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2) 골품제도의 형성 배경
  • (2) 율령의 수용과 신분층의 결정화 과정

(2) 율령의 수용과 신분층의 결정화 과정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 중국 율령의 수용을 계기로 하여 제도적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제정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권 33, 志 2, 色服조에 법흥왕 때 처음으로 6부 사람들의 복색의 尊卑제도를 제정했다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制令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公服制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공복제는 이의 적용을 받는 관료집단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는 다름아닌 관등제도를 표시한 것으로, 그 배후에는 골품제도적인 신분제도가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된다.595)武田幸男,<新羅·法興王代の律令と衣冠制>(朝鮮史硏究會編,≪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1974), 85∼93쪽.
――――,<新羅官位制の成立>(≪旗田巍古稀記念 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167∼173쪽.
그러니까 율령 반포를 계기로 하여 그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몇몇 관등이 17관등제로 정비되고 나아가 골품제도의 原型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 잘못이 없다고 짐작된다.

 중국사에서 보면 본디 율령은 황제권의 이념을 뒷받침할 목적에서 제정되었다. 그런데 율령을 수용할 당시 신라의 군주권은 종전의 소위「6부체제」의 제약을 받아 아직 강고하지 못한 편이었다. 사실 국왕이라고 해도 초월적인 君主像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래 세상에 알려진<迎日 冷水里 新羅碑>(503)나 혹은<蔚珍 鳳坪里 新羅碑>(524)에서 볼 수 있듯 국왕(寐錦王)은 탁부 출신이라는 그 소속 部名이 표기되어 있을 정도이다. 더욱이<냉수리비>에서 보면 사탁부 소속의 갈문왕 이외에 관등을 보유한 유력자 6명이 일괄「王」으로 總稱되어 있다. 본래 王이란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또한 어느 시대를 묻지 않고 다소간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왕이 전체사회를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왕은 결코 전체사회의 어느 한 부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거나 혹은 그것과 이해관계를 같이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596)E. E. Evans-Pritchard, The Divine Kingship of the Shilluk of the Nilotic Sudan, Essays in Social Anthropology, Faber and Faber, 1962, p.84. 요컨대 신성한 것은 왕 개인이 아니라 왕의 지위인 셈인데, 6세기 초반 무렵만 하더라도 신라의 국왕은 敎書 속에 자신이 특정한 部를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기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만큼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국왕이 6부의 대표자들과 합의를 거친 다음 더욱이 그들과의 공동명의로 교서를 반포하고 있는 것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53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라의 정치 운영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법흥왕 18년(531)에 上大等직이 설치되면서 지금까지 국왕이 주재하던 6부 대표자회의, 곧 귀족회의를 상대등이 대신 짊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597)李基白,<上大等考>(≪歷史學報≫19, 1962;≪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93∼96쪽). 또한 530년대에 이르면 국왕은 더 이상 소속 部名을 冠稱하지 않아도 되는「太王」이 되었다. 이는 국왕이 탁부뿐 아니라 전 6부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그 位相이 올라간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일련의 현상을 갖고「6부체제」의 해체에 따른 국왕 중심의 집권적 정치체제로의 변화로 파악하는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이 시기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서 그 때까지 자치적인 단위정치체로서 기능했던 6부가 해체되고 그 대신 다만 행정구역의 의미를 띠게 된 것으로 파악할 여지가 크다.598)全德在, 앞의 책, 111∼140쪽. 전덕재는<울진 봉평 신라비>에 보이는 本彼部와 岑喙部의 대표자가 갖고 있던「干支」를 관등으로 인정하지 않아(이 점은 徐毅植도 마찬가지이다. 徐毅植,≪新羅上代 ‘干’層의 形成·分化와 重位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29쪽 참조), 법흥왕 11년(524) 당시까지 관등은 탁부와 사탁부 출신에게만 부여되었고 본피부와 잠탁부 출신에 대한 관등 부여는 530년대에 이르러 실현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에 보이는「간지」를 大阿湌보다 상위의 어쩌면 伊伐湌이나 伊湌, 혹은 迊湌에 상당하는 관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조된다.
武田幸男, 앞의 글(1990), 111∼112쪽.
朱甫暾,<6세기초 新羅王權의 位相과 官等制의 成立>(≪歷史敎育論集≫13·14, 慶北大, 1990), 257∼260쪽.
宣石悅,<迎日冷水里新羅碑에 보이는 官等·官職問題>(≪韓國古代史硏究≫3, 1990), 193∼194쪽.
申衡錫,<5∼6세기 新羅六部의 政治社會的 性格과 그 變化>(≪慶北史學≫15, 1992), 21∼22쪽.
李仁哲,<新羅 律令官制의 運營>(≪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129∼131쪽.

