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과 관직

1) 관등과 관직

 진한연맹체를 구성한 하나의 邑落國家에 불과하였던 斯盧國은 3, 4세기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정치적 통합과정에서 최후의 승자가 됨으로써 新羅라는 새로운 모습을 띤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4세기 중반 奈勿王代부터 사용된 麻立干이라는 王號는 그와 같이 변모된 국가에 어울리는 칭호였다.341)마립간이란 왕호의 첫 사용시기에 대해서는≪三國遺事≫는 내물왕대부터로,≪三國史記≫는 눌지왕대부터라하여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밖에도 북중국 前秦과의 최초의 교섭에서 신라의 사신인 衛頭와 前秦王 苻堅과의 사이에 오고 간 대화에서도 그를 짐작할 수 있다(≪太平御覽≫권 781, 新羅 및≪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니사금 26년). 한편 이 시기에 이르러 대형의 봉분과 막대한 부장품을 수장하는 積石木槨墳이 출현하는 것도 그와 같은 변화의 일단을 입증하여 준다. 그러나 소위 마립간시대에는 아직 피복속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할 정도로 중앙의 지배체제가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자연히 재지세력을 통하여 간접지배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342)당시의 지방지배 형태를 한마디로 貢納制에 바탕한 간접지배라고 일컫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실태는 다양하였다.

 복속된 재지세력들 가운데에서 일부에게는 중앙정부가 干과 같은 직책을 부여하여서 기존의 지배권을 계속 승인하여 줌으로써 신라의 지배체제내로 포섭하려고 하였으며,343)≪三國史記≫권 45, 列傳 5, 朴堤上傳에 보이는 水酒村干·一利村干·利伊村干 등에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복속되기 이전에는≪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臣智·險側·樊濊·殺奚·邑借 등으로 불리웠다. 따라서 干의 지급은 곧 그들을 신라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다른 일부는 왕경으로 옮겨서 部에 배속됨으로써344)대표적으로는 骨伐國王 阿音夫가 來降하여 왔을 때 第宅·田莊을 주어 왕경에 안치시키고 그 곳을 郡으로 삼았다고 하는 사례를 손꼽을 수 있겠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조분니사금 7년). 재지적인 기반이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4, 5세기는 크게 보아 기존의 지배체제가 기본적으로 온존된 상태에서 재편을 준비해 간 과도기였다고 하겠다.

 신라가 그와 같이 느슨하게 짜여진 마립간적인 지배체제를 벗어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로의 전반적인 전환을 시도한 것은 6세기 초의 智證王(500∼513)과 法興王(514∼539)대에 이르러서였다. 이 때에 왕경과 지방에 걸쳐 존재한 다양한 지배세력을 대대적으로 재편성하면서 部가 가지고 있던 기능에 대신하여 보다 작은 범위의 혈연을 근간으로 한 집단적인 신분제로서 성립한 것이 骨品制라면 지배세력 개인이 관료조직 속에서 차지하는 서열의 표시로서 마련된 것이 바로 官等制였다. 개인적인 신분표시로서의 성격을 띤 관등제가 혈족적인 신분제인 골품제의 테두리 속에서 운용된 만큼 양자는 당연히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관등제는 원래 읍락국가단계 이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체에서의 席次나 서열을 표시하는 데에서 원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345)李丙燾,<古代南堂考>(≪서울大論文集≫人文社會科學 1, 1954;≪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628∼631쪽). 그러나 마립간시대에는 아직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등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치적·사회경제적으로 상당히 독자성을 지녔던 왕경의 部들을 기반으로 한 部長들은 干이라 칭하면서 각기 국왕에 직속되지 않고 그들에 예속된 독립된 관료조직을 갖추고 있었다.346)≪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3년. 국왕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부에 세력기반을 가진 부장으로서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또한 지방에서도 간이라 불리는 재지세력들이 나름의 독자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마립간시대의 국왕이란 마립이 宗·頭를 뜻하는 데서 드러나듯이347)李丙燾, 앞의 책, 626∼628쪽. 왕경과 지방에 각기 독자적인 기반을 가진 채 존재하는 간들의 중층적인 구조에 바탕을 두고 그 상위에 위치하였을 뿐 이들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간들 가운데 일인자였을 따름이다. 이처럼 마립간시대의 다원적인 관료조직이 바탕이 되어348)朱甫暾,<新羅 中古期 村落構造에 대하여(1)-外位와 地方民 身分制->(≪慶北史學≫9, 1986), 14∼15쪽. 6세기 초에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성립되고 부장이나 재지세력이 가졌던 독자적인 기반이 해소되면서 일원적인 관등제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관등은 서열화된 것이지만 그 자체에는 원래 관직적인 요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립간시대에는 관등과 관직이 미분화된 상태였다. 가령 伊湌이나 阿湌 등은 그 자체가 서열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관직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원적인 관등제가 성립하고 난 뒤 관등인 大舍·舍知·吉士 등이 여전히 관직으로도 기능하고 있는 데서도 방증된다.349)≪三國史記≫권 33, 志 2, 色服志의 冠制 사례나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昌寧 眞興王 巡狩碑>의 古奈末典에서 알 수 있듯이 奈麻와 大奈麻도 관직으로 사용된 듯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관등제의 성립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관등에 내재된 관직적인 요소의 분리를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관등제가 성립한 후 새롭게 관직이 설치되는 것은 그를 증명한다.

