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7) 대당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7) 대당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618년 수가 멸망하고 당이 건국되자, 신라는 진평왕 43년 7월 당에 사신을 파견하고, 왜국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를 보내 당과 왜국과의 교류를 중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라는 진평왕 45년 7월에는 불상과 金塔·舍利·幡·旗를 보내면서, 수대에 중국에 갔다가 귀국하던 왜국의 학문승 惠齋(에사이)·惠光(에코우)과 의사 惠日(에니치)·福因(후쿠인) 등을 보내 주었다.316)≪日本書紀≫권 22, 推古天皇 31년 7월. 중국에 갔다 돌아오는 왜국의 학문승과 의사를 신라배에 태워 귀국시킨 것은 이후 신라와 왜국의 관계개선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혜일 등은 법식이 완비된 당과 왕래할 것을 왜국조정에 주청하였는데, 신라를 통한 당과의 국교개시에 대해 왜국조정내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당과의 국교개시는 백제에서 무왕 31년(630) 사신이 파견된 이후에 이루어졌다. 신라는 진평왕 45년의 교섭 실패 이후 진평왕 53년까지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317)≪日本書紀≫에서는 그 이유를 623년 왜국이 신라를 침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것도 백제와 왜국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백제계 사관들이 조작한 기사다. 즉≪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623년부터 628년까지 거의 매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데, 백제계 사관들은 이러한 백제의 군사행동에 왜국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백제·고구려와 대립하고 있던 신라는 대당외교를 강화하여, 진평왕 47년에는 고구려가 조공로를 막고 있다고 호소하였고, 진평왕 49년에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키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백제도 무왕 27년에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고구려가 조공로를 막고 있다고 하면서 당의 동향을 살폈다. 당 고조는 朱子奢를 고구려·백제·신라에 파견하여 삼국이 서로 화친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에 대해 629년 고구려와 백제 국왕은 당에 국서를 보내 사죄하였다.318)山尾幸久, 앞의 책, 368쪽. 그러나 당의 조정에 의한 삼국의 평화유지에는 한계가 있어서, 백제는 무왕 29년에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고, 신라 또한 진평왕 5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娘臂城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는 영류왕 8년(625)에 승려 惠灌을 왜국에 보냈다. 왜국의 推古조정에서 승정으로 임명된 혜관은 法興寺에서 삼론종을 유포하여 일본 삼론종의 비조가 되었다.319)田村圓澄,≪日本佛敎史≫4(法藏館, 1983), 198쪽. 무왕 16년(615) 사신을 왜국사신과 동행시켜 파견한 적이 있었던 백제는 15년 만인 무왕 31년 3월 고구려와 함께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320)신라와 적대하고 있던 백제가 신라 연안을 이용하기는 어려웠으며, 고구려 사신과 동행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항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은 왜국에 대당외교를 권고하기 위한 사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舒明(죠메이)천황 2년(630) 8월 왜국은 당에 최초로 견당사를 파견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왜국의 대당외교를 주선함으로써 신라의 친당외교에 대항하고자 하였다.321)山尾幸久, 앞의 글, 205쪽. 또한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왜국의 견당사의 왕래를 통해 양국간의 연락수단도 확보할 수 있었다.

 왜국 최초의 견당사는 견수사였던 犬上君御田耜(이누카미키미노미타스키)와 견수유학생이었던 혜일 등 중국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당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은 신라와 백제연안을 통해 가는 북로였으므로 견당사의 파견에는 신라의 협조도 필요하였다. 그 교섭을 위해 왜국은 추고천황 31년(623) 신라 송사의 도움으로 귀국한 적이 있는 혜일을 견당사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백제·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신라는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 속에 왜국을 편입시키므로써 왜국과 백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약화시키고자 왜국의 견당사 파견에 협조하였다. 한편 고구려와 군사적 긴장상태에 있었던 당도 왜국을 반고구려 진영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322)鈴木英夫,<7世紀中葉における新羅の對倭外交>(앞의 책), 304쪽. 태종 6년(632) 왜국사신이 귀국할 때에 당은 新州刺史 高表仁을 왜국에 파견하면서 당에 유학하고 있던 왜국의 학문승 靈雲(료운)·旻(민)·勝鳥養(수구리노토리카이) 등을 귀국시켰는데, 신라는 이들에게 送使를 부쳐서 보내 주었다.323)田村圓澄,<新羅送使考>(≪朝鮮學報≫90, 1979), 69∼70쪽. 당은 왜국에게 당에 臣從할 것과324)西嶋定生, 앞의 책, 224∼225쪽. 신라와 우호관계를 가지도록 권고하였을 것으로325)山尾幸久, 앞의 글, 205∼206쪽. 추측되는데, 그러나 왜국조정의 반신라세력의 반발로 양국간의 외교교섭은 원활히 추진되지 않았다.326)鈴木英夫, 앞의 글, 304쪽.

 왜국에 대한 신라의 외교공세에 대항하여 백제 무왕은 재위 32년(631)에 아들 豊璋을 파견하여327)鄭孝雲,<7世紀代의 韓日관계의 硏究>上(≪考古歷史學誌≫5·6, 1990), 151∼154쪽.
金壽泰,<百濟義慈王代의 太子冊封>(≪百濟硏究≫23, 1992), 147∼151쪽.
盧重國,<7世紀 百濟와 倭와의 關係>(≪國史館論叢≫52, 1994), 165쪽.
왜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풍장은 백제멸망 때까지 왜국조정에 손님자격으로 체재하였다. 서명천황은 재위 11년(639)에 百濟川 근처에 宮을 짓고, 百濟大寺를 건립하여 친백제적인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신라의 왜국에 대한 접근정책은 계속되어 선덕여왕 8년(639)과 9년에도 송사를 파견하여 왜국의 遣唐 학문승과 학생들을 왜국에 보내 주었다. 무왕 41년에는 백제도 왜국의 견당유학생이 귀국할 때에 送使를 파견하여, 백제와 신라의 송사가 함께 왜국으로 갔었다.

