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Ⅱ. 신라의 융성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2) 왕권의 강화
  •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이렇게 왕이 전시기의 6부 대표자의 하나였던 존재를 초월하게 됨에 따라, 지난날 왕이 수행하던 화백회의의 의장의 역할을 대신할 직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上大等이라는 관직의 창설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설치된 상대등의 기능은 귀족회의인 대등회의의 주재자로 귀족과 왕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또 상대등은 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는 왕의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이지만, 스스로 귀족의 통솔자이며 대표자라는 점에서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또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 후보로 여겨지기도 하였다.242)李基白,<上大等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99∼100쪽.

 다만 執事部의 설치를 계기로 국가의 정무를 분장하는 새로운 관부가 만들어지자 어느 관청에도 소속되지 않는 大等의 존재 의의는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삼국통일 이후 전제왕권의 성립과 더불어 상대등으로 상징되던 和白의 권위도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합좌제적인 정치운영의 전통은 여전히 강인하게 잔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집사부를 비롯한 주요 관청의 장관직인 令이 복수로 임명된 것이나 이들 장관직이 겸직의 형태로 몇몇 진골귀족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던 것은 이런 합좌제도의 운영방침에 의한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보여진다.

 또한 정무를 담당한 중앙관부의 설치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법흥왕 3년에 병부의 설치를 시작으로 진흥왕 5년(544)에는 司正府가 설치되었고, 같은 왕 26년에는 정무의 중심기관으로 稟主가 설치되었는데, 국무가 복잡해짐에 따라 점차 여러 관부가 분화 증치되었다. 진평왕대에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位和府와 조세 업무를 담당하는 調府,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禮部, 왕의 鹵簿 사무를 담당하는 乘府, 대외관계와 사신의 접대를 맡는 領客府, 관리들의 논공행상을 담당하는 賞賜署 등이 설치되어 관제가 대폭 정비되었다.243)李基白,<稟主考>(위의 책), 134∼148쪽. 이와 함께 진평왕 7년(585)에는 大宮·沙梁宮·梁宮 등에 각각 사신 1명을 두어 관장케 하였던 것을 이 때에 통합하여 內省을 설치하여 정식 기구화하였다. 내성은 왕실의 재산관리와 왕명의 출납 등이 그 중요한 기능이었는데, 이 내성의 권한은 중대 이후에 급격히 확장되어 兵部·司正府와 함께 권력의 핵심기관이 되었다고 보여진다.244)李基東,<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37∼141쪽. 이러한 근시기구가 진평왕대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바로 보다 강력한 왕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덕여왕 5년(651)에는 기존의 품주가 국가의 기밀사무를 맡은 집사부와 재정을 관장한 倉部로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집사부는 국왕 밑의 중추기구로 되고 그 장관인 中侍가 왕권의 방파제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앙관부의 정비는 왕권의 강화와 직결되는 것이었다.245)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앞의 책), 149∼172쪽. 이제 신라의 왕은 관료조직에 입각한 정부(관부)와 귀족회의인 大等會議라는 이원적인 권력구조를 정비하게 되었고, 이 두 기구 위에 군림하여 신라왕국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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