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행정조직

2) 행정조직

 신라에서 중앙행정관부가 설치되고 행정을 전담하는 관직이 두어지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관부는 거의 설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에도 행정적인 필요에 따라서 관직을 둔 경우는 있었는데 당시의 관직 자체는 서열적 성격을 띠었으므로 이들은 6세기에 관등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374)中古期에 관부가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하면서도 관부가 두어지기 이전에 관직이 먼저 두어지거나 장관보다도 실무자가 먼저 두어진 사례가 많았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사정에서 연유한다.

 관부가 설치되기 이전의 행정 운영체계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나마<냉수리비>나<봉평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 비문에 보이는「此七王」과 典事人이나(<표 1>참조), 所敎事집단375)所敎事集團의 14인 가운데 매금왕과 갈문왕만이 敎를 발하는 주체로 나머지 12인을 객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文暻鉉,<居伐牟羅 男彌只碑의 새 檢討>,≪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92, 297∼299쪽).과 大人376)<봉평비>의 해당 부분에서는 앞의 ‘?事’까지 넣어서 ‘?事大人’으로 읽는 것이 타당할 듯하나(李宇泰,<蔚珍鳳坪新羅碑의 再檢討>,≪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 敎學社, 1991, 109쪽) 여기에서는 편의상 大人이라고 하였다.의 사례에서(<표 2>참조) 알 수 있듯이 관료조직은 크게 회의체에 참여하여 결정하는 층과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층의 두 집단으로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그 내부에는 다시 역할이 분담되었을 것이다.377)이를테면<냉수리비>의 典事人 가운데 沙喙 출신의 蘇那支는 동일한 부 출신자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고 喙部 출신자들의 밑에 기록된 데서 그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所敎事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寐錦王이나 葛文王이 회의체 내에서 행한 역할이 같았을 리는 없으므로 그들 간에도 역할에 따른 소구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는 관부조직을 통하지 않고 수시로 필요에 따라 인간 중심으로378)<냉수리비>의 典事人이나<봉평비>의 大人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운영되던 신라 초기 행정조직체계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인간 중심의 행정체계로서는 처리해야 할 사무의 규모가 간단하고 수가 적을 때는 제대로 기능할 수 있지만 그 규모가 크고 복잡하고 다양해지면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5세기 후반 이후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로 전환하면서 행정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게다가 주변세력과의 접촉이 확대되면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빈발하였고 그에 따른 군사적인 수요가 높아졌다. 또한 4∼6세기에 걸쳐 새로운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나 牛耕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면서 경제규모도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379)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李賢惠,<三國時代의 농업기술과 사회발전-4∼5세기 新羅社會를 중심으로->(≪韓國上古史學報≫8, 1991).
全德在,<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사회변동>(≪역사와 현실≫4, 한국역사연구회, 1990).
이에 따라 그를 관리하기 위한 필요에서 기존의 중앙행정조직은 변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정관부가 갖추어지지 않은 채 필요에 따라 인간 중심으로 운영되던 행정조직은 이제 세분화·전문화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부와 관직의 설치로 나타났다.

 중앙관부로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법흥왕 4년(517)의 兵部이며 장관인 병부령은 그에 앞서 같은 왕 3년에 두어졌다. 이후 점차적인 과정을 밟아 여러 중앙의 행정관부와 관원이 증치되어 갔으며 하나의 완성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는 것은 神文王 5년(685)에 이르러 각 관부를 令-卿-大舍-舍知-史의 5등관제로 갖추면서부터이다.380)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震檀學報≫25·26·27, 1964;≪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54쪽)
井上秀雄,<『三國史記』にあらわれた新羅の中央行政官制について>(≪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235∼239쪽 참조.
그런데 통일 이전의 중앙행정관부 설치시기와 그 내용으로 보면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381)李基白,<稟主考>(위의 책), 141쪽.
이 논문에서는 통일기까지를 포함하여 4期로 분류하였으나 여기서는 통일 이후는 논외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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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시기는 법흥왕과 진흥왕대이다. 법흥왕 18년에는 上大等이 두어졌고, 진흥왕 5년(544)에는 관리의 糾察을 담당하는 司正府382)사정부는 태종무열왕 6년(659)에 두어졌으나 이 때에는 장관인 令이 설치된 것이며(李基東, 앞의 책, 124∼125쪽) 그 차관인 卿이 설치된 것은 진흥왕 5년이다.의 차관인 卿 2인, 진흥왕 26년에는 국가 기밀을 총괄하는 執事部의 전신인 稟主에 후일 차관직이 되는383)품주의 전대등이나 사정부의 경도 그 장관인 중시나 령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그 자체가 장관이었음은 물론이다. 후일 그 위에 상급관직이 두어지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차관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典大等 2인이 두어졌다. 이렇게 보면 이 시기에는 하부관원이 없는 상대등을 일단 논외로 하면 병부에만 장관인 령이 두어졌고 나머지는 뒷날의 차관직을 최고관원으로 한 셈이다.

