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3) 당과의 관계

3) 당과의 관계

 신라와 당과의 외교관계는 진평왕 43년(621)에 시작되었다. 당이 건국한지 3년만의 일이다. 삼국은 당나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접근책을 쓰게 되었다. 즉 고구려는 麗隋戰爭 이후 포로교환과 대립관계 청산을 위해 榮留王 2년(619)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武王 22년(621)에 조공사를 보냈다. 그러나 당에서는 삼국의 왕을 같은 해인 624년(영류왕 7년, 무왕 25년, 진평왕 46년)에 책봉함으로써 견제정책을 쓰고 있었다.

진평왕 43년 7월에 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조공하고 방물을 바쳤다. 당 高祖가 친히 사신을 위로하고 通直散騎常侍인 庾文素를 보내서 조서와 병풍, 그리고 비단 300段을 보내 주었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위의 기록은 신라와 당과의 첫 접촉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 후 진평왕 54년(632)까지 12년간 8회에 걸쳐 사절이 파견되었으며, 善德王 16년간(632∼647)에 10회, 眞德王 8년간(647∼654)에도 9회, 그리고 武烈王 8년간(654∼661)에도 6회, 文武王의 8년간(고구려 정벌까지)에도 3회 사절이 파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진평왕 43년에 국교가 열린 이래 고구려 멸망(668) 때까지 47년간에 37회 사절을 당나라에 보낸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표 3>에서 보듯이 신라가 대당외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국 명 회 수 내 용
신 라 37 진평왕(9)·선덕왕(10)·진덕왕(9)·무열왕(6)·문무왕(3)
고 구 려 25 영류왕(15)·보장왕(10)
백 제 22 무왕(15)·의자왕(7)

<표 3>삼국의 對唐朝貢 回數(통일전)

 이러한 신라와 당과의 관계는 수나라 이래 공식적인 절차(책봉)가 정례화 되었다.274)고구려의 경우 大武神王 15년(32)에 光武帝(후한)로부터 王號를 회복한 이래, 고국원왕(연)·장수왕(북위)·양원왕(북제)·영양왕(수) 등이 책봉을 받았다. 백제 역시 근초고왕(동진)·무령왕(양)·위덕왕(북제) 등이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신라는 북제로부터 진흥왕이 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이란 책봉 이외에는 남북조왕조에서 받은 일이 없다. 그래서 신라의 조공이 정례화·공식화된 것은 남북조 이후라 하겠다. 진평왕 16년 왕이 수나라로부터 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이란 책봉을 받은 일은 있으나 수나라가 단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외교상으로 양국간의 공식관례가 이룩되지 못하였다. 그 후 진평왕 43년에 당나라와 교섭이 시작된 이래 왕이 교체된다든가 중국황제가 바뀌면 공식사절이 파견되어 형식상 책봉절차를 받게 되었다.

