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3) 교통로 개척과 성곽시설

3) 교통로 개척과 성곽시설

 교통로란 사람과 車馬가 왕래하는 길이다. 생산의 지역적 전문화가 이루어져 잉여생산이 증대되면 물자가 교역되게 된다. 물자를 교역하기 위해서는 교통로를 개척해야 한다. 그러나 교통로 개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일정한 넓이로 먼 길을 평탄하게 다듬어야 하며,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에 각종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인명을 보호해야 하고, 그러한 교통로의 개척이나 교역체계를 반대하는 소국들의 무력행사도 막아내야 했다.

 교통로는 물자의 교역만을 위해서 개척되는 것은 아니다. 이웃 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교통로가 개척되기도 하며, 정복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수단으로 교통로를 개척하기도 한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교통로 역시 물자교역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소국을 정복하고 그 정복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나아가 지방 행정단위로 편제하여 각종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여 운반해 오기 위해 개척되었다.

 철생산을 기반으로 국력을 증대시킨 신라는 주변 소국들을 정복해 나아가게 된다. 이웃 소국의 정복은 해당 소국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그 다음 소국을 침략하기 위한 교통로 개척의 발판이 되었다. 이에 초기 신라가 주변의 소국을 정복해 나아간 방향에 따라 당시의 교통로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경주를 출발점으로 하여 음즙벌국(안강)·실직국(삼척)으로 통하는 길, 우시산국(울산)·거칠산국(동래)으로 통하는 길, 이서국(청도)·비지국(창녕)·초팔국(합천군 초계)에 이르는 길, 압독국(경산)·다벌국(대구)에 이르는 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천의 골벌국과 의성의 소문국을 제외한 오늘날 경북지역의 낙동강 以東에 있던 소국들을 모두 정복하게 된 신라는 낙동강을 이용하거나 그 동쪽 강변을 따라 문경·영주까지 북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74)安春培,<신라와 가야의 土器>(≪韓國古代史論叢≫ 3, 1992), 278쪽. 이러한 교통로 개척의 연장선상에서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에 雞立嶺(문경 조령)을 열었고, 그 5년에 竹嶺을 열었다. 여기서 ‘열었다’는 의미는 이들 두 고개의 통행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존세력으로부터 신라가 통행권을 쟁취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475)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一潮閣, 1984), 189쪽.
朱甫暾, 앞의 책, 14쪽.
벌휴왕 2년(185)에 소문국을 정복하자, 영천의 골벌국은 조분왕 7년(236)에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로써 경주에서 영천-의성-안동-영주-죽령에 이르는 길이 원활하게 되었다.476)≪三國史記≫권 3, 소지왕 22년조에는 소지왕이 古陁郡(안동)을 거쳐 㮈已郡(영주)에 여러 차례 다녀온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분왕 2년에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여 감문국(김천)을 정복하고 첨해왕대에 사벌국(상주)을 점령함으로써 신라는 진한 12국의 정복을 완료한다. 감문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천-경산-대구까지 이른 길이 김천-금돌성(상주 모동)으로 연장되어 마한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새로 열리게 되었고,477)鄭永鎬,<尙州방면 및 秋風嶺 北方의 古代交通路 硏究>(≪國史館論叢≫16, 國史編纂委員會, 1990), 209∼245쪽. 사벌국의 점령으로 영천-대구-선산-상주-문경-조령(혹은 상주-보은-청주)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원활히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478)申瀅植, 앞의 책, 198∼200쪽. 이들 교통로 이외에도 정복된 소국과 소국을 연결하는 교통로도 개척되었다.

