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2) 군사조직

2) 군사조직

 신라 상고기의 군사조직으로는 6部兵과 지방의 城·鎭에 편성된 병력이 있었다. 6부병은 왕경의 6部人으로 편성된 부대로서 신라 초기의 영토확장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지방의 성·진에도 왕경인으로 편성된 군부대가 주둔하였다. 성·진의 병력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피정복소국의 반란에도 대비하였다.

 성·진에는 왕경인뿐 아니라 지방인으로 편성된 군사조직도 있었다. 奈解王 14년(209)에 왕손 㮈音으로 하여금 近郡 및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阿羅國을 구원하고 浦上八國의 군사를 쳐부수었다고 한 기록은452)≪三國史記≫권 48, 列傳 8, 勿稽子. 지방의 성·진에 주둔한 군대가 지방민으로 편성된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儒禮王 10년(293)에 沙道城을 개축하고 사벌주(상주)의 豪民 80여 집을 옮겼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탈해왕 8년(64) 이후에 왕경에서 출동하는 신라의 군사조직이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2세기 이후 경주지역의 고분에 매납된 무기·武裝의 출토 양상과 대체로 일치한다. 2세기경 경주고분에서 활·鐵矛·鐵鎌·鐵劍·環頭大刀·鐵斧 등과 함께 재갈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3세기경의 정래동 토광묘에서 출토된 短甲은 당시에 신라군이 甲冑로 무장하였음을 보여 주며, 4세기 후반에 鐵製 鐙子와 함께 출토되는 金銅製 갑주와 馬甲冑는 신라에 중장기병이 출현하였음을 알려 준다. 5세기대의 대형 적석목곽분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제·은제·금동제 장신구가 부장되었고, 철제 갑주가 거의 부장되지 않은 대신에 비교적 소형분에만 철제 갑주가 매납되고 있다.453)宋桂鉉,<加耶出土の甲冑>(≪伽倻と古代東アジア≫, 新人物往來社, 1993), 196쪽. 이는 철제 갑주의 사용이 하위신분으로 확산되면서 실용화되었다는 증거이다.

 5세기 중반 이후에는 개마와 기병용 갑주의 무장이 귀족들에게 보편화되고, 보병도 상당수가 板甲으로 무장하였다. 이는 6세기 초에 개마와 기병용 갑주의 무장이 좀더 낮은 신분으로 확대되면서 중장기병부대가 출현하게 된 것을 암시한다. 이 중장기병부대가 지방으로 이동·배치되면서 10정 가운데 伊火兮停이나 音里火停이 되었으며, 단갑으로 무장한 왕경의 보병은 6정 가운데 왕경에 배치된 大幢의 병졸로 편성되거나 지방에 배치된 6정의 군단본부 병력이 되었다.

