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5) 6세기 후반 왜국과의 관계

5) 6세기 후반 왜국과의 관계

 6세기 전반의 적대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신라가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섭을 재개한 것은 가야 제국을 신라 왕의 지배하에 편입시키고 있던 560년대이다. 가야지역을 확보한 신라는 왜국의 정황을 살피고 왜국과의 교역을 개시하기 위해 眞興王 21년(560)·22년·23년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왜국조정의 친백제세력들의 반대로 양국관계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00)金恩淑,<6世紀後半 新羅와 倭國의 國交成立過程>(≪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15, 1994), 197∼203쪽. 진흥왕 25년 이후 신라는 서해항로를 통해 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고, 陳과도 교섭을 시작하여 활발한 교섭을 벌여 대중국외교에서 고구려·백제를 능가하게 되었다.301)申瀅植,<韓國古代의 西海交涉史>(≪國史館論叢≫2, 國史編纂委員會, 1989), 23∼24쪽. 가야의 신라편입으로 왜국과의 교섭로를 잃은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라와의 교섭이 실패함으로 해서 왜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렇게 대외적인 교섭이 단절된 왜국에 영양왕 원년(570) 고구려에서 최초로 사신이 파견된 후 같은 왕 4년·5년에 사신이 계속 파견되었다.302)≪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31년 4월 갑신삭 을유 및 권 20, 敏達 2년 5월 병인삭 무진·3년 5월 경신삭 갑자. 그러나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의 국교수립 요구에 대해 거부하는 세력이 大和朝廷 내부에 있어 양국간의 국교는 원활히 추진되지 못하였다.303)고구려는 그 후 595년에서야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 대신 고구려의 국교 개시 요구를 계기로 왜국은 신라와의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欽明(킨메이)천황 32년(571) 왜국은 신라측에 사신을 보내 왜국과 신라와의 교역 개시와 백제로 가는 교통로의 이용 허가를 내용으로 하는 외교교섭을 벌였다. 신라 진흥왕은 왜국이 고구려와 결합하는 것을 막고, 왜국과의 교역을 위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32년(571) 신라와 왜국의 관계가 개시된 이래, 왜국은 신라보다 백제에 더 많은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즉 왜국은 신라와의 교섭재개 그 자체보다 신라의 양해를 얻어 백제와 교섭을 재개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304)金恩淑, 앞의 글, 210∼219쪽. 敏達(비다츠)천황 4년(575)의 교섭으로 신라로부터 해상로를 양해받은 왜국은 민달천황 6년부터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교관계 문물을 수입하였다. 왜국과 백제와의 교류는 표면적으로는 불교문물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인 교류였으나, 정치·군사적인 것을 협의하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국과 교류를 재개한 백제는 위덕왕 24년(577)∼27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579년에 즉위한 眞平王은 왜국에 불상을 보내면서 백제와의 통교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 듯하다. 이에 대해 왜국조정에서는 敏達천황 12년(583) 무력으로 백제와의 교통로를 확보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하였고, 그 이듬해 왜국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교관계 문물교류를 위해 백제와 왜국의 교통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587년에는 왜국조정에서 蘇我馬子(소가노우마코)가 政敵 物部守屋(모노노베노모리야)을 제거하고 白瀨部皇子(하츠세베노오오지;崇峻(수우쥰)천황)를 즉위시켰다. 그 후 소아마자는 본격적으로 崇佛을 내세우고 氏寺 건립계획을 세웠는데, 백제는 위덕왕 35년(588) 佛舍利와 함께 승려·사원건축 기술자 등을 보내어 소아씨의 씨사(法興寺)건립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숭준천황 원년(588) 백제사신이 돌아갈 때에 소아마자는 善信尼 등을 유학승으로서 백제에 파견하였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와 백제는 580년 이후 601년까지 교섭도 없었으나, 또한 전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 시기에 불교신자였던 신라와 백제 양국의 지배층은 승려의 왕래와 불교관계 문물의 전래에 대해서는 양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라는 590년대에 왜국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여 성을 쌓고,305)≪三國史記≫ 권 4, 진평왕조에 의하면 신라는 591년 7월 남산성을 쌓았고 593년 7월에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개축하는 등 왜국에 대비하고 있었다. 대수외교를 개시하였다.306)대수외교를 담당하기 위한 領客府를 591년 설치하였고, 594년에는 수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하여 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왜국에서는 숭준천황 5년 소아마자가 천황을 암살하고, 자신의 질녀 推古(수이코)女帝를 즉위시키고, 자신의 생질 聖德(쇼우토쿠)太子를 섭정 겸 황태자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氏寺인 법흥사의 개창을 앞두고 소아마자는 백제와 고구려에 승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백제는 이미 위덕왕 35년에 왜국에 불사리를 전한 적이 있는 승려 慧聰을 같은 왕 42년에 다시 파견하였다. 고구려는 영양왕 6년(595) 慧慈를 파견하여 이로써 고구려와 왜국의 국교가 열렸다.307)坂元義種,<推古朝の外交-とくに隋との關係を中心に>(≪歷史と人物≫100, 1979) 49∼50쪽. 혜총과 혜자는 법흥사에 거주하면서 성덕태자에게 유학과 불교를 가르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