 교통로 개척은 국가권력의 지방 침투를 용이하게 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중앙집권국가의 출현을 촉진하였을 뿐 아니라 각종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신라에 복속되었다가 다시 반기를 들었던 실직국·압독국·사벌국 등이 곧바로 신라군에 진압되고 그 지배층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진 것도 신라군이 개척된 교통로를 따라 신속히 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척된 교통로는 국왕의 지방 순행, 조세·공물의 운반, 교역 물자의 수송, 병력 및 역역에 동원된 장정의 이동 등에 이용되었다. 물자와 인원의 유통이 활발하게 되자, 소지왕 9년(487)에는 사방에 郵驛을 두고 官道를 수리하였다. 이 우역은≪삼국사기≫권 37,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보이는 5門驛 가운데 兌門驛(西方)을 제외한 나머지 乾門驛·坤門驛·坎門驛·艮門驛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문역은 역시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보이는 5通 가운데 4통의 官道와 각기 연결되었다. 건문역(西北方)은 北傜通, 곤문역(西南方)은 東海通, 감문역(正北方)은 鹽池通, 간문역(東北方)은 北海通으로 나아가는 출발기점이었다. 5문역이나 5통의 이름은 신라통일기에 붙여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역이나 관도 자체는 소지왕대에 이미 정비되어 있었다.479)井上秀雄,<新羅王畿の構成>(≪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399∼405쪽. 海南通은 井上의 연구에서 兌門驛을 출발하여 가야지역을 거쳐 남원-광주-나주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바, 가야세력을 정복하지 못했던 소지왕대에는 이 교통로가 개척되지 않았다고 보아진다.≪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의 京都驛은 5문역을, 권 39, 志 8, 職官 中의 尻驛典은 왕궁 부근의 驛亭을 관리하는 관서로 생각된다. 지방에도 우역이 있었는데, 屈井驛(울산?)(≪三國遺事≫권 3, 塔像 4, 靈鷲寺)·褥突驛(충주)(≪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8년 10월 25일) 등이 그것이다. 관도의 정비로 물자 유통이 더욱 활발해지자 신라정부는 소지왕 12년에는 서울에 시장을 개설하고 사방의 화물을 통하게 하였다. 지증왕 6년(505)에 주군제를 실시하게 된 것도 관도의 수리로 국가 권력의 지방침투가 그만큼 더 용이해져서 지방관의 파견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6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교통로 개척이 더욱 확대되었다. 가야의 멸망으로 울산-부산-김해-함안-진주 일대로 진출하는 길(동해통)과 창녕-초계-합천-거창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480)申瀅植, 앞의 책, 201쪽.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멀리 함흥일대까지 진출함으로써 이들 지역으로 통하는 길도 열렸기 때문이다. 신라가 조령을 넘어 충주-여주-이천-용인-수원-남양만(당항성)으로 통하는 길(북요통)을 개척한 시기도 6세기 후반이었다. 경주에서 출발하여 영덕-울진-삼척-강릉에 도달했던 교통로(북해통) 역시 속초-고성-안변-원산-함흥까지 연장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교통로 개척이 더욱 확대되어 경주-청도-합천-남원-순창-나주에 이르는 길, 경주-대구-고령-거창-육십령-전주에 이르는 길, 경주(兌門驛)-양산-창녕-합천-거창-남원-무주-나주(海南通),481)井上秀雄, 앞의 책, 401쪽. 경주-대구-김천-상주-대전-공주-부여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통하는 교통로도 개척되었다. 문무왕 2년(662)에 김유신 등이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고 한다.482)≪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2년 정월. 경주에서 출발하여 안동-죽령-원주-포천-신계-수안 등을 거쳐 평양에 도달했을 이 길(염지통)은 상당히 넓었던 모양이다. 우마차 하나에 13석씩 싣고 간 셈이니 우마차의 크기가 요즘과 별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의 관도는 대체로 우마차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며, 큰 관도는 마주 오는 우마차가 비켜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렇게 개척된 교통로는 신라군의 공격로였기도 하지만 적군의 침투로도 되는 만큼 주요 전략적 지점에는 성곽시설이 만들어졌다.≪삼국사기≫기록을 통해서 삼국시대에 신라가 축조한 성곽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숫자는 100개 정도이고, 실제 답사를 통해 확인한 성곽의 숫자는 그보다 많아서 대략 160개소로 파악되고 있다.483)朴方龍,<都城·城址>(≪韓國史論≫15, 國史編纂委員會, 1985), 337쪽. 한편 이 글에 제시된 성곽은≪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과 井上秀雄이 작성한<朝鮮城郭一覽>(≪朝鮮學報≫103·104·107, 1982·1983), 그리고 여타 성곽 관련 논문 및 조사보고서를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신라의 도성은 왕경을 둘러싼 長城이 별도로 축조되지 않고, 동에는 명활산성, 서에는 서형산성, 남에는 남산신성이 있어서 주위의 산성이 羅城의 역할을 하였다. 왕성인 月城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으로는 남산신성·서형산성·명활산성·경주남고루·도당산성·남산토성·고허성·부산성·귀성·작성·양동리성 등이 있었다.484)李元根,≪三國時代 城郭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80), 340∼386쪽.
朴方龍, 위의 글, 338∼387쪽.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말갈이나 고구려를 막기 위해 쌓아 놓은 성곽으로는 봉화의 도심리성, 청송의 상의동성과 주왕산성, 영덕의 주응동산성(달노산성)·축산동성, 영일의 남미질부성·북미질부성·성황동성·토성동성·장기목장성·문성산성·고읍성 등이 있다.≪삼국사기≫에는 소지왕 3년(481)에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狐鳴城(청송 호명산) 등 7성을 취하고 彌秩夫(영일)로 진군하였다가 신라·가야·백제군에게 격퇴되었다고 하였으며, 지증왕 5년(504)에 波里(삼척)·彌實(영일)·珍德·骨火(영천) 등에 12성을 쌓았다고 하여, 당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고구려·말갈(동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영일지역에 쌓은 성들은 고구려·동예 세력뿐 아니라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격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왜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성곽으로는 울주의 강양리성·문수산성·언양읍성·천전리성(大甑山城), 양산의 순지리토성485)沈奉謹,≪梁山 蓴池里土城≫(東亞大博物館, 1983).·양산읍성·북부동산성·신기리산성·단조산성, 부산의 토성동성·배산성·금정산성이 있다. 부산과 양산지역의 성곽들은 김해의 금관가야를 압박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영주-안동-의성-군위-영천-경주로 통하는 교통로상에도 많은 성곽들이 자리하고 있다. 즉 영주의 죽령고관성·상을곡성, 안동의 상리동성, 의성의 치선동성·병방동성·수정동성·봉양동성·마령산성, 군위의 지곡성·하곡동성·성령산성·효령면성·팔공산성·읍내동성, 영천의 계지동성·치산동성·화남동성·연정동성·관기동성·당지동성·가산동성·금대동성·대의동성 등이 그것이다. 이들 성곽 중에는 의성의 수정동성(소문국 시기에 축성)처럼 진한 소국단계의 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신라에 점령된 후에는 이들 성곽이 죽령을 넘어 경주 방향으로 침투해 오는 고구려와 동예의 방어에 이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달성·대구·경산지역에도 많은 성들이 분포하고 있다. 달성의 문산동성 등 10개 성, 대구의 달성·봉무동토성·용암산성·용두산토성·침산산성·검단동토성·노곡동산성, 경산의 용산성·미산동성·압량면성·내동성·구일동성·장산성 등이 그것이다. 이들 성곽 중에도 진한 소국단계에서 축성된 성곽도 있지만, 이들 성곽 역시 신라에 점령되었을 초기에는 가야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백제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칠곡·금릉·상주지역에 있는 성곽들은 주로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들이다. 삼국시대의 성곽으로는 칠곡의 관호동성·천생산성, 금릉의 동부동성·취적산성·속문산성(감문국 궁궐지)·교리성, 상주의 자산산성·병풍산성·금돌성·답달성·화달리성486)鄭永鎬,≪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檀國大博物館, 1969). 등이 있다. 문경에는 마고산성·명전리성·상촌리성·노고성·노모산성이 있고, 예천에는 매곡성·어림성·원산성이 있는데, 이들 성곽들은 백제 혹은 고구려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되었을 것이다.

