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
  • 4) 토지제도와 조세·요역제도
  • (2) 조세·요역제도

(2) 조세·요역제도

 신라 초기의 수취제도에 대해서는 자료가 별로 없는 편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힘들다. 다만 三韓小國에서 무슨 일이 있거나 성곽을 쌓을 때 年少勇健者를 징발하였다는≪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의 내용을 통해서 신라 초기에 部나 읍락의 지배층이 읍락민을 요역에 징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晋書≫에서는 馬韓에 調役이 있었다고569)≪晋書≫권 97, 列傳 67, 東夷 馬韓.
한편 진한은 마한과 풍속이 거의 같다고 하였다.
하였다. 당시에 요역과 군역을 뚜렷하게 구별하여 징발하였다고 보이지 않으며, 공공건물이나 城의 축조, 그리고 전쟁 등 국가에서 필요할 때마다 읍락민을 무작위로 징발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당시 사회생활이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모습을 띠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신라 초기에 곡물을 저장하던 物藏庫와 그것을 관장하던 관리의 존재가570)≪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첨해니사금 5년. 확인되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일찍부터 일반민들로부터 부세를 거두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초기에 신라는 내부의 통치에 대하여 자치력을 행사하는 6개의 부로 구성되었으므로571)全德在,≪新羅六部體制硏究≫(一潮閣, 1996), 10∼38쪽. 당시 부세수취의 주체는 부의 지배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부의 주요 수취대상은 읍락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下戶였다. 고구려의 하호들이 지배층에게 양식과 생선·소금을 멀리서 져다 바쳤다고57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하였으므로 신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부의 지배층이 어떠한 방식으로 부세를 수취하였고, 얼마만큼의 양을 거두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部集團은 왕권에 의하여 일정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왕에게 공납물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라 초기에 경주분지에 위치한 사로국은 주변의 진한소국들과 지배-복속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때 각 소국은 복속의 표시로서 사로국에 공물을 헌상하였다.573)예컨대 于山國(울릉도)에서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든지, 古陁郡(安東)主가 婆娑尼師今 5년에 靑牛를, 助賁尼師今 13년에 嘉禾를 헌상한 사실 등이 바로 그러한 실례들이다. 사로국은 소국들이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면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응징하였다.574)전덕재, 앞의 글(1990b), 8∼12쪽.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사로국이 주변의 소국민들을 전쟁이나 축성 등에 징발하기도 하였다.575)신라 초기에 자주 보이는 축성 기사는 사로국이 주변 소국민을 징발하여 축성하였던 실례를 보여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수취제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정비된 것은 6세기 이후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종래의 部를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소국이나 읍락을 주·군·촌으로 재편하고, 부민을 비롯하여 각 소국의 읍락민들을 국가의 公民으로 편제하였다. 이에 따라 수취제도상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뒤따랐던 것이다.

 먼저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요역의 체계적인 정비에서 찾을 수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486)에 ‘一善界 丁夫 3천 명을 징발하여 三年·屈山 2城을 改築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계량된 정부의 수까지 명기하여 요역을 징발한 것은 어느 한 지역의 주민을 무작위적이 아니라 국가가 의도적으로 계량한 15세 이상의 정부 3,000명을 징발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신라가 5세기 말 단계에 각 家戶마다의 사정을 참작하여 축성역에 人丁을 징발하였던 것이다.576)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역사비평사, 1991), 91쪽. 실제로 6세기 중반<단양 적성비>에서 미성년 소년·소녀를 小子·小女로 표현하였듯이 신라가 각 가호마다의 연령별·성별 인구수를 파악하기도 하였다.

 중고기 신라의 요역 징발체계는 지금까지 발견된 비문들을 통해 살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南山新城碑>이다. 이 비문은 남산신성을 쌓고 만약 3년 이내에 무너지면 그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을 서술하고, 그들의 인적사항을 적기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남산신성 제1비>와<제2비>에서는 책임자들을 지방관(邏頭·道使;왕경인)-재지지배자(村主·匠尺)-기술자 집단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비문의 구성을 볼 때, 役夫의 동원은 지방관과 재지지배자 등이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또 다른 신성비문에는 지방관이 보이지 않고 다만 재지지배자만이 보이는데, 이것은 지방관의 개입 여부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비문을 통해서 볼 때, 중고기에는 국가가 郡 단위로 요역을 부과하였고, 다시 각 군은<남산신성 제1비>와<제2비>에서 보이듯이 특정한 한 촌이나 또는 여러 촌의 丁夫들을 요역에 징발하였던 것 같다.