 병부의 관원 설치를 보면 大監은 진평왕 45년(623), 弟監은 11년, 弩舍知와 弩幢은 文武王 12년(672)이나 5등관인 史의 설치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사는 법흥왕 4년 병부의 설치와 함께 두어졌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법흥왕 3년에 병부령이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4년에 다시 병부를 설치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사의 설치 외에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감이 설치되는 진평왕 11년 이전까지 병부는 令과 史 두 관원으로 구성된 셈이다.

 품주와 사정부도 그에 준하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령 품주의 후신인 집사부의 구성관원의 설치 연대를 보면 장관인 中侍는 진덕왕 5년(651), 대사 2인은 진평왕 11년(589), 사지 2인은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되었고 5등관인 사의 설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하나의 관원으로 관부가 구성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384)井上秀雄, 앞의 책, 278쪽에서는 당시의 관부에는 장관만이 존재하여 단독으로 직무를 수행하였고 필요시 귀족의 家臣이 일을 처리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는 하급실무자의 설치 연대를 늦게 잡았던 데서의 추정이었다. 전대등이 설치되던 진흥왕 26년(565)에는 사가 함께 두어져 품주란 관부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조롭다.

 이상과 같이 보면 첫째 시기에는 병부·품주·사정부 등 3개 관부가 설치되었으며 관원구성이 장관(차관)과 실무자의 이원체제로 된 것이 특징이었다. 병부령 1인이 진흥왕 5년 증치된 뒤에는 장관 2인과 복수의 실무자가 기본적인 관원구성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냉수리비>와<봉평비>에 보이는 此七王-典事人, 所敎事-大人이란 2원적인 체계와 지극히 유사하다. 아마도 앞선 시기의 그와 같은 이원적인 운영체계가 관부의 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이 시기의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병부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이다. 품주와 사정부는 그 장관의 격이 현저하게 차이가 났던 점으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병부에 예속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품주는 租調의 출납을 관장하였을 터이지만 이는 지방조직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지방을 관장한 병부를 매개하지 않고서는 품주의 존립은 불가능하였다. 한편 사정부의 감찰대상이 되는 관리란 지방관과 군관을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병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품주와 사정부의 관원이 병부에 미치지 못하는 조직을 갖추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데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병부가 행정관부의 중심에 놓였던 것은 신라의 성장과 발전이란 당시의 대내외적인 사정에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고 하겠다. 설치 연대가 명시되어 있는 大官大監(진흥왕 10년)·弟監(진흥왕 23년)·監舍知(법흥왕 10년)·少監(진흥왕 23년)·軍師幢主(법흥왕 11년) 등의 軍官이 모두 이 시기에 설치되는 것도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둘째 시기는 진평왕대이다. 먼저 이 시기에 새로이 설치된 관부를 보면 재위 3년(581)에 관리의 관등을 담당하는 位和府, 6년에는 貢賦를 담당하는 調府와 馬政·車乘을 담당하는 乘府, 8년에는 儀禮와 敎育을 담당하는 禮部가 두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부들도 역시 설치 당시부터 완성된 조직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위화부는 관부조직이 완성된 후에도 독특하게 衿荷臣·上堂·大舍·史의 4등관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금하신과 상당은 신문왕대에 두어졌다고 하며385)≪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位和府. 대사와 사의 설치 연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위화부가 창설된 진평왕 3년에는 일단 대사와 사로 구성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조부에는 진평왕 6년 장관인 령 1인을 두었으며 진덕왕 5년(651)에 장관 1인을 증치하면서 3등관인 대사 2인을 두었고, 4등관인 사지 1인은 신문왕 5년(685)에 두었다. 차관인 경 2인과 5등관인 사 8인의 설치시기가 보이지 않는데 경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으나 실무자인 사는 조부의 설치시기에 령과 함께 두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경은 예부처럼 진덕왕 5년에 두어진 것으로 보인다.

