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1) 조공의 의미와 대중국 교섭의 전개

1) 조공의 의미와 대중국 교섭의 전개

 동서고금을 통해서 하나의 국가가 단독으로 성립·발전된 나라는 없다. 언제나 주변 여러 나라와 끊임없는 교섭(대외관계)과 충돌(전쟁)을 거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대외관계는 단순히 주변사가 아니라 한국사 발전의 큰 동인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249)申瀅植,<統一新羅의 對外關係>(≪韓國史論≫1 古代篇, 國史編纂委員會, 1977), 299쪽. 그러므로 신라의 대외관계를 대표하는 대중국 관계는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현실적 목적도 있지만, 중국적 세계질서 속으로의 편입은 물론 자아의 확인과정이라는 의도도 있었다.250)J. K. Fairbank(ed), The Chinese World Order(Harvard Univ. Press, New York, 1968), pp.276∼288 참조.

 고대사회에 있어서 대중국과의 관계는 朝貢을 의미한다.251)李春植,<朝貢의 起源과 意味>(≪中國學報≫10, 서울 ; 中國學會, 1969), 6∼11쪽 참조. 원래 조공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중화사상 또는 왕도사상의 대외적 표현으로서 그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進貢과 回賜라는 문물교환을 뜻하였다. 즉 선진문화의 수용과 그 부수적인 경제적 보상(무역)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252)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對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4쪽. 이에 대해서 조공을 정치적 성격으로 파악하여 宗主·從屬國의 관계로 설명함으로써 삼국의 정치·문화적인 독창성 저해수단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253)全海宗,<韓中朝貢關係考>(≪東洋史硏究≫1, 1966;≪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9, 56쪽). 그러나 이와 같은 대외관계에 대한 이해는 당대 한국사의 내적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보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은 주요한 뜻이 있을 것이다.254)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檀國大, 1981), 149쪽. 무엇보다도 대중관계가 ‘明王愼德 四夷咸賓’255)≪書經≫권 4, 周書.이라는 왕도사상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참여함으로서 국제적 공존과 자립의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중국과의 관계는 신라의 정치적 발전과 관련이 있으므로 능동적인 문화수용의 견지에서 정치적 독립성과 외교적 자주성이 유지된 고전적 외교인 것이다.256)申瀅植,≪新羅史≫(梨大 出版部, 1985), 200∼201쪽.

 그러나 조공관계로서 신라의 대중국관계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삼국 중 가장 늦었으며, 고구려의 안내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처음으로 중국(前秦)과 교섭할 시기인 奈勿王(356∼402) 때는 고구려의 廣開土王(391∼413) 때여서 그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어, 고구려 사신을 따라 당시 서역문물의 집합소인 長安에 갈 수 있었다.257)申瀅植,<新羅와 西域>(≪新羅文化≫8, 東國大, 1991), 121쪽.

내물왕 26년 왕이 衛頭를 전진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苻堅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의하면 해동의 일이 옛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역시 중국과 같이 시대가 바뀌면 명칭도 바뀌기 마련이니 어찌 옛날과 같으리오”라고 하였다(≪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이 내용은 신라가 내물왕 26년(381)에 처음으로 전진에 사신을 파견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러한 단 1회의 조공사 파견이 곧 대외관계로서의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는 전진과의 교섭 이후 法興王 8년(521)의 梁나라와의 교섭까지 140여 년간 중국과 교섭이 없었으며, 그 후 眞興王 25년(564) 이후 陳나라와의 계속된 교섭까지 중국과의 관계가 없었다. 중국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이른바 조공사가 계속적 또는 정기적으로 파견되면서 중국측으로부터 외형적인 冊封이 이루어져야 정상화되는 것이다.258)全海宗, 앞의 글, 11쪽. 이 때의 책봉은 의례적인 것이며, 하등의 정치적·외교적 구속력은 없었다. 따라서 장수왕이 北魏·燕·宋·南齊·晋나라와 동시에 중복된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진흥왕이 北齊·陳에 동시에 조공사를 파견한 것이다.

 6세기 중엽까지 신라의 대중교섭은 왜와의 관계 때문에 진전되기 어려웠다. 5세기 말까지 신라는 왜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시련을 계속 겪었으므로259)왜는 赫居世 8년(B.C. 50) 이후 炤知王 22년(500)까지 신라에 33회의 침입을 한 바 있었다. 특히 실성왕(402∼417)·눌지왕(417∼458), 소지왕(479∼500) 때는 4회 그리고 자비왕(458∼479) 때는 5회의 침입이 있었다. 특히 흘해왕 37년(346), 내물왕 38년(393), 실성왕 4년(405), 눌지왕 15년(431) 그리고 28년(444)에는 경주(金城)를 포위·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대비책이 시급하였다. 더구나 대중통로가 고구려(육로)와 백제(해로)에게 지배되고 있어서 신라는 국가적 고립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후일 신라의 한강 하류지역 진출은 백제·고구려의 연결을 차단하고, 한강 유역의 경제적 기반확보는 물론 대중통로의 개척이라는 의미가 컸다.260)申瀅植,<新羅의 發展과 漢江>(≪韓國史硏究≫77, 1992), 45쪽. 따라서 내물왕은 고구려의 군사력에 의존하기 위해 위두를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파견하였으며261)李丙燾,≪國譯 三國史記≫(乙酉文化社, 1977), 39쪽. 實聖을 인질로 보냈던 것이다.262)Lien-Shen Yang, Hostages in Chinese History(Studies in Chinese Institutional History, 1960), pp.43∼57.
梁起錫,<三國時代 人質의 性格에 對하여>(≪史學志≫15, 檀國大, 1981), 39∼66쪽.
이듬해 신라의 고구려 접근에 대한 보복으로 왜가 침입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14년의 한강 하류유역 확보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던 赤山航路(황해 횡단항로)를 장악함으로써263)申瀅植,<韓國古代의 西海交涉史>(≪國史館論叢≫2, 國史編纂委員會, 1989;≪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1990, 265쪽). 진흥왕 25년 이후에 대중국 교섭의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즉 陳나라와의 교섭에서 고구려가 6회 사절을 보내고 있으나 신라는 8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여 보다 활발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隋나라에는 신라가 12회의 조공사를 파견하고 있어, 고구려의 21회보다는 훨씬 적었으나 백제의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외교사절의 빈번한 파견은 국력의 신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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