 640년에 송사로 왜국에 간 신라사신은 견당유학생 등 친신라파와의 제휴를 강화하기 위해 선덕여왕 11년 3월까지 왜국에 체류하였다. 신라는 또한 선덕여왕 11년 3월에는 皇極(코우교쿠)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 서명천황의 상을 애도하는 사신을 삼국 중에서 최초로 파견하는 등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선덕여왕 11년 7월 의자왕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大耶城을 비롯한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긴 신라는 그 해 겨울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고구려가 죽령 서북 땅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므로 양국간의 교섭은 결렬되었다. 643년 11월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를 맺고 신라의 党項城을 빼앗아 입당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대야성 등을 점령하여서 왜국으로 가는 항로를 확보한 백제 의자왕은 조카 翹岐를 왜국에「質」로 파견하여 양국관계를 보장하는 한편 교기를 왕권의 핵심부로부터 추방하고자 하였다.328)鈴木靖民,<皇極期朝鮮關係記事の基礎的考察>(≪國史學≫82, 1970), 24쪽.
盧重國, 앞의 글, 169∼171쪽.
백제로부터 귀국한 사신의 보고로 의자왕의 의도를 알게 된 황극조정은 오히려 교기를 환대하는 한편 백제측에게는 새로운「質」을 요구하였으므로 백제는 砂宅智積의 아들 長福을 파견하였다.329)≪日本書紀≫권 24, 皇極 원년 7월 갑인삭 을해·8월 병신. 의자왕 4년(644)에도 백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가야지역의 산물을 보냈으나, 왜국조정은 백제의 선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여 돌려보내는 등 양국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다.330)盧重國, 앞의 글, 174∼176쪽.

 한편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대비하여 선덕여왕 12년 당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당은 신라에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는 한편, 고구려와 백제에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신라에서는 당이 요구한 여왕폐위 문제를 중심으로 여왕폐위파와 지지파가 대립하게 되었으나, 여왕 지지파 김유신은 선덕여왕 13년 9월 백제를 공격하여 실지를 회복하였다. 또한 신라 공격중지 명령에 대해 고구려가 失地반환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이를 무시하였으므로 당은 태종 19년(645) 5월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 때에 신라는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당을 도왔으나, 그 틈에 백제에게 7성을 탈취당하기도 하였다.

 당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된 645년에 왜국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나 6세기 중엽 이후 4대에 걸쳐 권력을 휘두르던 蘇我 本宗家가 몰락하였다. 이를 大化改新(타이카노카이신)이라고 한다. 쿠데타 직후 새로 성립한 改新정부는 왜국에 와 있던 고구려 사신에게는 양국간의 우호관계의 강화를 요구하였고, 백제사신에게는 신라로부터 김해지역을 확보하고 교역물을 확실히 보내도록 요구하였다.331)≪日本書紀≫권 25, 孝德天皇 大化 원년 7월 정묘삭 무진. 또한 개신정부는 대화 2년(646)에는 신라에 高向玄理(타카무쿠노쿠로마로)를 파견하여 양국관계를 보장할 수 있는 인물(質)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면서 신라와 외교관계도 강화하려 하였다.332)≪日本書紀≫권 25, 孝德天皇 大化 2년 9월.

 당시 신라에서는 이찬 毗曇이 상대등으로 임명되는 등 여왕폐위파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여왕지지파 김춘추는 고향현리로부터 왜국의 쿠데타에 대해 듣고, 왜국의 새로운 정부와 교섭을 통해 양국관계를 개선해 보고자 647년 왜국으로 건너갔다.333)朱甫暾,<金春秋의 外交活動과 新羅內政>(≪韓國學論集≫20, 1993), 17∼25쪽. 김춘추의 왜국 체재 중에 신라에서는 비담의 난이 일어나 선덕여왕이 사망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김유신이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여왕지지파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김춘추는 왜국과의 관계개선에 성공하고 귀국하여 진덕여왕을 보좌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2년(648)부터는 대당 청병외교를 추진하면서, 중국 의관의 착용, 당의 연호 사용, 하정의례 시작 등 친당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당은 태종 19년(645) 이후 21년·22년 모두 3차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649년 태종은 사망한다. 신라는 진덕여왕 원년·2년 계속되는 백제군대의 침공을 격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진덕여왕 2년에는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국의 국서를 받아다가 당에 전달해 주었다.334)≪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倭國. 또한 진덕여왕 3년에는 선덕여왕 13년(644)에 당에 청병사로 파견되어335)朱甫暾,<“文館詞林”에 보이는 韓國古代史 관련 外交文書>(≪慶北史學≫15, 1992), 162·166쪽. 당의 고구려원정 때 길 안내를 한 적이 있던336)延敏洙,<日本書紀の‘任那の調’關係記事の檢討>(≪九州史學≫105, 1992), 16쪽. 金多遂를 왜국에 파견하여 당·신라·왜국으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大化 4년에 고구려·백제·신라에 모두 학문승을 파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신정부는 친백제적인 외교정책을 수정하여 삼국에 대한 균형외교를 유지하고자 하였을 뿐 신라와의 군사동맹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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