 예부는 장관인 령 2인이 진평왕 6년에 두어졌으나 경과 대사는 진덕왕대에, 사지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신문왕대에 두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는 진덕왕 5년에 3인이 증치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보다 앞선 시기에는 8인이 있었는데 아마도 장관과 같은 시기에 두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예부는 진평왕대에 령 2인과 사 8인으로 구성되었다고 하겠다. 승부는 령 1인이 이 때에 두어진 것으로 되어 있을 뿐38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6년조에는 령이 1인 두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직관지에는 2인이 두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해에 설치된 조부의 경우를 참조하면 전자가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다른 관원들의 설치는 불명이나 비슷한 시기에 설치된 예부와 조부에 준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과 같이 보면 진평왕대 초에 설치된 4개의 관부 가운데 대사와 사로 구성된 위화부만은 극히 예외적이며, 조부·예부·승부의 관원은 모두 영과 사의 이원적인 체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병부의 관원조직을 모방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앞선 시기에 두어진 품주와 사정부가 2원적인 구성을 가졌으나 령이 없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제 병부에 버금가는 조직을 가진 관부가 두어진 것으로서 그 자체 큰 변화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시기 관부의 관원은 모두 2원적인 구성을 하였으면서도 令과 史, 卿(전대등)과 史, 大舍와 史의 3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겠다. 이는 당시의 행정적인 중요도에 따른 구분에 의해서였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관원 구성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점차 2등관 체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3등관인 弟監이 眞平王 11년(589)에 두어짐으로서 병부가 가장 먼저 3등관체제로 전환하였다. 같은 해에는 품주에도 역시 3등관인 대사가 두어졌다. 이는 전통적인 2등관체제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관부조직상의 일대 변화라 할 만하다.