 흔히 관등제라고 하면 京位制를 지칭하지만 통일 이전의 신라 관등제에서는 경위제와 外位制의 이원적인 구조로 되어 있었다. 경위는 제1등인 伊伐湌(角干)에서 造位에 이르기까지 17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왕경인만을 그 지급대상으로 하였다. 이 17등의 기본적인 경위 이외에도 군공포상 등의 필요에서 때로는 1등인 각간의 상위에 大角干과 太大角干까지 두어지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상설된 관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非常京位였다.350)≪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여기에서는 대각간이 660년 백제 멸망 후 김유신을 군공포상하면서 처음 둔 것으로 되어 있으나≪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柒夫傳과<昌寧碑>에 각각 大角湌·大一伐干의 사례가 보이므로 그것은 착오임이 분명하다. 통일 이후 대각간은 17관등의 위에 상설 관등으로 자리잡아 가는 추세에 있었다. 몇몇 관직의 관등범위가 대각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위 17등의 골격은 멸망기까지 변함없이 존속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골품제와의 관련하에서 重位制를 운용한 것은 관등제상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三國史記≫에는 경위 6등인 阿湌이 重阿湌에서 4重阿湌까지, 10등인 大奈麻는 重奈麻에서 9重奈麻까지, 11등인 나마는 중나마에서 7重奈麻까지로 분화한 것으로 되어 있고351)≪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이 밖에 阿湌 重位는<甘山寺彌勒菩薩造像記>를 비롯한 몇몇 금석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9세기 금석문에 의하면352)文聖王 18년(856) 만들어진<新羅 竅興寺鐘銘>에 三重沙干의 사례가 보인다. 8등인 沙湌에도 중위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이들 중위제의 운용을 둘러싼 구체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논자들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제기되어 있으나353)大奈麻 重位를 부정하는 견해(末松保和,<梁書新羅傳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406∼407쪽)와 奈麻 重位를 부정하는 견해(邊太燮,<新羅 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70∼76쪽)가 있는가 하면, 양자를 모두 인정하는 입장도 있다(武田幸男,<新羅の骨品體制社會>,≪歷史學硏究≫299, 1965, 3쪽). 한편 나마 중위에 대해서는 大舍까지밖에 승진하지 못했던 4頭品 출신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설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三池賢一,<新羅の官位制度> 下, ≪駒澤史學≫18, 1971, 20∼21쪽), 지방민의 특진의 길로 마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鍾旭,<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歷史學報≫64, 1974, 61∼62쪽). 관등제가 골품제와의 긴밀한 관련 아래에서 운용되었던 데서 중위제가 생겨난 것으로 보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중위가 설정된 관등은 그를 상한으로 승진상의 제약을 받는 골품소지자에 대한 특진의 길로서354)末松保和, 위의 책, 404∼405쪽. 한편 李基東,<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35쪽에서는 중위제가 진골 중심의 골품제와 비진골 중심의 관료제라는 두 개의 異質的인 階層, 原理가 서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도달한 일종의 妥協點이라고 하였다. 마련된 것이었다. 이 중위제는 7세기에 들어와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17등 경위는 그 명칭으로 볼 때 크게 두 그룹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1등 이벌찬에서 9등 級湌에 이르는 湌(干)群과 10등 대나마 이하의 非湌(干)群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비찬군 경위는 다시 奈麻群과 12등 大舍 이하의 舍知群으로 분류된다.355)三池賢一,<「三國史記」職官志外位條の一解釋>(≪駒澤大學硏究紀要≫5, 1970), 113∼115쪽에서는 경위를 干群·mar系·雜類의 셋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三池는 나마와 대나마를 대사·사지와 함께 mar계로 취급하였다. 양자를 구별하려는 것은 나마군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먼저 표기 방법상에서 나마는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6세기 전반기에는 금석문에 의하는 한 찬군은 干支란 語尾를 사용하였으며, 사지군의 경우에는 거의 모두 帝智·第·智 등이 붙어 있다가 6세기 중반 무렵에는 모두 탈락되었다. 干群에 비추어 보면 그 語義는 알 수 없지만 사지군은 모두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356)干群 京位 가운데서도 伊伐湌과 3등인 迊湌은 그 異稱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나 분화과정이 다른 관등과는 달랐던 것 같다. 원래 각각 달리 성립되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한 듯한 느낌이 짙다. 그런데 나마만은 아무런 語尾가 원래부터 없어 이들과는 구별되고 있다.357)그런데 末松은≪日本書紀≫에 보이는 奈麻禮란 사례에 근거하여 나마계에도 원래 知가 붙었을 것으로 보았으나(末松保和, 앞의 책, 405쪽),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금석문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奈麻의 표기 변화에 대해서는 權悳永,<新羅 官等 阿湌·奈麻에 對한 考察>(≪國史館論叢≫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48쪽) 참조. 둘째 나마는 한편으로는 기록상의 착오인지 모르겠으나 干이란 어미를 갖기도 하였다.358)≪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