 한편 요역과 마찬가지로 군역 징발방식도 중고기에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隋書≫新羅傳에는 신라에서 건장한 남자를 모두 뽑아 군대에 편입시켰다고 하였다.577)≪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 그리고≪삼국사기≫薛氏女傳은 진평왕대 설씨녀의 아버지가 3년 기간의 군인으로 징발되었으나 嘉實이란 청년이 그것을 대신하였던 사정을 전해 주고 있다.578)≪三國史記≫권 48, 列傳 8, 薛氏女. 특히 후자의 경우는 단혼소가족인 경우에도 예외없이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였고, 그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이었음을 알려 주기까지 한다. 이 때 왕경민뿐만 아니라 지방민도 군역에 징발되었다.579)진흥왕대 관산성전투에서 三年山郡 高干 都刀가 이끄는 지방민 군대가 新州軍主가 지휘하는 州兵에 속하였던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중고기 초에는 왕경인으로 구성된 군대와 지방민으로 구성된 부대는 엄격하게 구별되었다. 왕경인으로 구성된 군대는 四方軍主가 사령관으로 있었던 停에 주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문제는 군역과 요역과의 관계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6세기 이후 일반민들은 군역과 요역을 모두 부담하였다. 군복무 기간은 3년이었으므로 군에 징발된 사람들은 3년 동안 집을 떠나 오로지 국방의 의무에만 전념하여야 하였다. 따라서 군역을 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요역이나 조세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없음은 물론이다. 특히 설씨녀의 집안처럼 가세가 곤궁한 경우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에 따라 국가는 군사를 차질없이 징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치를 강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군사로 징발된 가족들에게 요역이나 조세부담을 감면시켜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隋와 唐나라에서는 府兵으로 징발된 人丁의 경우 租庸調의 부담을 면제시켜 주었음이 이와 관련하여 참고된다.580)樊樹志,≪中國封建土地關係發展史≫(北京 ; 人民出版社, 1988), 155∼158쪽.

 노동력과 더불어 중요한 수취대상의 하나는 현물이었다. 신라의 경우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부세로서 米 또는 粟과 絹布를 바치게 하였다.581)≪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高麗 및 百濟.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풍속·刑政·의복이 거의 같았으므로 신라의 賦稅制度 역시 그들과 비슷하였을 것이다.

 중고기 초 수취관계를 총괄하던 중앙관부는 稟主였다. 이는 一名 租主라고도 불렀는데, 품주·조주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관부가 租를 거둔 다음 그것을 창고에다 저장하여 관리하는 것이 주 임무였기 때문이었다.582)李基白,<稟主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40∼144쪽. 그리고 진평왕 6년(584)에 貢賦의 수취를 담당하는 調府가 설치되면서 품주에서 관장하던 수취관련 업무가 조부로 이관되었다.

 신라가 중고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부세를 거두었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으므로 고구려와 백제, 후대의 자료를 통해 그것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먼저 고구려의 경우≪수서≫고려전에 ‘人稅는 布 5匹에 穀 5石이다. 遊人은 3년에 한 번을 내되 열 사람이 어울려서 細布 1匹을 낸다. 租는 (上:필자)戶는 1석, 다음은 7斗, 그 다음은 5斗를 낸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각 가호마다 조를 거두었다는 점이다.583)기존에≪隋書≫권 81, 列傳 46, 高麗傳에 나오는 앞 규정을 근거로 고구려에서 人丁을 기준으로 부세를 부과하는 稅制 즉 人頭稅를 시행하였다고 보았다(金基興, 앞의 책, 50∼59쪽).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人丁을 기준으로 곡물이나 布·絹을 부과하는 부세제도는 唐代 또는 율령국가 시기에 가서 마련되며, 그것도 국가에서 토지를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급한 사실을 전제로 하여 정비되었다. 그 이전 단계에서는 주로 家戶 단위로 부세를 부과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변 나라들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위의 규정만을 근거로 고구려에서도 인정을 기준으로 부세를 부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부세의 양이 인정 1인에게 부과한 것으로서는 지나치게 많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위의 규정은 국가에서 부세를 부과하기 위하여 정한 일정한 기준치를 모두 갖춘 家戶에게 부과한 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한편 遊人은 농업생산에 종사하지 않은 여타의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이며, 그러한 이유로 국가에서는 농민들과 차등을 두어 부세를 거두었다고 짐작된다. 위의 기록에서 포 5필과 곡 5석은 중국 세제상에서 바로 戶調에 비견될 수 있고, 租는 부가세의 성격이 강한 戶稅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부세제도를 가지고 짐작하건대, 중고기 신라의 경우도 각 가호마다 組의 명목으로 쌀 또는 다른 곡물을, 調의 명목으로는 絹과 布를 부과하는 賦稅制度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수서≫신라전에 ‘혼례를 치를 때 단지 酒食을 차리는데, 빈부에 따라 그 輕重의 차이가 있었다’라고 하였듯이 중고기 신라사회에서는 빈부 격차가 심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가호마다의 빈부 격차를 고려한 부세 징수체계를 정비하여 나갔다고 판단된다. 통일전쟁기를 거치면서 확립된 9등호제는 그와 같은 측면을 반영한 수취제도의 정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통일기에 작성된<佐波理加盤文書>에는 巴川村이 매달 1일마다 上米와 大豆를 바치는 예가 보인다. 그리고<村落文書>에서는 통일기에 신라에서 수취의 기준자료로서 각 촌마다 計烟을 설정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것은 통일기에 촌을 단위로 요역과 조세, 貢賦를 거두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들이다. 그런데 중고기에 요역을 촌 단위로 징발하였다. 즉 중고기의 요역 징발방식이 어느 정도 통일기에도 계승되었던 것이다. 부세의 수취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국가에서 郡을 통해 촌마다의 사정에 따라 부세 수취량을 할당하고, 촌은 그 할당량을 다시 개별 가호마다 할당하여 거두어서 국가에 납부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의 부세부담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곤란하다.584)다만 戶調制를 실시한 중국 北魏의 경우 一夫一婦가 粟 2石과 帛 2匹을 바쳤고, 租庸調制가 확립된 唐나라에서는 1丁當 租로서 粟 2石, 調로서 絹 2丈과 棉 3兩(또는 布 2丈 5尺, 麻 3斤)을 바쳤던 사실을 참고할 수 있겠다.

<全德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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