㈎ 진평왕 45년 10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朝貢하였다.…46년 3월에 당나라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선덕여왕 원년(632) 12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4년 당나라에서 持節使를 보내 왕을 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고 父王의 봉작을 답습케 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진덕여왕 원년(647) 2월에…당태종이 持節使를 보내 전왕을 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이어 왕을 柱國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월에 당에 謝恩使를 보냈다.…8년 3월에 왕이 죽었다.…당 고종이 이를 듣고 永光門에서 애도식을 갖고 大常丞 張文收를 지절사로 보내 조위를 표하고 왕을 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보냈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태종 무열왕 원년(654) 5월에…당나라는 지절사를 보내어 예를 갖추고 왕을 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의를 표하였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 문무왕 원년(661) 10월 29일에 왕이 당나라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왔다. 당나라 사신이 조위를 표하고 조칙으로 전왕께 제사를 올리고 여러 가지 비단 5백 필을 주었다.…2년 정월 당나라 사신이 객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에 왕을 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新羅王으로 봉하였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신라는 왕이 바뀌면 조공사를 파견하였으며, 당은 왕이 죽으면 弔慰使를 보내든가, 또는 새왕에게 冊封使를 보내 예례상 절차를 행하고 있었다. 신라측에서는 따로 謝恩使를 파견하였으며, 중국측에서는 황제의 신임장을 지닌 持節使를 보냈던 것이다. 이 때의 책봉은 정치적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관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가 漢의 玄菟郡 경내에서 건국되었으므로 그 인연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中原의 정권이 바뀐다 해도 예속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북방의 割據政權이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조공이라는「신하의 예」를 계속하였으며, 중원정권의 책봉을 받아 중원정권의 조직일원으로서 그를 대신하여 지역인민을 지배하는 형태로서 중국과의 예속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275)李殿福·孫玉良,≪高句麗簡史≫(姜仁求·金瑛洙 역, 三省出版社, 1990) 92∼129쪽. 이러한 견해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封官加爵 恩信撫慰행위는 분명히 藩屬朝貢關係가 아닐 수 없다.276)楊昭全·韓俊光,≪中朝關係簡史≫(瀋陽;遼寧民族出版社, 1992), 36쪽. 그러나 조공관계는 정통 중국정부와의 1대1의 관계가 아니라, 동시의 여러 나라와 並存的으로 존재하였으며, 통일왕조라고 신라정부에 정치적 구속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외형적이며 의례적이었고, 중국측의 책봉이 없다고 왕권행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치·문화대국인 중국과 공존질서를 통해 아시아의 국제관계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진평왕 43년(621) 이래 시작된 신라와 당과의 관계는 중국과 그 주변국가간에 존재하는 조공관계로서 다양한 문물의 교류와 우호 및 화평관계의 뜻을 지녔으나, 백제·고구려와의 대립과 정벌이라는 현실적 목적 때문에 그 모습이 달라지게 되었다. 진평왕 후반기 이후 세력을 강화시킨 용춘과 서현계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결속 이후 강화된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백제·고구려의 침입에 따른 국가적 위기 속에서 선덕왕을 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확립한 후277)申瀅植,<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앞의 책, 1984), 115쪽. 적극적인 친당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淵蓋蘇文의 정변으로 대당관계가 악화되자 道敎의 요청이나 宿衛提供 등 여러 가지 친당책을 추진하였으나 당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대립이 계속되었다.278)申瀅植,<羅唐交涉上에 나타난 宿衛의 性格>(위의 책), 267쪽. 또한 백제 역시 大耶城事件(선덕왕 11년, 의자왕 2년;642)과 고구려·수전쟁(645) 때의 신라침공 등으로 신라와의 긴장이 격화됨으로써 동아정세는 혼미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에서는 선덕왕 16년(647)에 毗曇의 亂이 일어났다.279)毗曇의 亂에 대해서 井上秀雄은 ‘和白의 국왕에 대한 퇴위요구에 대하여 金庾信 등이 여왕을 옹립함으로써 발단된 것으로 보아 선덕왕측이 일으킨 것’으로 풀이하였다(井上秀雄,≪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440∼441쪽). 이에 대해서 李基白은 비담 등 구귀족들의 ‘상대등 왕위추대운동’으로 보았으며(李基白, 앞의 책, 101쪽), 李基東은 ‘내물왕계 씨족회의의 의결인 선덕왕의 폐위 내지 비담의 국왕추대에 불만을 품은 가야출신 김유신이 선덕왕을 옹호함으로써 발단되었다’고 하였다(李基東,≪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84쪽). 그 외에 武田幸男,<新羅“毗曇の亂”の一視角>(≪三上次男博士喜壽記念論文集≫, 1985);朱甫暾,<毗曇의 亂과 善德王代 政治運營>(≪李基白先生古稀記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鄭容淑,<新羅 善德王代의 政局動向과 毗曇의 亂>(위의 책) 등이 있다. 주보돈은 선덕왕 사망 이전 진덕왕의 즉위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을 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보았고, 정용숙은 선덕왕 사후 왕위에 오를 것을 확신한 비담 등이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덕왕을 옹립하고 왕궁을 장악한 것으로 추측하여 비담이 난을 일으켜 폐위코자 한 대상을 진덕왕이라고 보았다. 이 난은 신흥세력(김춘추·김유신)과 구귀족세력(비담·閼川) 간의 권력쟁패전이었다. 이 난의 결과로 신흥세력은 구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포섭하였고 진덕여왕을 즉위시킴으로써 무열계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기서 김춘추는 직접 입당하여 宿衛外交를 추진하였고,280)申瀅植,<新羅의 宿衛外交>(앞의 책, 1984), 352∼390쪽. 金法敏은 진덕여왕이 지은 太平頌을 헌진함으로써 대당외교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긴장된 교섭과정에서도 양국간에는 빈번하게 문물이 교류되었다.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서281)고구려는 封域圖(영류왕 11년)·白金(보장왕 3년)·美女(보장왕 5년) 등이, 백제는 果下馬(무왕 22년)·明光鎧(무왕 27년)·鐵甲과 彫斧(무왕 38년)·金甲(무왕 40년) 등이 중국에 건너갔다. 그리고 당으로부터는 天尊像(영류왕 7년)·道德經(보장왕 2년)·錦袍와 綵帛(무왕 38년) 등이 들어왔다. 신라는 다양하지 못하였다.

㈎ 진평왕 53년 7월…미녀 2명을 보냈다.…그러나 당은 사신과 함께 돌려 보냈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 진덕왕 4년 6월…왕은 5언으로 된 太平頌을 비단에 짜넣어 金春秋의 아들 法敏을 시켜 당의 황제에게 바쳤다.…7년 11월…金總布를 바쳤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신라의 경우에 다만 특별히 제작된 태평송이나 금총포 등을 당에 보냈을 뿐이었다. 신라와 당 사이의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8세기 이후이다. 따라서 당시 당에서 건너 온 물건도 그림병풍이나 비단 또는 서적 등에 불과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