 그와 관련하는 것이지만 이 때에 처음으로 部나 府에 예속하는 屬司가 두어지는 점도 주목된다. 속사로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진평왕 5년 병부에 두어진 船府署로서 여기에 대감과 제감을 각각 1인씩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속사 설치의 효시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 46년에는 賞賜署와 大道署가 설치되었다. 대도서는 예부의 속사이며 상사서는 倉部(府)의 속사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아직 창부가 품주에서 분화되어 독립하기 이전이므로 상사서는 사실상 품주의 속사로 성립하였다가 후일 창부가 독립되면서 그 곳으로 이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면 속사는 당시 핵심이 되는 부서로서 병부·예부·품주의 셋에 두어진 셈이다.387)외빈을 담당하는 領客府의 경우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에 의하면 영객부는 원래 倭典이었는데 진평왕 43년(621)에 개칭하였다고 하며 장관인 令 2인은 진덕왕 5년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新羅本紀 4, 진평왕 13년(591)조에는 이 때에 영객부령 2인을 둔 것으로 되어 약간의 착오가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관부들이 진평왕대 전반과 후반에 각각 변화가 있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진평왕대 후반의 관부 설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병부에 제2등관인 대감이 설치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병부가 처음으로 령-대감-제감-사의 4등관제 조직을 갖추게 되었거니와 이것이 典範이 되어 진덕왕대에는 다른 관부도 모두 4등관제로 일시에 전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부조직의 정비는 병부가 선도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진평왕대의 관제개혁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왕실 궁중사무를 전담하는 內廷官府가 분치되는 점이다. 진평왕 7년(585)에 大宮·梁宮·沙梁宮에 각각 私臣을 두었다가 같은 왕 44년에 이들을 통합하여 內省私臣을 두었다는 것이다.388)內省의 조직과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三池賢一,<新羅內廷官制考>上·下(≪朝鮮學報≫61·62, 1971·1972).
李仁哲,<新羅 內廷官府의 組織과 運營>(≪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이는 진평왕대에 추진된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컨대 진평왕대의 관제개혁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전반부에는 기존의 병부조직을 모방하여 예부·조부·승부가 두어지며, 특히 병부의 관원에 3등관이 설치됨으로써 전통적인 이원체제를 벗어나는 실마리가 마련된 점, 속사가 처음으로 두어진 점, 왕실사무가 분리되기 시작한 점에서 주목된다. 이로 보면 진평왕대는 전통적인 체제에 대해 상당한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眞智王이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뒤 그를 이어 즉위한 것도 진평왕대의 관부조직에서 그와 같이 전통적인 체제를 벗어나려는 시도와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진평왕대 후반에는 전반부에 성립된 체제를 보다 강화해 갔던 점이 뚜렷하다. 가장 선도적인 병부에 대감을 설치하여 4등관 조직을 갖춘 점, 병부 외의 다른 관부에도 속사를 둔 점, 왕실사무를 전담하는 내성기구를 설치한 점 등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진평왕대 후반의 관제정비는 전반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이로써 진평왕대에는 6典組織의 기본골격이 갖추어진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평왕대는 관제조직상의 발전기였다고 할 만하다.389)李基白, 앞의 책, 140쪽 참조.
木村誠은<6世紀における新羅骨品制の成立>(≪歷史學硏究≫428, 1976), 22∼26쪽에서 진평왕대의 행정기구 정비를 각 관청간의 분업체계가 확립되는 등 그 나름의 체계가 갖추어지는 시기로 주목하였다. 한편 金瑛河는 진평왕대의 행정제도 정비를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의 완성으로 이해하였다(<新羅 中古期의 政治過程試論>,≪泰東古典硏究≫4, 1988, 17쪽).
행정관부의 정비와 함께 새로운 성격의 군단을 조직한 것도 이 시기의 체제정비와 관련하여 참고가 된다.390)진평왕대에 신설된 군단을 보면 5년 誓幢, 13년 四千幢, 20년 河西州弓尺, 26년 軍師幢, 27년 急幢, 47년 郎幢 등이었다.

 셋째 단계는 진덕왕대이다. 진덕왕대의 관제개혁은 대체로 재위 5년(651)의 1년 동안 일시에 대규모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 동안 관제개혁이 상당히 장시간에 걸쳐 진행된 점을 고려하면 진덕왕대의 관제정비는 짧은 기간에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것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먼저 주목되는 것은 각 관부의 관원을 일률적으로 令-卿-大舍-史의 4등관체제로 정비하였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미 병부가 진평왕 말기에 제일 먼저 4등관제로 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시기 전체 관부에 걸쳐 거의 일률적으로 시행하였던 것은 그를 모범으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때에 품주를 집사부로 개칭하면서 전대등 이하 3등관제의 상위에 중시를 설치하였던 데서 대표되듯이 다른 중요 관부 중에서도 장관이 령이 아닌 경우에는 령을 두어 4등관제로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 2등관인 경이나 3등관인 대사를 두어 관제조직을 완전하게 4등관제로 정비하였다. 한편 주요 관부의 장관이 1인이었던 경우는 1인 더 증치하여 복수제로 하고 倉部나 左理方府와 같은 관부는 새롭게 창치하였다. 이 밖에 國學·音聲署·典祀署 등 속사의 기본 관원들을 둠으로써 업무분장을 보다 강화하였다.

 진덕왕대 행해진 관제정비 가운데 4등관제로의 정비나 속사의 증치 등은 기본적으로 진평왕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주목되는 것은 집사부의 정치적 위상을 높인 점이다. 이는 진덕왕대 관제정비의 방향을 보여 주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원래 집사부의 전신인 품주는 租調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부로서 중고기를 통하여 그 비중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지배의 진전이나 영토의 확장, 그리고 군사상의 목적에서 조조출납의 비중이 점차 커져 가면서 진평왕대에는 거기로부터 調만을 전담하는 조부가 분리되었다가 진덕왕대에 이르러 다시 창부가 분치됨과 동시에 장관으로 중시가 두어졌다. 이로부터 집사부는 조조와는 사실상 상관없이 국가의 機密事務를 총관하는 관부로391)≪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진덕왕 5년. 그 기능이 크게 변하였다.

