴복시킨다는 轉輪聖王으로 비유되었다. 또 진흥왕이 정복한 지역을 순수할 때는 많은 臣僚들을 대동하였는데, 그에 관한 기록에는 이들 중에서도 승려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렇게 大等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던 승려는 순수에 따른 여러 의식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를 통해서 이제 불교는 확실히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평왕도 스스로를 釋迦佛에 비기어, 자신과 왕비는 각기 석가의 부모 이름인 白淨과 摩耶夫人으로 이름을 삼았고, 그의 동생들도 석가의 叔父 이름인 伯飯·國飯을 이름으로 하였다. 이는 진평왕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법흥왕 이래 진덕여왕까지 중고기의 왕족들은 그 이름을 불교에서 취하고 있다. 따라서 중고기를 佛敎式 王名時代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221)金哲埈,<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下 (≪歷史學報≫2, 1952), 91∼92쪽. 중고기의 신라 왕실은 석가의 권위를 빌려서 왕권의 강화를 꾀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처음 불교가 보급되고 공인되는 과정에서 귀족들은 巫覡의 토착적 전통에 집착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차츰 불교 사상에 포함되어 있는 輪廻轉生思想이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옹호해 주는 이론적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적극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초기에 전래된 彌勒信仰은 무불융합적인 성격을 지녔던 까닭에 귀족들의 흥미를 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대에 만들어진 화랑은 미륵의 화신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귀족의 자제 중에서 임명되었다. 즉 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에 비유하면서 그의 치세를 돕기 위한 미륵의 출현을 화랑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륜성왕 사상과 미륵신앙은 정치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를 조화시킨 가운데, 왕실과 귀족이 불교신앙면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222)金杜珍,<불교의 수용과 고대사회의 변화>(≪韓國古代史論≫, 한길사, 1986), 180∼188쪽.

<李宇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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