 5세기 후반 이후에 부산지역에서 출토되는 무기·무장도 이 지역에 보병·기병부대가 편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부산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던 군사력 가운데 기병은 6세기 중반경에 參良火停이나 召參停의 기간병력이 되고, 보병은 양산을 거쳐 창녕으로 이동하여 그 지역의 기존 병력과 합쳐져서 下州停의 기간병력으로 재편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산·대구·칠곡 등지에서 출토되는 무기와 무장은 이들 지역에 보병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보병부대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上州停으로 이동되었을 것이다. 여타 지역의 고분에서도 철촉·철겸·도자·철부 등이 소량씩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성·촌에 편성되었던 농민군사들의 무장상태를 보여 준다.454)李仁哲,<6∼7世紀의 武器·武裝과 軍事組織의 編制>(≪韓國古代史論叢≫7,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5), 38∼45쪽. 6세기 초기에 이루진 法幢의 편성과 6정·10정의 편제는 그 이전에 왕경과 지방의 주요 전략지점에 배치되었던 군사 조직과 성·촌에 편성되었던 농민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라정부는 법흥왕 11년(524)경에 왕경의 6부병을 법당군단 가운데 京餘甲幢으로 편제하여 6畿停에 주둔시켰다. 지방 城鎭의 병력은 外餘甲幢으로 편제했다. 지방의 성촌에 외여갑당이 편성되었음은<단양 적성비>에 보이는 ‘鄒文村幢主’와 ‘勿思伐城幢主’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455)武田幸男,<中古新羅の軍事的基盤-法幢軍團とその展開->(≪東アジア史における國家と農民≫, 山川出版社, 1984), 221∼257쪽. 소경에도 법당을 편성하였는데 이를 小京餘甲幢이라 이름하였다. 이처럼 법흥왕대에 왕경·소경·주·군·성·촌에 편성된 법당의 군관은 왕경인으로 임명되었으며 병졸은 지방의 농민군사들이었다.≪삼국사기≫에 당주 혹은 태수·소수·현령 등이 농민군사를 동원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법당군관이 지방관을 겸직하였기 때문이다. 6정의 군단장인 軍主가 州장관을 겸직하였듯이 법당의 군관 역시 지방관을 겸직하였다.456)李仁哲,<新羅 法幢軍團과 그 性格>(앞의 책), 294∼324쪽.

 법당군단에는 또한 官司守衛의 임무를 맡은 百官幢과 특수 병기를 제작하여 각 부대에 공급하던 四設幢이 속해 있었다. 사설당은 弩幢·雲梯幢·衝幢·石投幢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각기 弩·雲梯·衝車·抛車를 제작하여 각급 부대에 공급했다.457)李仁哲, 위의 책, 292∼294쪽.

 진흥왕 5년(544)에 신라정부는 전국적인 규모로 보병군단인 6정과 기병군단인 10정을 편성하기 시작했다.458)≪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 武官.
末松保和, 앞의 책, 323∼367쪽.
이들 군단의 편성은 6세기 전반 이전에 이미 중앙과 지방에 배치되었던 군사조직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다.≪삼국사기≫직관지 무관조에 따르면, 6정은 大幢·上州停·漢山停·牛首停·河西停·完山停으로, 대당은 진흥왕 5년에, 상주정은 13년에 설치되었으며, 한산정은 본래 新州停이었고, 우수정은 본래 比列忽停이었으며, 하서정은 본래 悉直停이었고, 완산정은 본래 下州停이었다. 신주정은 진흥왕 14년에, 하주정은 16년에, 비열홀정은 17년에 각기 설치되었다.

 하서정은 본시 실직정인데 무열왕 5년(658)에 실직정을 파하고 하서정을 두었다고 전한다.459)≪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 武官.<창녕비>(561)에 우추·실직·하서아군으로 기재된 지역에 하서주가 설치된 시기는 진평왕 20년(598)경이었다. 이 때 두어진 하서정은 선덕왕 8년(639)에 실직정으로, 무열왕 5년에는 다시 하서정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중고기의 보병군단인 6정은 진평왕 20년(598)경에는 그 설치가 완료되었다고 하겠다. 이같은 6정의 설치과정이나 설치 이후의 이동과정은 당시 신라의 영토확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460)6정의 이동과정은 앞에서 언급한 州治의 이동과정과 일치한다. 한편≪三國史記≫무관조의 軍號 六停이 大幢·貴幢·漢山停·牛首停·河西停·完山停만을 가리킨다고 하여 신문왕 5년(685) 이전에는 군호 6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李文基, 앞의 책, 70∼82쪽). 그러나 이 글에서는 6정이란 왕경과 지방의 5주에 보병군단 1개씩을 둔 방위체제라고 보아, 6개 정이 병존한 진평왕 20년(598)경부터 군호 6정이 있어 왔다는 입장에서 통설에 따라 6정을 중고시대의 군사조직으로 설명한다.

