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2) 골품제도의 형성 배경
  • (1) 왕경 6부의 성립과 그 전개과정

(1) 왕경 6부의 성립과 그 전개과정

 골품제도는 6세기 전반에 王京 6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편제된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들이 골품제도의 형성 배경을 추구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6부의 역사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6부야말로 초기 신라국가의 中核으로 그 형성사는 그대로 신라의 발전과정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라의 성장 및 발전과정 속에서 6부 성립의 계기를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조선 英·正祖시대의 학자 李種徽는 시조 赫居世로부터 5세기 말의 炤知마립간에 이르기까지의 신라역사를 마치 道家의 이념이 구현된 매우 평화스러운 시대인 양 예찬한 바 있다. 즉 이 기간 중에 신라는 변화에 잘 순응하면서 無爲自然의 상태로 나라와 백성을 이끌어 갔으므로 가령 老子와 莊子가 맡아 다스렸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통치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588)李種徽≪修山集≫권 6, 史論, 新羅論 1. 사실≪三國史記≫新羅本紀 기사를 보면 上古시대에 신라의 王系는 朴·昔·金의 3姓이 交立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무력적인 대결이 발생하지 않은 채 매우 평화적인 방법으로 왕실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처럼 되어 있다. 이는 高句麗本紀와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나는 점이다.

 그러나 소위 3성에 의한 왕실 교체가 역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항상 평화적으로만 이루어졌을 리는 없다. 어쩌면 왕실 교체는 때때로 무력 대결을 수반했을 터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李德星의 다음과 같은 추측은 매우 흥미가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사로 6촌의 전설부터가 한 개의 정복수단의 표징이며, 박씨 시조라는 혁거세야말로 신라 역사상 최초의 정복자였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석씨 시조라는 脫解가 경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도 어디까지나 정복의식의 결과이며, 김씨 시조인 閼智의 경주 진출 역시 정복행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조정이 알지의 출현을 계기로 하여 국호를 始林에서 鷄林으로 바꿨다고 한 사실에서 어떤 중대한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내물마립간의 석씨 왕실 제압을 비상수단에 의한 것으로 추측했다. 요컨대 그에 의하면 3성이 교립한 사로국 왕실에는 억제할 수 없는 정복의식의 저류가 흐르고 있었고, 王系의 교체는 항상 정복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589)李德星, 앞의 책, 44·62∼63·70·74·110∼111·123쪽.

 우리는 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한 쪽을 택하여 신라 上古시대의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의혹과 난관은 이뿐만이 아니다. 신라본기에 기술되어 있는 상고의 世系와 紀年에도 많은 불합리한 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년에 있어서는 어떤「합리적」인 조정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그리하여 그간 연구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기년 조정안이 제안되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학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조정안은 나오지 못한 채 가설의 범주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문제를 왕경 6부의 발생에 한정하여 생각해 보면,≪삼국사기≫와≪三國遺事≫에는 건국 당시부터 존재해 오던 6촌을 제3대 儒理尼師今 9년(32)에 6부로 개칭하면서 각 부에 姓氏를 부여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가령 성씨의 下賜와 같은 것은 신라통일기의 어느 때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6부 관련 기사에 뒤이어 17관등을 제정했다는 기사가 보이지만, 이 역시 훨씬 후대인 6세기 전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한편 6부의 성립이 종전의 6촌을 개편한 결과라는 역사서의 기록에도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6부는 역시 사로국의 진한 병합의 정치적 산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신라는 연맹왕국 형성과정에서 병합한 크고 작은 주변 성읍국가들의 지배층을 경주 일원에 이주시킴으로써 왕경 6부를 편제해 나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6부의 성립 시기는 일단 내물마립간의 시대, 즉 4세기 후반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590)최근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 대한 긍정론이 대두하면서 6부의 성립시기를 사로국이 진한의 맹주국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3세기 후반경으로 잡아보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全德在,≪新羅六部體制硏究≫, 一潮閣, 1996, 10∼37쪽 참조).

 다만 6부의 성립시기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6부가 어느 한 시기에 성립된 것인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6세기경의 금석문자료에서 볼 때 6부 가운데 喙部(梁部)와 沙喙部(沙梁部) 2부의 압도적인 우세가 간파되기 때문이다. 사실 本彼部나 岑喙部(漸梁部·牟梁部), 斯彼部(習比部)는 매우 미약한 존재로 등장할 뿐이며, 韓岐部(漢只伐部·漢祗部)의 존재는 완전히 몰각되어 있다. 그리하여 6부의 원류는 대체로 5세기 初頭를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의 군사적 영향 아래 탁부와 사탁부가 설치된 뒤 5세기를 통해서 牟梁部 이하의 4부가 增置되어 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나오고 있고,591)武田幸男,<新羅六部와 그 展開>(≪碧史李佑成停年紀念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 창작과비평사, 1990), 123∼125쪽. 한편 마립간시대에 탁부·본피부·한기부의 3부가 먼저 성립되었다가 뒤에 탁부에서 사탁부와 잠탁부가, 본피부에서 사피부가 각기 분화된 결과 6부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592)朱甫暾,<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新羅를 中心으로->(한림과학원,≪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11∼18쪽.

 이처럼 6부가 5세기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혹은 3부가 분화함에 따라서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에는 그럼직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다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역사서에 보이는 6부 관련 기사와 충돌하는 듯한 면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즉 탁부와 사탁부가 마립간시대 김씨 왕실 직속의 세력기반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 김씨 이전에 왕실을 장악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박씨와 석씨의 세력집단이 각기 모량부 혹은 한기부와 관련이 있는 듯이 역사서에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가령≪삼국유사≫에 의하면, 智證王의 妃인 박씨나 진흥왕의 비인 박씨는 모두 모량부 출신으로 되어 있어, 어쩌면 모량부가 소위 박씨 족단의 장악 아래 놓여 있던 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한편 석씨 족단이 한기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593)金哲埈,<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歷史學報≫1, 1952, 29쪽)·<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歷史學報≫17·18, 1962;≪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74∼76쪽). 하긴 상고시기의 3성 교립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소위 중고시기의 박씨 왕비의 존재는 박씨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5세기경의 6부는 연맹왕국의 본질을 잘 반영하고 있다. 즉 국왕 직속의 부는 최초 탁부에 불과했고, 나머지 부는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유했다. 조정은 6부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정치운영은 국왕과 6부 대표자들과의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 그 뒤 사탁부가 국왕의 통제 아래 들어가면서 흔히 왕(금석문에는 寐錦王으로 표기됨)의 동생으로 임명되는 葛文王을 사탁부에 소속시켰다. 이처럼 왕실이 탁부와 사탁부를 발판으로 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여 간 결과 다른 부 대표들의 조정에서의 입지는 약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慈悲마립간 12년(469) 정월에 조정은 서울의 坊里에 이름을 정했는데, 종래 이를 6부 성립의 주요한 계기 내지 지표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방리는 6부지역 안의 행정구역 단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조치는 각 부에 대한 국왕의 통제력 강화를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594)全德在, 앞의 책, 30·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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