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8) 당과의 군사동맹 강요와 왜국의 동향

8) 당과의 군사동맹 강요와 왜국의 동향

 신라는 진덕여왕 4년(650)과 5년에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5년의 사신은 당의 의복을 입고 가서 왜국에게 당과의 동맹을 강요하여, 왜국조정내의 친백제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650년대에 백제는 의자왕 11년(651)·12년·13년·14년 계속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13년의 경우는 의자왕이 많은 선물을 보내어 양국관계를 강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337)≪三國史記≫권 28, 百濟本記 6, 義慈王 13년 8월. 653년경 의자왕이 일본의 실력자 藤原鎌足에게 보낸 선물 목록이≪東大寺獻物帳≫에 보인다(胡口靖夫,<大化改新前後の日本と百濟>,≪古代文化≫33-4, 1981, 17∼18쪽). 신라의 동맹강요와 의자왕의 적극외교를 계기로 하여, 왜국조정내에서 점차 친백제파가 점차 발언권을 확대하던 白雉(하쿠치) 4년(653)과 5년에 왜국은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5년에 파견된 高向玄理가 당에서 객사하는 바람에 왜국조정의 친신라파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왜국이 신라와의 군사동맹을 거부하긴 하였어도 양국간의 교섭은 658년경까지 계속되었다. 신라는 654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왜국의 견당사가 귀국할 때에 송사를 부쳐 보냈다. 또한 무열왕 2년(655)에 고구려·백제·말갈 군대의 공격을 받자,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級湌 彌武를 비롯한 12명의 才伎를 왜국에 파견하였다.338)≪日本書紀≫권 26, 齊明 원년 是歲. 왜국은 齊明(사이메이)천황 원년(655) 8월에는 河邊臣麻呂(카와베노오미마로)가 귀국할 때에 가지고 온 당 고종의 새서를 통해 신라에 원군을 파견하라는 당의 요구를 받기도 하였으나, 이에 왜국은 응하지 않았다. 한편 백제·고구려의 왜국에 대한 외교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백제는 의자왕 15년 달솔 餘宜受를 수석으로 하는 1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고구려는 보장왕 15년(656) 81명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339)≪日本書紀≫권 26, 齊明 원년 是歲·2년 8월 계사삭 경자.

 이에 대해 왜국은 齊明天皇 2년(656)에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백제와의 관계를 강화하였고, 皇極天皇 원년(642) 이후 백제에 장기 체류하던 難波吉士國勝(나니와노키시쿠니카츠) 등을 귀국시켜 한반도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는 무열왕 4년(657)에 沙門 智達(치다치) 등을 신라사신과 함께 당에 보내 달라는 왜국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무열왕 5년에는 사문 智通(치츠)과 지달이 신라선을 이용하여 당에 가도록 배려하여 왜국과의 관계악화를 막고자 하였다.340)≪日本書紀≫권 26, 齊明天皇 3년 是歲·4년 7월.

 당 태종의 사후 즉위한 당 고종이 신라의 청병외교에 본격적으로 응한 것은 顯慶 3년(658) 6월 이후로, 이 때부터 당은 요동 북부의 고구려영토를 공격하는 한편 현경 5년 3월에는 13만의 대군을 백제에 파견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의 고구려 공격이 계속되던 현경 4년 7월에 왜국은 백제와 남중국을 연결하는 항로를 통해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여 당의 동정을 살피고자 하였으나, 당 고종은 백제공격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이들을 억류하였다.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멸망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유민들은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풍장을 돌려보내 줄 것과 원병을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제명조정은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라와 당을 상대로 하여 전쟁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고, 663년 대규모의 군대와 군비가 투입된 白江口전투에서 왜국과 백제유민의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金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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