 청도·창녕·밀양지역에 있는 성곽들은 신라에 점령되었을 초기에는 가야세력의 방어에, 나중에는 백제의 침략 방어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도지역에는 仇刀城·率伊山城·驚山城·烏刀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487)≪三國史記≫권 34, 志 3, 地理 1 良州 大城郡. 구도성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비정이 어렵다. 청도지역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으로는 오례산성(仇刀城)·이서국읍성(토성)·백곡산성(이서국 궁터)·주구산성·성마루성·봉화성·성뚝산성·간미산성 등이 있다. 창녕에는 목마산성·화왕산성·신당산성·영취산성이 있고, 밀양에는 추밀화성·철마산성·백마산성이 있다.

 경남 해안지역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곽이 26개 정도 있다. 이 가운데 신라가 축조하였음이 분명한 성곽은 진해의 배산성·귀산성,488)沈奉謹,≪鎭海 龜山城址≫(東亞大博物館, 1984). 거제의 아주성, 진주·진양의 덕계산성·죽방산성, 하동의 고소성, 함안의 봉산성 등이다. 합천·산청·함양·거창 등 경남 내륙지역에는 삼국시대의 성곽 12개가 있으며 그 중에 신라가 축조한 성곽은 합천의 대야성와 함양의 팔량현고루 등 2개이다. 그 외에 연대미상의 성곽이 38개가 있다. 경북의 고령·성주 지역에도 삼한시대 성곽이 3개, 연대미상의 성곽이 19개가 있다. 이들 연대미상의 성곽 가운데 신라가 축조한 성곽이 다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489)진평왕 46년(624)에 速含(함양)·櫻岑·岐岑·烽岑·旗懸·穴柵 등 6성을 구원하러 간 신라군이 백제군의 공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하고 다만 부근에 6성을 쌓고 왔다고 한다(≪三國史記≫권 47, 列傳 7, 訥催). 이 사료는 이 일대에 12개 이상의 신라 성곽이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충청도·경기도·강원도·함경도지역에도 신라가 축조한 성곽들이 있다. 충청북도지역에 있는 신라의 성곽들은 보은의 삼년산성(오정산성)과490)成周鐸,<新羅三年山城硏究>(≪百濟硏究≫7, 忠南大, 1976), 131∼160쪽. 함림산성(노고성, 백봉산성), 옥천의 굴산성(산계리 토성), 청원의 일모산성(연산성, 양성산성)과 낭성산성, 단양의 적성산성·온달성(성산성)과 공문성, 하늘재의 차단성, 중원의 야문성 등이 있다.491)李元根, 앞의 글, 387∼466쪽. 다만 온달성은 고구려계로 축조된 이후 다시 신라식으로 개수가 이루어진 성곽이라 한다.492)車勇杰,<竹嶺路와 그 부근 嶺路沿邊의 古城址 調査硏究>(≪國史館論叢≫16, 1991), 302∼312쪽.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점령하기 이전 단계에 축조된 성곽을 신라군이 개수하거나 혹은 개수의 필요성이 없을 경우에는 기존 성곽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리라는 점을 상정하게 한다.