≪翰苑≫권 30, 蕃夷部 新羅.
따라서 이로 보면 나마는 사지군보다는 오히려 간군에 가까운 성격의 관등이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셋째 그와 관련을 갖는 것이지만<봉평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마군은 간군과 동등하게 회의체에 참여하는 존재로 되어 있다.359)이런 의미에서 나마는 다원적인 관료조직이 갖추어져 있던 시기에는 원래 국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葛文王에 속한 관료였고 다른 部長들에게는 없었던 관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뜻에서 3세기 단계에 보이는 고구려의 다원적 관료체계의 시기에 국왕에게만 속한 主簿나 혹은 優台와 같은 성격의 관등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舍知系는 고구려의 使者 계통의 관등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구려 관등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1956;≪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참조. 이후의 금석문들에서도 대사 이하는 회의체 참여가 배제된 반면 나마는 그 구성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경위 17등은 3등분해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경위가 왕경인을 지급대상으로 한 관등인 반면, 1등인 嶽干으로부터 11등 阿尺에 이르는 11개의 등급으로 이루어진 외위는 지방민을 지급대상으로 하였다. 외위는 1등에서 7등인 간에 이르기까지의 간군과 8등 一伐에서 11등 아척에 이르는 비간군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간군외위는 7등인 간에서 분화한 것이며, 비간군외위의 명칭이 경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360)외위 8등 一伐, 9등 一尺, 10등 彼日, 11등 阿尺은 각각 경위 1등인 伊伐湌, 2등인 伊尺湌(伊湌), 3등인 波珍湌, 6등인 阿湌과 간을 제외하면 같다(武田幸男, 앞의 글, 10쪽 및 盧泰敦,<三國의 政治構造와 社會經濟>,≪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8, 210쪽). 원래 외위는 간 이하의 하위 다섯 관등이 경위를 바탕으로 먼저 성립되었고 그 다음 상위의 간군외위가 분화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외위 11등 체계는 두 단계의 과정을 밟아 완성되었던 것이다.361)朱甫暾,<6세기초 新羅 王權의 位相과 官等制의 成立>(≪歷史敎育論集≫13·14, 慶北大, 1990), 268쪽.
하일식,<6세기 新羅의 地方支配와 外位制>(≪學林≫12·13, 延世大, 1991), 30∼35쪽.
17등 경위나 비간군외위의 명칭이 순수한 신라식인 것과는 달리 嶽干·述干·高干·貴干·撰干·上干 등 간군외위의 명칭은 뜻이 분명히 드러나는 한문식인 점도 그러한 사정을 방증하여 준다. 간은 원래 족장층 가운데 한정된 세력에게 주어진 것인 만큼 여기에서 분화된 간군외위는 재지세력 중에서도 특정 집단만이 수여받았던 것 같다. 골품제와 경위제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간군외위와 비간군외위 사이에는 지방민들의 신분에 따라 커다란 斷層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외위와 경위는 운영상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났을 것으로 보인다. 가령 경위는 군공에 의한 포상으로 뿐만 아니라 일정한 연공에 따라 승진한다는 의미에서362)<鳳坪碑>에 보이는 愼宂智와 蔚州<川前里書石>의 眞宂智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524년에는 9등 級湌, 525년에는 沙湌, 539년에는 波珍湌으로 되어 있어 그의 관등 승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관료제의 테두리 안에서 운영된 반면 외위는 주로 포상을 목적으로 운영되면서 관등제이기는 하나 그 자체가 일정하게 신분적인 속성을 강하게 띤 것이 아닌가 한다. 골품제에서 제외된 지방민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제가 따로 마련될 필요가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7세기 초를 전후로 한 어느 때부터 군공포상 등을 목적으로 지방민 가운데서도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외위 대신 경위를 지급하기 시작하다가 통일 후인 文武王 14년(674)에 이르러서는 지방민 전체를 대상으로 일시에 외위 대신 경위를 지급하였다. 이로써 외위는 소멸되고 따라서 관등은 경위로 일원화되었다.363)三池賢一, 앞의 글(1970), 118∼121쪽 및 武田幸男, 앞의 글, 11∼12쪽 참조. 이상과 같이 보면 경위와 외위의 관등대비표는 통일기에 한정하여 사용된 것으로 이해하여야지 이를 중고기까지 소급하여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처럼 왕경인과 지방민을 구별지워 관등제를 마련한 것은 중고기 신라 관등제 운용상의 큰 특징의 하나였다.