 ≪삼국사기≫직관지에는 문무왕 13년(673)에 상주정을 貴幢으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그러나≪삼국사기≫열전에서는 진흥왕 23년(562)에 사다함이 5천 명의 騎兵을 이끌고 貴幢裨將으로 출전했다고 하며,461)≪三國史記≫권 44, 列傳 4, 斯多含·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23년. 진평왕 46년경의 기사에는「상주·하주·귀당·법당·서당」5軍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고,462)≪三國史記≫권 47, 列傳 7, 訥催.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조에도 貴幢摠管과 上州摠管의 임명기사가 앞뒤로 나란히 기재되어 있다. 이는 귀당이 왕경의 귀족들로 편성된 기병부대이며, 진흥왕 23년 이전부터 이미 상주정과는 계통을 달리하여 존속해 왔음을 의미한다. 중고기에 편성된 서당·四千幢·郎幢·罽衿幢 등의 부대와 마찬가지로 귀당은 6정에 포함되지 않는 채로 운영되어 온 부대였던 것이다. 문무왕 5년에 상주와 하주의 땅을 떼어 歃良州를 설치함으로써 상주·하주라는 지명이 사라지게 되었고 백제·고구려 양국의 멸망과 五州誓의 설치(672)로 귀당의 존속 필요성이 줄어들자, 신라정부는 기존의 귀당을 해체하고 문무왕 13년에 종래의 상주정을 귀당이라 고쳐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삼국사기≫직관지의 귀당 관련 기사는 이러한 사정의 결과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대당·귀당·한산정·우수정·하서정·완산정으로 최종 정비된 6정의 군사조직을≪삼국사기≫직관지 무관조를 통해서 보면, 각 군단 조직은 군단본부와 그 지원부대로 편성되었다. 군단본부의 군관 조직은「將軍-大官大監·隊大監-弟監-監舍知-少監·火尺」의 지위 순으로 편제되었다. 군관의 수는 해당 군단의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달리하였는데, 이는 해당 부대의 병졸 역시 군관의 수에 비례하여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6정의 각 군단본부에 소속된 군관과 병졸은 모두 왕경인으로 편성되었다.463)朱甫暾,<新羅 中古期 6停에 대한 몇가지 問題>(≪新羅文化≫3·4, 東國大, 1987), 44쪽.

 6정의 예하 지원부대로는 軍師幢·大匠尺幢·步騎幢·黑衣長槍末步幢이 있었다. 군사당의 군관으로「당주(1)-감(2)-법당화척(5)」을 두었으며, 이들은 왕경인으로 임명되었다. 군사당의 병졸은 6정 주둔지의 성·촌에서 징발된 농민병사로 편성되었다.464)木村誠, 앞의 글, 16쪽. 대장척당은「당주(1)-감(1)」의 군관과 성·촌에서 징발된 지방인 병졸로 편성되었다. 대장척당은 지방의 성·촌에서 축성기술자들을 징발하여 편성한 6정의 기술지원부대였다.465)李仁哲,<新羅骨品體制社會의 兵制>(앞의 책, 1993), 331쪽.
朴南守,≪新羅手工業史≫(신서원, 1996), 149∼156쪽.

 보기당은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군관은「당주-감」으로 조직되었는데, 대당과 한산정에 배정된「당주-감」은 각기 6명씩이고 여타 정에는 4명씩이 배정되었다. 흑의장창말보당에 대해서는≪삼국사기≫에 대당 30인, 귀당 22인, 한산정 28인, 우수정 20인, 완산정 20인 등으로 당주의 숫자만 전하고 그 아래 군관직의 숫자는 전하지 않는다. 그 명칭으로 보아 흑의장창말보당은 검은 옷에 긴창을 든 보병부대였다. 보기당과 흑의장창말보당의 군관과 병졸은 모두 왕경인이었다.

