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3) 골품제도의 계층 구성
  • (2) 두품제

(2) 두품제

 두품제는 6頭品에서부터 1두품까지 모두 6개의 신분으로 구분되었는데, 종래 이를 왕경 6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아 왔다.621)今西龍, 앞의 책, 217쪽.
末松保和,<新羅六部考>(≪京城帝國大學記念論文集≫史學篇, 1936;앞의 책, 307쪽).
실제로 골품제도는 6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신분제였던 만큼 이같은 견해에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다만 6부 중 가장 유력했던 及梁·沙梁·本彼의 3부가 6∼4두품에, 그리고 3∼1두품은 나머지 3부에 각기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622)武田幸男, 앞의 글(1975), 189쪽.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6부는 전체적으로 보아 그 우열에 차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 각 부의 소속원들이 모두 等質的인 성격을 띠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급량부나 사량부 소속원 중에서도 신분이 낮은 자가 있었던 반면 열세한 韓岐部나 習比部도 상대적으로 신분이 높은 자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요컨대 각 부 소속원에게 일률적으로 같은 두품 신분을 부여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두품제의 적용 대상이 된 족단 중에는 原新羅國을 구성했던 소위 斯盧부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신라가 연맹왕국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흡수 병합한 각 지역의 크고 작은 족장세력들이 포함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은 각기 6부에 편제되었을 터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지방의 基層에 있던「干」이나「上干」층이 4두품으로, 그보다 큰 것이 5두품으로, 다시 그 위에 성립된 대족장급으로서 국가 형성 때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던 자가 6두품으로 편제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623)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一潮閣, 1956; 앞의 책, 138∼152쪽). 대체로 옳은 견해라고 생각되지만 다만 이같은 구분에는 다소간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또한 6∼4두품이 지방세력만을 대상으로 하여 부여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두품 가운데 가장 높은 6두품은 崔致遠이<朗慧和尙碑>의 협주에서 晋나라 陸機의≪文賦≫를 인용하여「得難」이라고 자부했듯이 매우 얻기 어려운 신분이었다. 그런데 이 신분의 기본이 되는 요소는 사로부족을 형성한 6촌 씨족장 가문 안에 포함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이에 의하면 6두품은 이밖에도 사로부족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그에 병합된 성읍국가의 지배자들과 고구려·백제 멸망 후 신라에 포섭된 그 상급 귀족들, 또한 진골에서 한 등급 강등된 사람들이 여기에 첨가되어 갔을 것이라고 한다.624)李基白,<新羅 六頭品 硏究>(≪省谷論叢≫2, 1971; 앞의 책, 1974, 39∼57쪽). 이와는 달리 6두품은 중고시대 후반에 國士風의 하위 신분이 일부 특정한 진골세력에 대해 투철한 종속성과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그 비호 아래 생성된 부류라는 견해도 있는데,625)徐毅植,≪新羅上代 ‘干’層의 形成·分化와 重位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167∼174쪽. 이는 당시의 신라사회를 족적인 제약과 部체제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개인적 차원에서 자유로히 새로운 인간관계를 추구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이미지를 토대로 하여 나온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6두품이 阿湌에서 級湌에 이르는 소위 干群 계열의 관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 사실 간군 계열의 관등은 진골이 독점할 만한 관등이다. 그렇다면 6두품은 어느 시기에 이르러 국가권력에 의해서 진골 신분의 下位계층을 별개의 신분층으로 下向 고정시킴으로 해서 성립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도 한다.

 그것은 어쨌든 두품제의 성립 및 그 骨制와의 化合·合一의 시기를 둘러싸고서도 학계에서 견해가 엇갈려 있다. 골제와 두품제 양자는 그 계통 내지 범주를 각기 달리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어떤 연구자는 두품제의 성립시기를 9세기 초로 보고, 그것이 골제와 결합하게 된 것은 憲德王 14년(822) 金憲昌의 반란을 겪고나서부터의 일이라고 논단한 바 있다. 그는 그 근거로 興德王 9년(834)의 敎書에 보이는 골품제에 입각한 色服·車騎·器用·屋舍 등에 대한 규제의 내용이 두품제의 실태를 보여 주는 첫번째 자료인 점을 들었다.626)井上秀雄, 앞의 책, 320∼324쪽.
그런데 1978년 학계에 알려진 경덕왕 14년(755) 제작의≪華嚴經≫寫經 跋文에 同 관여자들 중의 한 사람인 經題筆師 同智 大舍의 신분이 6두품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견해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두품제의 성립시기를 6세기 후반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주목된다. 즉 두품제가 6두품에서부터 1두품까지로 되어 있듯 숫자가 많은 쪽을 上位로 하는 특이한 명칭인 점에 착안, 이를≪周禮≫春官 大宗伯 조에 보이는 九命制와 결부시켜 이 구명제를 정치이념으로 내걸었던 중국 북조국가인 周의 관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사실 최치원은 <낭혜화상비>의「득난」에 대한 협주에서 “數가 많은 것을 貴히 여기는 것은 마치 一命에서 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고 하듯 간접적으로나마 구명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같은 점을 근거로 하여 두품제의 성립시기를 진흥왕 18년(557) 이후의 어느 시기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627)武田幸男, 앞의 글(1965), 13쪽.
――――, 앞의 글(1975), 190∼191쪽.
이 6세기 후반 성립설은 그 뒤 지지자를 얻어 衣冠制와 稟主조직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를 진평왕대 초, 대체로 중앙관제가 발전·확립되는 시기로 보여지는 580년대에 구하여 골제와의 결합시기도 이 때쯤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628)木村誠,<6世紀新羅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歷史學硏究≫428, 1976), 30∼32쪽. 이와 마찬가지로 관등제도와 골품제도와의 대응이 일단 정착을 본 시기를 이 580년대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나왔다.629)三池賢一,<新羅官位制度>下(≪駒澤史學≫18, 1971), 21∼22쪽.

 그러나 이같은 견해에는 문제점이 없지도 않다. 앞서 지적한 대로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때에 17등 관등제도(京位)와 골품제도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령 숫자가 많은 쪽을 上位로 하는 것이 두품제의 특징이라고 하더라도 신라가 이같은 발상을 반드시 북주를 통해서만 얻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 남조국가인 梁의 武帝는 508년 18班 관제를 제정했는데, 이 역시 숫자가 많은 쪽을 상위로 하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신라가 직접 교섭을 갖지 않았던 북주의 제도를 ‘간접적으로 輸入’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법흥왕 8년 이래 직접 교섭이 있었던 양의 제도를 모방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순리적인 해석이 아닐까 생각된다.630)李基東,<新羅 骨品制 硏究의 現況과 그 課題>(≪歷史學報≫74, 1977; 앞의 책, 36쪽 주 92) 참조.

 두품제는 삼국통일 전쟁을 거치면서 차츰 사회적 분해작용을 겪은 듯하다. 신라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을 4두품 이상으로 제한한 결과 3두품 이하는 이를 세분할 의의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평민층과 하등 다를 바 없게 된 이들을 뒤에 平人 혹은 百姓이라 불렀다. 이처럼 골품제도는 한 때 8등급으로까지 세분된 적이 있었으나 성골이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고, 3두품·2두품·1두품이 평민으로 떨어진 결과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의 5계층으로 정리되었다. 탈해가 龍城國의 사람인 양 말하였다는 이른바「八品姓骨」631)≪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四脫解王.은 신라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기록한 듯하지만, 실은 이는 중고시대 말기 골품제도의 실태를 전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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