 관등제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삼국사기≫권 1, 신라본기 1, 儒理尼師今 9년(32)조의 기사를 그대로 따라 이 때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로부터 6세기 이전 성립설, 6세기 초 성립설, 또는 6세기 이후 단계적 성립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智證王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迎日 冷水里 新羅碑>(이하<냉수리비>로 약칭함)에 의하면 미분화된 형태의 干支가 보이는 점, 部別로 인명을 나열하여 다원적인 관등제의 존재를 시사하는 점, 관직을 소지하였으면서도 관등을 소지하지 않은 사례가 보이는 점 등에서 관등제의 초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아직 이 때까지는 경위 17등과 외위 11등이 전부 완성되지는 않았음이 확실하다.

區 分 部 名 人 名 官 等 備 考
七 王 等 沙 喙




本 彼
斯 彼
至 都 盧
斳 德 智
子 宿 智
尒 夫 智
只 心 智
頭 腹 智
暮 斳 智
葛 文 王
阿 干 支
居 伐 干 支
壹 干 支
居 伐 干 支
干 支
干 支
會議參與者
典 事 人 沙 喙





沙 喙
壹 夫 智
到 盧 弗
須 仇 ?
心 訾 公
沙 夫 那
斳 利
蘇 那 支
奈 麻


(耽 須 道 使)


實務執行者

<표 1><영일 냉수리 신라비>에 보이는 관등

 한편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蔚珍 鳳坪 新羅碑>(이하<봉평비>로 약칭함)에는 大阿干支·大奈麻 등과 함께 小舍·吉之·小烏·邪足智 등의 하위 관등이 보이므로 이 때에는 경위 17등 체계가 완성되었음이 거의 틀림없다. 또한 봉평비에는 下干支를 비롯하여 一伐·一尺 등이 보이므로 외위 가운데 간 이하 비간군외위가 성립하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간군외위는 이 시기 이후의 어느 시기에 분화하여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6세기 초 금석문에 근거하면 경위는 지증왕 이후 법흥왕대에 이르는 사이에 완성되어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律令 속에 법제화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이 때까지 7등인 간 이하 11등 아척에 이르는 외위 다섯 관등은 먼저 성립되었으나 간군외위의 분화는 약간 늦었던 것 같다364)朱甫暾, 앞의 글(1990), 264∼268쪽..