 법당군단과 6정군단 이외에 신라 중고기에 전국적인 규모로 편성된 기병군단으로 10정이 있었다. 10정군단은 기병부대인 10정과 그 예하 지원부대인 三千幢으로 조직되었다. 10정은 音里火停(현 경북 상주 청리면)·古良夫里停(현 충남 청양 청양면)·居斯勿停(현 전북 임실 청웅면)·參良火停(현 경남 밀양 삼량진)·召參停(현 경남 함안 죽남면)·未多夫里停(현 전남 나주 남평면)·南川停(현 경기도 이천 읍내면)·骨乃斤停(현 경기도 여주)·伐力川停(현 강원도 홍천)·伊火兮停(현 경북 청송 안덕면) 등 모두 10개 기병부대로 조직되었다.466)安鼎福,≪東史綱目≫권 3 上.
末松保和, 앞의 책, 360쪽.
金崙禹,<新羅十停과 所在地名 變遷考>(≪慶州史學≫7, 1988), 21쪽.
10정의 각 부대는「대대감(1)-소감(2)-화척(2)」의 군관으로 조직되었고 그 병졸은 4두품 이상의 왕경인으로 편성되었다.467)李仁哲, 앞의 책, 382쪽.

 ≪삼국사기≫직관지에는 10정이 진흥왕 5년(544)에 모두 설치되었다고 전한다. 5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마구와 기병용 갑옷과 투구가 6세기 중반경에 기병군단이 창설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5년경에 10정이 동시에 모두 창설된 것은 아니었다.

 고량부리정·거사물정·미다부리정 등 3개 정은 당시에 백제의 영역 안에 있었고, 오늘날 경기도 지역에 설치되었던 남천정과 골내근정은 新州가 두어진 진흥왕 14년 이후에, 강원도 지역에 설치되었던 벌력천정은 비열홀주가 두어진 같은 왕 17년 이후에나 편성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0정은 진흥왕 5년에 음리화정·삼량화정·소참정·이화혜정 등 4개 정이 창설되고, 17년경을 전후하여 남천정·골내근정·벌력천정 등 3개 정이 설치되었으며, 백제영역을 거의 장악한 문무왕 5년(665)경에 나머지 고량부리정·거사물정·미다부리정 등 3개 정이 두어짐으로써 그 설치가 완료되었다고 하겠다. 10정 역시 6정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영토확장 과정에 비례하여 설치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는 10정이라는 기병군단이 신라의 삼국통일 달성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삼천당은 10정의 예하 지원부대였기 때문에 10정의 주둔지에 배치되었다. 삼천당의 군관은 주둔지별로 당주와 감이 각기 6인씩이고 병졸이 각기 15인이다. 9세기 초에 경주<高仙寺 誓幢和尙碑>에 비문을 새긴 인물이 ‘음리화삼천당주’였다고 한 기록,468)<高仙寺誓幢和尙塔碑>(≪朝鮮金石總覽≫, 1919), 41∼43쪽.
<新羅誓幢和尙碑新片>(黃壽永 編,≪韓國金石遺文≫, 1985), 72∼74쪽.
<崇福寺碑>에 보이는 ‘삼천계를 망라하여 경계를 삼으며 5백 년을 셈하여 한 봄으로 삼는다’는 구절,469)<崇福寺碑>(≪朝鮮金石總覽≫), 123쪽. 승려였던 驟徒가 병부에 나아가 삼천당에 속하기를 청하고 전쟁터에 나아가서 힘껏 싸우다 죽었다는 기록470)≪三國史記≫권 47, 列傳 7, 驟徒. 등은 삼천당이 자원하여 종군한 僧兵으로 편성된 부대였음을 알려 준다. 각 부대에 병졸이 15인에 불과하고 대나마 이하의 관등을 소지하였다는 사실도 삼천당이 일반 양인을 편성해 넣은 부대가 아니라 자원한 승병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삼천당은 진평왕대에 10정의 예하 지원부대로 창설되었다. 삼천당이 모두 설치된 시기는 10정과 마찬가지로 문무왕 5년경이었다. 新三千幢이 문무왕 12년과 16년에 창설된 사실은 舊三千幢과 10정이 그 이전에 설치가 완료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신삼천당은 外三千이라 하여 우수주(춘천)·奈吐郡(제천)·奈生郡(영월)에 편성되었다. 삼천당이 10정의 주둔지에 편성되고 신삼천당 역시 지방에 배치된 점을 고려하면 진평왕 13년(591)에 창설된 四千幢은 왕경에 편성된 승병부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언급한 부대 이외에 삼국통일 이전에 설치된 군사조직으로 侍衛府·罽衿幢·二罽幢·二弓·誓幢·郎幢 등이 있었다. 시위부는 진평왕 46년에 창설되어 신문왕 원년(681)에 최종 정비된 부대로 궁성의 숙위와 국왕의 호종 및 경호를 담당하였다.471)李文基, 앞의 책, 149∼175쪽.

