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1) 신라사회의 대본이 되는 골품제도

1) 신라사회의 대본이 되는 골품제도

 최초 오늘날의 慶州 일원을 중심으로 하여 조그만 농업공동체로 출발한 斯盧國이 주변의 辰韓 동료 국가들을 모두 병합하여 대연맹왕국을 형성한 것은 대체로 4세기경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연맹왕국은 지역적으로는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아직 조정의 통제력은 미약한 편이어서 다수의 城邑國家들이 망라된 모자이크 형태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奈勿麻立干 이래 1백 년 이상에 걸친 이른바 마립간시대를 통해서 왕권은 꾸준히 성장하고 이에 따라 신라조정의 지역사회에 대한 통제력도 크게 강화되어 6세기에 들어서면 연맹왕국시대의 부족적·다원적인 유제가 청산 극복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신라조정이 중앙집권체제로의 질적 전환을 달성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즉 그 하나는 전국적인 지방제도의 채택이었고 다른 하나는 律令의 반포였다. 신라는 智證麻立干 때 처음으로 州郡制度를 시행하여 그 동안 사로 연맹왕국에 참여해 온 여러 지방세력들을 강고한 전국적인 지배망 속에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뒤이어 法興王 7년(520)에 반포된 율령제도는 단편적인 지역세력들을 중앙의 통제 아래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까 지방제도가 일종의 접착제의 구실을 하였다면 율령은 그야말로 용해제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 주군제와 율령제 실시를 계기로 하여 바야흐로 신라사회에는 법제화·조직화의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이 시대가 되면 뭔가 통합된 단일국가로서의 전반적인 여러 기능이 서로 연관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회학자 뒤르켕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부족의 同類性에 의한 소위 기계적 連帶에서 분업에 의한 유기적 연대로의 移行을 달성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같은 시대적인 추이에 따라 신라사회는 줄곧 변화를 강요당하고 새로운 집단이 출현했을 것이다. 신라의 사회구조란 필경 이처럼 많은 서로 다른 집단들 사이의 사회관계를 합산해 놓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세계의 어떤 민족사회·국가사회이건 간에 사회구조의 파악에서 가장 유력한 실마리가 되는 것은 경제·정치적 측면이다. 다만 우리들이 사회의 고유한 영역에 국한시켜 이를 고찰할 경우 무엇보다도 계급이 주요한 관심 대상이 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어떤 강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산업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그 개념이 전형적으로 형성된 계급개념을 사용하여 신라사회를 분석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르게 된다. 실제로 우리들은 그러한 개념적 구조를 검증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더욱이 계급만이 유일한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도 인종·지역사회·직업·가족·연령·性 등 많은 유대관계들이 사회구조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사회에서는 직업이 곧바로 신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사회구조의 양상을 신분제사회라는 틀 속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신분제사회의 세포는 물론 가족이지만, 이는 연합하여 지역적으로 村을 구성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친족집단의 혈연조직망 속에 은폐되어 있는 까닭에 그 파악이 쉽지 않다.

 중국 上海에 거주하면서 1860년대 후반에 전후 세 차례에 걸쳐 來韓하여 開港 통상을 요구한 바 있는 유태인 계통의 독일상인이었던 오페르트(Ernest J. Oppert)는 한국의 풍속·습관·종교에 대해 기술하면서 한민족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엄격한 계급차별이라고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585)Ernst J. Oppert,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 Leipzig, 1880;韓㳓劤 譯,≪朝鮮紀行≫(一潮閣, 1974, 75쪽). DB주 - 본문에 기입된 오페르트의 first name 'Ernest'는 영어식 표기로서 독일어식 원표기는 'Ernst'이다. 본 주석에는 독일어 저서가 실려 있으므로 독일어식 원표기로 수정하였다.

이같은 조선의 계급제도는 인도의 힌두족에 있어서 지배적인 계급제도(Caste)와 비슷한 점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힌두족의 경우에는 이같은 계급 구별이 종교적인 규율과 관습에 의거하고 있는데, 한민족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이유라고는 전혀 볼 수가 없고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에만 근원이 있는 것이다.

 과연 오페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카스트제도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전적으로 브라만교의 가치체계에 있는 반면에 양반제도는 비록 유교의 가치관에 그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이 제도의 본질 자체는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카스트제도와 같은 엄격한 계급차별은 韓國史上 양반제도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骨品制度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실로 골품제도야말로 신라의 사회적 본질을 관통하는 하나의 굵은 繫線이었다.586)李德星,≪朝鮮古代社會硏究≫(正音社, 1949), 85·123쪽. 아니, 그것은 바로 신라사회의 大本이 되는 제도였다.587)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67), 91쪽. 그러므로 우리들이 신라의 사회구조를 전반적으로 파악하려 할 경우 무엇보다도 이 골품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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