區 分 部 名 人 名 官 等 名 備 考
所 敎 事 層 喙 部
沙 喙 部
本 波 部
岑 喙 部
沙 喙 部


喙 部




沙 喙 部
牟 卽 智
徙 夫 智
? 夫 智
? 昕 智
而 ? 智
吉 先 智
一毒 夫 智
勿 力 智
愼 宂 智
一 夫 智
一 尒 智
牟 心 智
十 斯 智
悉 尒 智
寐 錦 王
葛 文 王
干 支
干 支
太 阿 干
阿 干 支
一 吉 干
一 吉 干
居 伐 干
太 奈 麻
太 奈 麻
奈 麻
奈 麻
奈 麻
會議參與者
大 人 喙 部
沙 喙 部

喙 部
內 沙 智
一 登 智
? 次
比 須 婁
奈 麻
奈 麻
邪 足 智
邪 足 智
實務執行者

<표 2><울진 봉평 신라비>에 보이는 관등

 신라의 관등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뒤늦게 성립되었던 만큼 그로부터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신라의 地方制나 軍制가 고구려 또는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구려의 관등제는 족장을 의미하는 兄과 租稅收取 등 행정적인 역할을 하는 使者가 기본이 되어 분화하였는데365)金哲埈, 앞의 책, 129∼138쪽. 제5등인 皂衣頭大兄 이상은 국가의 기밀을 관장하고 정사를 모의하였다고 한다.366)≪翰苑≫권 30, 蕃夷部 高麗.
武田幸男,<高句麗官位制の史的展開>(≪朝鮮學報≫86, 1978;≪高句麗史と東ァジァ≫, 岩波書店, 1989, 395쪽)에서는 이를 근거로 신라와 마찬가지로 관등 5등을 경계로 신분적인 斷層을 설정하고 있다.
신라의 경위는 크게 간군과 비간군으로 나누어지며 간은 형과 같이 족장을 의미한다. 비간군은 대나마에서 조위까지이나 가장 기본이 된 것은 사지로서 고구려의 사자와 동일한 성격을 띠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관등이 형과 사자가 기본이었듯이 신라의 17등 경위도 간과 사지가 바탕이 되어 분화한 것으로 보면 어떤 영향 관계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신라의 경우 제5등인 대아찬과 6등인 아찬 사이에 단층이 있어 그 이상의 관등이 진골에게만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부의 장관이 대아찬 이상에게만 한정되었던 것도 고구려와 관등제의 운용에서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 兄系와 使者系가 정연하게 정비된 것이 아니라 뒤섞여 서열화된 반면 신라의 그것은 간군과 비간군이 정연하게 분화한 점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이 점에서는 신라의 관등이 백제의 관등과 오히려 유사하다. 백제의 16관등이 率·德·督 등의 어미를 가진 각 群別로 정연하게 분화하였다는 점에서 일단 신라 관등제와의 유사성이 찾아진다. 게다가 관등과 색복과의 관계에서도 양자 사이에는 어떤 영향 관계가 엿보인다. 신라의 公服이 紫·緋·靑·黃의 넷으로 구분된 반면 백제의 그것은 자·비·청으로 3구분이지만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요컨대 삼국의 관등제는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신라 관등제가 가장 늦게 성립된 만큼 고구려나 백제로부터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운영상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6세기 관등제가 성립된 후 신라의 관료제는 상당한 기간 동안 관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官府나 官職이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祿邑의 지급이나 기타 업무의 수행은 관등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법흥왕 이후 진흥왕·진평왕대를 거치면서 점차 관부가 증치되고 관직체계가 갖추어지면서 관등과 관직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운영되었다. 이제 관료제의 운영 자체는 관등 중심에서 관직 중심으로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직관지에는 각 관직에 취임 가능한 관등의 범위가 설정되어 있다. 하나의 관직에 취임 가능한 관등이 하나만 대응된 것이 아니라 상한과 하한이 설정되고 그 폭이 상당히 넓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나 후대의 고려·조선과도 다른 신라 관등제 운영상에 보이는 현저한 특징인 듯 싶다. 고구려의 경우 사례는 많지 않으므로 잘 알 수는 없으나 하나의 관직에 하나의 관등만이 대응되는 예도 있고 또 다른 몇몇의 관직에는 어떤 관등 이상이라고 하여 상한을 설정해 두지 않기도 하였다.367)≪翰苑≫권 30, 蕃夷部 高麗. 반면 백제의 경우에는 대체로 하나의 관직에 하나의 관등만이 대응되도록 하였다.368)≪翰苑≫권 30, 蕃夷部 百濟.
≪北史≫권 94, 列傳 82, 百濟.
이들 몇몇 사례만으로서 그 관직과 관등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보아도 하한과 상한을 명백히 규정한 신라와는 다르다. 이처럼 규정된 이유는 관등과 관직이 골품제에 의해 제약받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369)李基東, 앞의 책, 135∼136쪽.

