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
  • 1) 농업
  • (2) 수전의 확대

(2) 수전의 확대

 水田의 입지조건은 배수와 관개시설의 축조, 그리고 토목기술의 수준 정도에 따라서 변화한다. 비교적 철기의 보급이 미약하였던 삼국 초기에는 급수가 용이한 저습지에 수전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4세기 초 이후 철제 토목공구와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면서 수전도 점차 저습지에서 半濕田·半乾田·乾田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삽과 가래 등의 보급은 비교적 규모가 큰 저수지나 제방의 축조를 가능케 만들면서 그러한 현상을 촉진시켰다.

 먼저 訖解尼師今 21년(330)에 둑의 길이가 1,800步인 碧骨堤를 개축하였다고 전한다.514)≪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흘해니사금 21년. 오늘날 벽골지가 전라북도 김제지역에 소재하기 때문에 위의 사실을 백제와 연관시키기도 하나,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벽골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많다. 한편≪삼국유사≫에서는 ‘벽골지의 둘레가 17,026步이고 □□가 166보, 수전이 14,070(結)’이라 기술하였다. 이 표현은≪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의 사정을 전한 것일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하여튼 벽골지의 축조에 의해 상당한 양의 수전이 확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또한 눌지마립간 13년(429)에는 둑의 길이가 2,170보인 矢堤를 축조하였고,515)≪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3년. 법흥왕 18년(531)에는 왕이 有司에게 堤防을 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51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8년 3월. 일반적으로 제방이나 저수지는 水害와 旱害에 대비하기 위한 시설일 뿐만 아니라 반건전이나 건전지역까지 수전을 확대시킬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永川 菁堤의 경우는 산곡간의 溪流를 한꺼번에 막아 그 계곡 아래에 펼쳐진 완만한 경작지에 안정적으로 급수하는 저수지가 당시에 많이 축조되었음을 알려 주는 사례의 하나다.

 旱田에 그대로 볍씨를 뿌릴 때는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한해를 만나게 되면 곧 벼가 말라 버리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반면에 水耕直播를 한다면 뿌리가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해를 만난다 해도 쉽게 말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전의 개간은 단위면적당의 수확량을 증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게다가 수리관개시설의 확대는 토지의 이용을 증대시켰다. 즉 필요에 따라서 같은 땅에 수전농사를 짓기도 하고, 또 한전농사도 짓는「水陸兼種」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수전이 확대되면서 6세기 이후에는 벼의 재배가 크게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주식 가운데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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