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1) 시기 구분

1) 시기 구분

 통일 이전의 신라가 왜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였는지에 관해 현재 정설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는 이 시기의 신라와 왜국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기본사료인≪三國史記≫와≪日本書紀≫의 사료적 한계 때문에, 이들 사서를 이용하여 양국관계를 복원하고자 할 때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먼저≪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본기에 赫居世居西干 8년(B.C. 50)조부터 炤知麻立干 22년(500)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54개조의 왜관계 기사가 보이지만, 이≪삼국사기≫의 왜에 대해서는 한반도 거주설, 일본열도 거주설, 한반도·일본열도 거주설 등이 존재하고 있다. 일본열도 거주설의 경우도 왜왕권설·지방세력설 등이 존재하여,293)田中俊明,<“三國史記”にみえる‘倭’關係記事について>(≪歷史公論≫77, 1982), 67∼69쪽.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관계 기사를 왜국의 왕권과의 관계를 말해 주는 기사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삼국사기≫에는 6∼7세기의 신라와 왜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일본서기≫는 234개조의 신라관계 기사가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왜국과 신라와의 관계가 ‘神功皇后(진구코우고우)의 三韓征伐’과 신라의 항복으로 시작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또한≪일본서기≫에서는 일관되게 왜국이 신라에 조공을 요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현재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사실로 인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는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성립한 일본 율령국가 지배층의 대신라관을 반영한 것이므로,≪일본서기≫의 신라관계 기사를 사료로 이용할 때에는 이러한 윤색된 기사에서 사실 관계만을 읽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 주의하여 신라와 왜국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때, 우선 전반적인 경향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4세기 후반 백제와의 국교가 성립한 이후 왜국은 백제멸망 때까지 일관하여 친백제정책을 취하였고, 그 결과 신라와 왜국의 관계도 백제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왜국의 관계도 자세히 살펴보면 각 시기별로 미묘한 변화를 겪는다. 즉 ① 4세기 말∼5세기 초로, 백제·왜국과 고구려·신라라는 두 군사동맹체제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신라와 왜국이 적대하던 시기, ② 433년∼5세기 말까지로 백제와 신라의 화친관계의 성립으로 신라와 왜국의 관계도 개선되었던 시기, ③ 6세기 전반 가야지역을 놓고 신라와 경쟁을 벌이던 백제가 왜국에 대한 문물전파라는 대외정책을 쓰면서 왜국이 원병을 파견하는 등 백제와의 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여 신라와 적대하던 시기, ④ 562년 대가야의 멸망 이후 6세기 말까지로, 대가야의 멸망으로 백제로 가는 교통로를 상실한 왜국이 고구려의 사신 파견을 계기로 신라의 양해를 받아내어 신라 연안을 지나 백제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하여 백제·신라와 교류하던 시기, ⑤ 수의 성립 이후 7세기 초에 왜국이 백제의 권유로 대수외교와 대고구려외교를 개시하면서 신라 연안을 지나 백제로 가는 교통로도 확보하여 백제·고구려·신라와 교류하던 시기, ⑥ 당의 성립 이후 623년∼650년 신라가 왜국에 送使를 파견하여 대당관계를 매개하면서 왜국에 대해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펼친 결과 왜국이 신라·고구려·백제에 대해 균형외교를 지향하던 시기, ⑦ 651년∼663년의 시기로, 신라·당의 왜국에 대한 군사동맹 강요와 백제·고구려의 적극적 외교공세 속에서 왜국이 점차 백제·고구려 진영에 가담하게 되어 백제멸망 후에는 백제부흥 운동군에 대규모 원병까지 파견하게 되는 시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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