 신라의 관등제와 관직의 관계가 게재되어 있는≪삼국사기≫직관지는 통일 이후 대대적인 정비과정을 거친 것을 토대로 다시 정리한 것이므로 통일 이전의 사정을 그대로 전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370)가령 軍主의 경우≪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에 의하면 취임할 수 있는 관등 범위가 9등인 級湌에서 2등인 伊湌까지이지만 법흥왕 11년(524)의<봉평비>에는 奈麻로 되어 있으므로 그 규정과 어긋난다. 또한 진흥왕 22년(561)의<昌寧碑>에는 四方軍主의 관등이 8등인 沙湌과 9등인 급찬이며<赤城碑>에서는 阿湌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두 사례는 모두 위의 범위에 들어가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각 관직에 따른 관등의 범위가 직관지의 규정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다 좁게 규정되어 있다가 오랜 운용의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그 폭이 확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점은 금석문상에 보다 많이 보이는 道使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도사가 현령의 전신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현령의 관등 범위는 17등 造位에서 8등인 사찬까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금석문상에서는 大舍·小舍로 되어 있으므로 이 부근이 일반적인 관등 범위였던 듯한데 이후 관직운영에서 그 범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통일 이전의 관등과 관직의 운용문제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짐작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한 이를 토대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의하면 관등과 관직의 관련은 그 운용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몇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관직의 관등범위에 아무런 단서가 붙지 않는 경우이다. 가령 兵部의 장관인 병부령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의 범위는 대아찬에서 태대각간까지로 규정되었을 뿐 그 외의 단서조항이 없다. 각 관부의 장관뿐만 아니라 직관지에 보이는 대부분의 하위직들의 경우에도 아무런 단서가 붙지 않고 그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사례와는 다른 형식이 몇 가지 보이는데 관등과 관직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일반적인 형식보다도 이 점을 오히려 주목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직관지의 정리과정에서 바뀌지 않은 원형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먼저 신라 중고기의 핵심적인 군단인 6停의 최고지휘관 將軍의 경우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 범위는 眞骨上堂에서 上臣까지로 되어 있다. 上堂과 상신이 관직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여기서는 마치 관등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6정의 장군직은 다른 관직이 겸하는 관직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371)朱甫暾,<新羅 中古期 6停에 대한 몇 가지 問題>(≪新羅文化≫3·4, 1987), 28쪽. 말하자면 다른 관부의 상당 이상 상대등에 이르는 관직이 6정의 장군직을 겸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골상당이라고 한 것은 상당에 취임할 수 있는 골품이 진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6두품 혹은 그 이하도 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진골만이 취임하였을 것임에도 그러한 제약규정이 보이지 않는 軍主(都督)나372)申瀅植,<新羅軍主考>(≪白山學報≫19, 1975;≪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212쪽). 仕臣에는373)李基東, 앞의 책, 133쪽. 그러한 단서조항이 누락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신라사회가 진골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와 관련되는 뚜렷한 사례로 9誓幢의 장군은 眞骨級湌에서 각간까지로 규정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6정과 9誓幢의 고급 군관인 大官大監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 범위가 진골은 舍知에서 阿湌까지, 6두품은 奈麻에서 4重阿湌까지로 골품에 따라서 다르다. 이것은 다른 관직의 관등 규정과 관련지어서 보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다른 관직도 원래는 모두 그와 같은 형식으로 규정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직관지가 편찬될 때 골품에 따른 구분없이 하나로 정리되어 버리므로써 관등 범위는 원래보다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동일한 관직에도 이처럼 골품에 따라 관등의 범위가 달랐던 점은 신라 골품제 사회의 한 특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요컨대 관등은 그 자체에 관직적 성격을 원래부터 지녔으나 그를 해소하여 일원적인 기준하에 서열화함으로써 성립되게 되었다. 초기에는 하나의 관직에 취임 가능한 관등의 범위는 그렇게 넓지 않았으나 운용의 과정에서 점차 상한과 하한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실제적인 운용에서 보다 범위가 늘어났던 것은 골품제와 관등, 관직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의 관직에는 골품에 따른 관등 범위가 각기 달랐을 터인데 이것이 직관지의 정리과정에서 골품에 따른 차등이란 단서조항이 삭제되어 버리고 하나로 일원화함으로써 관등 범위가 실제보다 늘어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직관지의 관직과 관등의 관계를 이용하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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