 계금당은 무열왕 원년(654)에 창설된 기병부대로서「대대감(1)-제감(1)-감사지(1)-소감(1)-화척(7)」의 군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계금당은 왕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병부대였다. 이계당은 外罽라고도 하는데, 한산주 계당은 문무왕 17년에, 우수주 계당은 문무왕 12년에 창설되었다. 무열왕 7년에 罽衿卒 宣服이 급찬의 관등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계금당과 이계당의 병졸이 4두품 이상의 기병으로 편성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궁은 外弓이라고도 하며 漢山州弓尺은 진덕왕 6년(652), 河西州弓尺은 진평왕 20년에 각각 창설되었는데 활을 주무기로 하는 부대였다. 서당은 진평왕 5년, 낭당은 7년에 창설되었다. 서당은 문무왕 12년에 綠衿誓幢으로, 낭당은 17년에 紫衿誓幢으로 재편되어 9서당에 편입되었다. 재편된 9서당의 조직을 통해 서당과 낭당은 보병·기병으로 편성된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군사작전의 수행은 기본적인 군사조직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왕경·소경·군·성·촌(혹은 현)에 편성된 법당은 해당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軍主(뒤에는 都督)라 하더라도 왕의 명령없이는 군·성·촌의 법당을 함부로 이동시키거나 출동시키지 못했다. 군주의 병력 동원은 6정 군단의 자체 병력과 주치에 편성된 법당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는 6정의 군단장인 군주는 군·성·촌의 법당을 모두 동원하여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신주군주였던 金武力이 삼년산군의 병력과 합세하여 管山城전투에서 승리했던 일이나 금산당주 奚論이 한산주도독 邊品과 함께 백제의 枷岑城을 빼앗은 일이 여기에 속한다.472)≪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5년·권 47, 列傳 7, 奚論.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行軍을 편성하였다. 무열왕 7년(660) 및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과 8년 6월 21일에 있었던 複數의 行軍摠管 임명기사는 광역주를 단위로 편성된 행군조직의 장군 임명기사였다. 행군조직에는 왕의 명령에 따라 6정의 병력뿐 아니라 10정과 법당의 병력도 편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문무왕 8년 6월 21일 대당총관에 임명되었던 仁問과 天存 그리고 한성주행군총관에 임명되었던 都儒가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22일에 一善州 등 7郡과 漢城州兵馬를 통솔하였던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같은 행군조직은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편성된 임시 군단으로 전쟁이 끝나면 해체되었다. 그러나 행군조직 속에 편제된 6정·10정·법당 등의 군단은 鎭軍組織으로서 일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계속 작전을 수행하였다.473)李仁哲, 앞의 책, 340∼344·361∼366쪽.

 이상과 같은 군사조직의 편성과 군사작전의 수행과정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보면 매우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군사조직의 편성과 배치가 이루어지고 작전이 수행되었으며,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시점에서 군사조직의 양적 팽창이 최고조에 달하였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당시인들의 치밀성과 열정이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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