 강원도지역에는 춘천의 삼악산성·산천리성, 횡성군의 덕고산성, 철원의 토성리토성, 양구의 비봉산성, 강릉의 예국토성·장안성, 삼척의 갈야산고성 등 신라가 점령하기 전에 축조된 성들이 있고 그 외에 축성 연대를 알 수 없는 성들이 많이 있다. 자비왕 11년(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성을 침습하였다고 하고, 9월에 하슬라인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니하에 성을 쌓았다고 하며, 지증왕 5년(504)에 파리(삼척)·미실(흥해) 등에 12성을 쌓았다고 전하는 사실에 주목하면493)≪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자비마립간 11년·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5년. 강원도지역에도 신라가 많은 성곽을 축조하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동예가 축성한 기존의 성곽을 이용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창녕비>에 나오는 碑利城으로, 이 성은<廣開土王陵碑>에도 보이는 바 동예가 축성한 성을 신라가 이용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라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함경도지역에도 성곽을 축조하였다. 함경남도 홍원의 성령산성, 함주의 오로리산성, 정평의 봉대산성, 북청의 다탄대산성, 이원의 율지산성 등이 그것이다.494)朴方龍, 앞의 글, 370∼372쪽.

 경기도지역에 신라가 축성한 성곽은 여주의 신지리성, 하남의 이성산성, 광주의 남한산성, 안성의 금산산성 등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이들 성곽 외에도 백제가 축조한 성곽이 많이 있고, 고구려가 축조한 성곽도 있다. 이들 성곽은 대부분 신라에 점령된 후에 신라군에 의하여 이용되었다.495)≪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진평왕 25년·선덕왕 7년 및 11년·태종무열왕 8년.

 성곽시설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초기단계에는 토성 또는 목책성이 축조되었다. 주로 하천을 낀 낮은 구릉지에 소규모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성벽 속에 잡석을 넣어 다지는 石心土築한 토성이 많다. 석축성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5세기 후반 이후이며,496)朴方龍, 앞의 글, 387쪽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는 외벽 기단 보축이 행해지고, 6세기 중엽 이후에는 기단외면 보축이 행해졌다.497)朴鍾益,<古代山城의 築造技法에 대한 硏究>(≪嶺南考古學≫15, 1994), 115∼168쪽.
高正龍,<韓國古代山城>(≪古代文化≫47-12, 1995), 715∼716쪽.
7세기경부터 해발 400m 이상의 고지에 산성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대체로 고지에 입지한 이 시기 성곽의 규모는 성벽 길이 2km 이상인 대규모 성곽이 주류를 이루었다.

 성곽은 주요 교통로에서 가까우며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험준한 지형을 택하여 최소한의 工力으로 守城과 攻城에 유리하도록 축성하였다. 경사도가 심한 낭떠러지가 있는 곳은 처음부터 축성하지 않았으며, 큰 바위가 있는 곳은 바위 옆과 위로 성돌을 쌓아 그대로 성벽이 되게 하여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였다.498)朴方龍, 앞의 글, 388쪽.

 신라의 성곽은 대부분 전투용 방어시설이었으며, 전쟁시에 인근 주민들이 모여 적에 항쟁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다.499)李宇泰, 앞의 글, 88쪽. 신라 초기에 지방의 주요 성곽에는 성주가 이끄는 戍卒이 주둔하였다.500)浜田耕策,<新羅の城村設置と州郡制の施行>(≪朝鮮學報≫84, 1977), 8∼9쪽. 6세기 초반 이후에 변경과 內地의 수많은 성곽을 지킨 병력은 法幢에 편성된 농민군사들이었다. 6정과 10정은 주요 전략지점에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신라정부는 지방의 성곽에 지방관을 겸한 법당군관을 파견하여 해당 지역의 농민들로 법당을 편성하고, 이들이 적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에 6정·10정 등의 병력을 출동시켜 적을 격퇴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501)≪三國史記≫권 47, 列傳 7, 奚論 및 訥催.

<李仁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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