 율령은 바로 이같은 급격한 정치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포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분제도의 편성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즉 신분제도 편성의 원동력은 당시 증대일로에 있던 왕권이었지만, 그것이 아직 6부 세력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골품제도는 기본적으로 6부에 소속된 왕경사람들이 지방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도록 왕경 지배자 공동체의 배타적인 특권을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정착될 수밖에 없었다.599)武田幸男,<新羅の骨品體制社會>(≪歷史學硏究≫299, 1965), 7∼8·10쪽. 비록 6부체제 자체는 약화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그 지배층은 골품제도에 포섭되어 골품귀족으로 再生 轉化함으로써 그 정치·사회적 명맥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소위 중고시대를 통해서 귀족 연합체제적인 정치 운영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도600)李基白, 앞의 책(1974), 94∼101쪽. 이 때문이었다. 당시 신라의 國制는 형식은 군주제였으나 실제적으로는 귀족제적 구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골품제도는 6부 귀족연합체제의 정치적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법흥왕 때 정비된 신분제가 과연≪삼국사기≫職官志에 규정된 것과 같은 그 자체 정연하고 엄격성을 띠고 있는 골품제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인지 어떤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眞骨과 6頭品 양 귀족이 구분되는 관등인 大阿湌과 阿湌 모두가 소위 干群 계열에 속하고 있으며, 6세기 초의 금석문 자료에서는 이들 사이에 신분적인 간극을 인정할 만한 명백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골품제도가 직관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 확립된 시기를 아찬 관등에 6두품을 위한 特進제도로서 소위 重位制가 적용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7세기 중엽 무렵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601)全德在, 앞의 책, 141∼143쪽.
朱甫暾, 앞의 글(1992), 39∼40쪽.
골품제도와 같은 정연한 신분 계층제가 확립되는 데는 필경 상당한 기간에 걸친 사회 成層의 結晶化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고 특히 여기에는 진골귀족집단의 배타성도 작용했을 터이므로 이러한 견해는 시사하는 바 크다.602)사회적 등급에 대한 고질화된 관념은 항상 새로운 구별을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는 인류학자 로우이의 견해는 참고할 만하다(Robert H. Lowie, Social Organization, Rinehart & Company, 1948, p.278).

 사실 골품제적인 신분제도는 중고시대를 통해서 꾸준히 강고한 정치 사회적 토대를 구축해 갔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신분제도가 율령의 보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603)李基東,<新羅의 骨品制度와 日本의 氏姓制度>(≪歷史學報≫94·95, 1982), 137∼138쪽. 당시는 신라의 관직제도 발달사에서 볼 때 창설기로부터 정비기에 해당했는데, 골품제도의 가장 큰 정치·사회적 기능은 바로 6부 사람들의 家格을 평가하여 각기 일정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골품제도는 관료집단 내부에 발생하는 기구상의 하이어라키가 곧바로 신분적 上下의 성격을 띠도록 규정했는데, 이것은 삼국통일 후 정상적인 관료제도 발달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소위 中代정치를 파탄으로 이끈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604)李基東,<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震檀學報≫ 50, 1980;≪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31∼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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