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3) 골품제도의 계층 구성
  • (3) 불완전한 사회성층의 지표-화랑도

(3) 불완전한 사회성층의 지표-화랑도

 주지하듯이 골품제도는 골품, 즉 개인의 혈통의 尊卑·上下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이라든가, 그 밖에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 장신구인 器用, 심지어는 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가했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그 族制的·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교되고 있다. 다만 골품제도는 카스트제도와는 달리 고유한 직업세습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이 점이야말로 족제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커다란 약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골품제도의 계급성에 沮害的인 요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청소년집단으로서의 花郞徒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에서는 사회성층의 기초가 되는 성분 간의 결합이 약한 사회구조상의 상태를「불완전한 성층」이라고 하는데, 그 하나의 기준으로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연령집단이다. 그런데 前近代사회에서는 청소년집단이 보통 광범위한 연령집단을 이루는 조직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본디 청소년집단은 가족 내지 친족단위가 그 성원의 충분한 사회적 지위 달성을 보장할 수 없는 사회, 혹은 그것을 방해하는 듯한 사회에서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非親族的이며 또한 보편성의 원리 위에 규제되어 있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632)S. N. Eisenstadt,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ge Groups and Social Structure, The Free Press, 1956, p.133.

 이같은 사회학의 일반적인 知見을 갖고 볼 때 청소년집단으로서의 화랑도는 처음부터 골품제적인 사회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화랑도는 진흥왕 때, 그러니까 골품제도가 제정되던 바로 그 시기에 조정에 의해서 개편된 뒤 약 1백년 간 전성을 누렸다. 그 때까지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성장해 온 청소년조직이 중앙에 흡수되면서 화랑도로 개편될 수 있었던 것은 율령의 수용에 따른 전반적인 법제화·조직화 시책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골품제도 역시 율령 수용의 산물이었다. 요컨대 화랑도와 골품제도는 법제화 시대의 雙生兒였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의 조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중앙집권화·법제화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완전한 국가기구의 일부가 아니라 半官半民 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래의 청소년조직의 전통이나 遺制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아직 강인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역시 골품제도와 마찬가지로 종래의 전통적인 힘과 새로운 율령의 정신과의 타협의 소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화랑집단의 구성에서 특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아래 더욱이 誓約의 형식을 통해서 조직되어 있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화랑집단 구성원 사이에서는 서약의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 점을 강하게 표현한다면 화랑도는 서약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혈연 제일주의, 씨족적 결합주의를 초월한 하나의 자치단체적 성격을 띤 집단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아가 이것이야말로 혈족집단을 토대로 하여 편제된 골품제도와는 그 구성원리상 서로 배치되는 점이다.633)李基東,<新羅 花郞徒의 社會學的 考察>(≪歷史學報≫82, 1979; 앞의 책, 332∼335·353∼354·356∼357쪽). 더욱이 화랑집단은 서로 다른 여러 골품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단의 수령인 화랑만은 진골귀족에서 뽑혔으나, 그를 따르는 낭도 중에는 왕경에 사는 진골 이하 하급 귀족, 그 밖에 일반 평민의 자제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634)李基白,<韓國의 傳統社會와 兵制>(≪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 1978), 198쪽.
―――,<韓國社會發展史論>(위의 책), 231쪽.
요컨대 화랑도의 조직 자체는 왕경 안의 거의 모든 사회계층을 연결·망라한 포괄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盟友·死友관계로 맺어져서 같은 목표를 향해 몇 해 동안 함께 수련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 수련이란 필경 화랑 아래서의 낭도 상호간의 사회작용인 것이며, 이를 현대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화랑도 성원으로서의 一體性(Identity)을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화랑도가 골품제와 같은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신분간의 갈등·알력을 완화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계층을 형성·유지하는 메카니즘의 하나가 歸屬원리에 못지 않게 排他性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화랑도 조직이 고취하고 있던 계층 간의 連帶性 제고 방향은 확실히 골품제도의 불완전한 성층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청소년집단 내부에는 공통의 生涯 유형(Life Style)이 발전해 가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집단 조직은 유년기부터 성년기, 다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장기간의 생활을 규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635)S. N. Eisenstadt, Social Differentiation and Stratification, Scott, Foresman and Company, 1971;丹下隆一·長田攻一 譯,≪社會分化と成層≫(早稻田大出版部, 1982, 94∼95쪽). 이같은 사실은 화랑도에서도 간파되고 있다.≪삼국유사≫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조에 실려 있는 화랑 竹旨가 그 낭도였던 得烏를 비호했다는 이야기와 후일 득오가 죽은 죽지를 추모하여 향가를 지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돈독한 관계가 평생토록 지속했던 것을 보여 주며, 이는 화랑도 집단 성원 간에 공통의 생애 유형이 정착되고 있던 사실을 암시하는 자료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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