 그 동안 행정관부가 분산적으로 두어지면서 이를 총관하는 기구는 없었다. 국왕을 대신하여 귀족회의의 주재자로 두어진 상대등이 관제가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관부를 총관하는 기능을 담당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나392)위화부의 장관인 금하신이 다른 관부의 장관과는 달리 伊湌에서 大角干까지 취임할 수 있다는 규정에 착목하여 중고기에 상대등이 위화부의 장관을 겸직하고 이 위화부가 마치 전체 관부를 총관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仁哲,
<新羅 中央行政官府의 組織과 運營>, 앞의 책) 지나친 억측이다.
이제 집사부의 장관을 중시로 삼아 기밀사무를 관장케 함으로써 그 위상을 격상시켜 다른 관부를 총관하게 하였다. 이는 전체 관부의 관원구성을 4등관제로 정비한 사실과 아울러 오래도록 잔존해 온 전통적인 행정체계의 방식을 거의 벗어나 국왕 중심의 권력집중화 시도의 일환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먼저 주요 관부 가운데 집사부만이 장관 단수제를 시행하였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 진덕왕 5년(651)의 시점에서 설치되어 있던 중요 관부의 장관은 거의 복수제이다. 장관을 복수제로 취한 목적에 대해서는 귀족합의제적인 전통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393)井上秀雄, 앞의 글, 266∼267쪽.
李基東, 앞의 책, 136∼138쪽.
단 이기동은 장관 복수제와 함께 兼職制도 합의제적인 운영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신라의 겸직제가 진평왕대에 정착되기 시작하였다는 견해(李文基,<新羅時代의 兼職制>,≪大丘史學≫26, 1984, 16쪽)를 따른다면 오히려 겸직제가 합의제적인 정치운영의 영향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복수의 장관이 일시에 두어진 것이 아니라 그 설치시기가 다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업무분장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394)이를테면 병부령의 경우에는 3인이 두어졌으나 그 설치시기에는 상당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으므로 복수제는 합의제적인 운영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朱甫暾, 앞의 글, 1987, 35∼36쪽). 복수의 장관 설치는 아마도 중요 관부의 과중한 업무를 분담하고 나아가 서로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권한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싶다. 국왕에 직속하는 집사부에는 다른 관부들과는 달리 오히려 장관을 1인만 둠으로써 권력집중을 기하고자 하였다. 이는 국왕을 정점으로 권력을 집중하려는 시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중에는 국왕과 가까운 인물이 임명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그 동안 상대등이 가졌던 지위를 시중이 대신하게 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395)李基白, 앞의 책, 155쪽.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함과 동시에 侍衛府를 둔 것도 그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아는 데 참고가 된다. 요컨대 진덕왕대의 중앙행정 관제개혁은 왕권 중심의 체제강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앞서 선덕왕 16년(647)에 일어났던 상대등 毗曇의 난 후에 이루어진 체제정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평왕(579∼631)과 진덕왕대(647∼653)에는 상당한 관제정비가 이루어졌지만 이상스럽게도 선덕왕대에는 아무런 관제상의 변화가 없다. 이는 선덕왕대(632∼646)가 왕권파와 귀족파 상호간의 견제와 균형이란 특수한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갈등관계가 무너지면서 비담의 난이 발발하게 되고 그 결과 집권한 金春秋의 주도 아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반란의 핵심이었던 상대등에 대신하여 국왕권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구로서 집사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덕왕대의 개혁은 기존의 중고적인 지배질서를 탈피하고 나아가 다가올 국왕 중심의 새로운 중대체제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목적을 둔 개혁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신라의 중앙 관부는 일시에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지배체제가 오래도록 뿌리내려 중앙행정 조직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를 탈피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6, 7세기는 전통적인 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체제를 지향해 간 과도기적인 시기였다고 하겠다.

 진덕왕대까지 정비된 중앙관부의 조직상 특징은 신라적인 독자성을 강하게 내포한 점이다. 군사조직이나 지방통치조직은 將軍이나 軍主·幢主·道使 등의 직명에서 짐작되듯이 신라만의 독특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행정관부는 그 명칭이나 관원구성에서 신라적인 특색을 강하게 지녔다. 물론 병부처럼 부분적으로는 중국적인 요소가 엿보이지만 대부분의 관부는 모두 신라 독자적인 것이라 보아도 좋다.

 중앙행정관부는 크게 部와 府로 나뉘어진다.396)倉部는≪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에는 部로 되어 있으나 9세기의<昌林寺無垢淨塔願記>와<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는 倉府로 되어 있다. 후자에 따르면 직관지의 기록은 착오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部와 府는 전혀 차이가 없이 혼용된 셈이 되며 따라서 실제적인 차이도 없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兵部나 執事部는 모두 금석문상에서도 그대로 되어 있으므로 직관지가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러면 部는 병부·집사부·예부의 3개 관부에 한정되며 이들은 府와 일정한 차별성을 강조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양자의 기능이나 비중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병부·집사부·예부 등 당시로서는 핵심적인 관부들만 部로 하여 나머지 관부와 구분한 것은 部가 府와는 어떤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部와 府 이외에도 典·署·館 등의 관부가 두어졌으나 이들은 설치시기도 늦고 또한 대부분 部·府의 屬司들이었다. 그런데 중고기에는 이들 관부를 총괄하는 관부가 두어지지 않았다. 왕명의 출납 등 기밀을 담당한 집사부는 진덕왕 5년에 두어졌으나 이는 실제로는 중대적인 것이었으므로 중고기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겠다. 그 전신인 품주는 진흥왕대에 설치되었으나 당시에는 차관인 典大等뿐이었으므로 그러한 기능을 하였을 리 만무하다. 이처럼 행정관부를 총관하는 관부가 없었다는 것은 당시 중대한 일들이 합의제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따라서 이들 관부들은 모두 국왕 또는 상대등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해야겠다. 상대등이 그 하부 관원이나 관부가 없는 것도 그와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39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8년조에 上大等을 두고 처음으로 哲夫를 임명하면서 摠知國事하게 하였다는 것은 상대등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그렇다면 상대등의 권한을 계승하였을 시중이 상대등과는 달리 하부조직을 갖춘 관부의 장관이었다는 것은 행정의 집중화가 그만큼 진전되어 관료조직 자체가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중고기의 중앙 통치조직은 대체로 각 관부들이 2등관체제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미숙하였고 그 자체 회의를 통한 합의제적 운영의 전통이 강인하게 존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흔히 장관의 복수제를 그렇게 이해하나 병부령처럼 장관도 설치시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이해는 근본적으로 잘못이며 오히려 겸직제가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복수의 장관은 필요에 따라 증치된 것이며 이는 업무분장을 통한 권력의 분산을 위해서였다고 하겠다.

 한편 중고기에는 중앙의 행정관제보다는 병제와 지방조직이 훨씬 발달하였던 것이 특징이었다.≪삼국사기≫직관지에 기록된 部府 13官司 중 진골만이 취임할 수 있는 장관의 경우 진덕왕 5년(651) 이전에는 상대등 1인, 병부령 2인, 예부령 2인, 조부령 1인, 승부령 2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지방 통치조직이나 군사조직은 훨씬 정비되어 있었다. 이 점은 중고기의 행정조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되어야 할 사항이다. 중고기에는 아직 文官과 武官이 구별되지 않았는데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내용적으로는 문보다 무에 비중이 두어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문과 무를 구별하려는 의식은 통일기에 文武官僚田의 지급에서 그 씨앗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398)文과 武가 점차 구분되기 시작하는 것은 통일기의 정치적인 안정과 그 속에서 군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를 통한 6두품 출신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이 까닭으로 관료조직보다 군공 등 군사적인 것이 승진이나 경제적인 기반의 확보에서 훨씬 우선적인 것이었다. 관제상 군사조직이나 지방제보다 중앙 행정관부의 발달이 뒤늦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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