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4) 골품제사회의 권력구조
  • (1) 경위제-골품제도와의 대응관계-

(1) 경위제-골품제도와의 대응관계-

 본디 관등은 사로국시대 부족회의에서의 석차·계층에서 원류한 것으로 짐작된다.637)李丙燾, 앞의 글, 629∼631쪽.
三品彰英, 앞의 글, 204쪽.
그런데 많은 성읍국가를 망라한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면 각기 서로 다른 관등이 그대로 조정의 관제 속에 중첩되어 관직과 관등을 구별할 수 없는 일종의 무질서 상태를 노출하게 되었다. 신라는 대체로 내물마립간 때로부터 辰韓 12개 국을 아우르는 큰 연맹왕국시대로 돌입했는데, 이 무렵 마련된 정청이 바로 南堂이었다. 이 남당에는 君臣의 좌석을 나타내는 소위 橛標가 있었던 것으로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어쩌면 이 때쯤 되어서 관직의 서열에 따라 宮中 席次가 정해지는 정치체제를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증왕 4년(503)에 만들어진<영일 냉수리 신라비>에는 壹干支·阿干支·居伐干支·奈麻 및「干支」등의 관등 명칭이 보이고 있어 경위제가 마립간시대의 산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17등 관등제로 완성된 것은 국가체제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체제로 재편성된 법흥왕 때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율령의 수용이었다. 본디 율령은 그 정치이념상 족제적인 신분제와는 상치하는 것이고, 관등제도 자체가 이미 율령의 규제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령 제정 때 관등제도가 족제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에 의해 규제되는 형태로 정착된 것은 당시 율령체제를 충실하게 강행할 수 있을 만큼 왕권이 성장하지 못한 데 起因한다고 생각된다.

 경위제가 17관등제로 완성되기 이전 단계에 12관등제의 시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伊伐湌과 伊湌은 하나가 二分된 것이고, 大阿湌은 阿湌에서, 大奈麻는 奈麻에서, 大舍는 舍知(일명 小舍)에서 각각 분화하고 大烏와 小烏는 烏知에서 각각 2분된 것으로 보아 17등의 숫자는 12등으로 압축된다고 한다.638)末松保和,<梁書新羅傳考>(≪靑丘學叢≫25, 1936; 앞의 책, 400∼408쪽). 한편 韓·中·日 삼국의 位階制를 서로 연관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중국 品階制의 영향 아래 성립한 고구려 관등제도가 백제와 신라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 신라의 관등제도가 17등급으로 移行하는 중간에 고구려와 같은 12관등(혹은 13관등)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 논자는 그 근거로 이벌찬에서 대아찬까지의 5개 관등이 어느 시기에 한 관등(대아찬)으로 취급되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639)宮崎市定,<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 1959), 253∼280쪽. 다만 이러한 견해는 근래 6세기 초두에 만들어진 신라 금석문자료가 잇달아 발견됨에 따라 사실과 다른 점이 확인된 바 있다.

 17관등은 크게 干(Khan)群 계열과 非干群 계열의 두 개 群으로 나누어진다. 즉 이벌찬에서 級湌(級伐湌)까지의 9개 관등이 간군에 속하고, 대나마 이하 造位(先沮知)까지의 8개 관등은 그와는 다르다. 그러나 비록 비간군 계열이라고는 해도 어떤 점에서는 간군과 서로 통하는 일면이 엿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대나마와 나마는 나마(Na-maru)군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큰 지역(那)의 우두머리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또한 ⑿大舍와 ⒀舍知는 사지(Maruchi)군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작은 지역 곧 마을(村)의 우두머리로 볼 수 있다. ⒂大烏와 (16)小烏의「烏」역시 이를 訓借音으로 읽을 때 首·長과 서로 통한다.640)徐毅植, 앞의 책, 37쪽. 단 maru群 京位에 대응하는 것을 外位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이 순전히 京位的인 성격, 전통적·토착적 성격을 보여 준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武田幸男,<新羅官位制の成立にかんする 覺書>(武田幸男編,≪朝鮮社會の史的展開と東ァジァ≫, 山川出版社, 1997), 122쪽 참조. 그러니까 간군과 비간군은 모두 일정한 지역세력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양자의 차이는 다만 지배하는 지역의 크고 작음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경 6부 자체가 이처럼 사로국의 영토 확장과정에서 새로이 획득한 각 지역의 다양한 지배층을 왕경에 결집함으로써 성립된 것이었다. 종래 간군 관등과 비간군 관등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 법흥왕대 초두에 邑落 首長의 신분서열로서 먼저 간군 경위가 창설되고 다시 진흥왕대에 이르러 나마-사지군 경위와 간군 외위가 추가적으로 설치됨으로 해서 진평왕 때 경위·외위가 완성되었다는 견해가 있었으나,641)三池賢一,<新羅官位制度>上(≪法政史學≫22, 1970), 15∼34쪽.
――――, 앞의 글(1971), 15∼34쪽.
법흥왕 11년(524)에 만들어진 울진 봉평리 소재 신라비석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경위·외위제가 이미 법흥왕대 완성단계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642)盧泰敦,<蔚珍鳳坪新羅碑와 新羅의 官等制>(≪韓國古代史硏究≫2, 1989), 183쪽.

 앞에서 언급했듯이 관등제도는 골품제적인 신분제가 전제가 되어 성립된 것이지만, 다만 우리들이≪삼국사기≫직관지의 규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17관등과 여러 골품신분간의 대응관계가 정착된 시기를 둘러싸고서는 학계에서 약간의 논쟁을 빚고 있다. 직관지 규정에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1관등인 이벌찬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받을 수 있으며, 다른 신분은 안된다”고 명시되어 있듯이 진골은 관등 승진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나, 6두품은 그 승진 한계가 제6관등인 아찬으로 규제되어 있다. 한편 公服 빛깔로 미루어 볼 때 靑衣에 상당하는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 黃衣에 상당하는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로 각기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제6관등으로부터 제9관등까지의 소위 간군 계열의 관등이 6두품에게「개방」된 것은 간군 관등이 분화된 결과로 볼 여지가 있으며, 이는 필경 본래의 상태에서 변질된 것으로 볼 수밖에는 없다.643)三品彰英, 앞의 글, 203∼204쪽. 이같은 의미에서 6두품 신분은 종래의 干層에서 유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非干層이 그 간 신흥세력으로 성장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644)徐毅植, 앞의 책, 167∼171쪽. 다만 그는 “6두품은 그 하위의 신분이 진골귀족에게 國士로 인정받아 오르게 되는 말하자면 획득되는 신분”이라고 했는데(徐毅植, 위의 책, 172쪽), 이는 몇몇 특정한 사례를 갖고 6두품 전체에 해당하는 것인 양 확대 해석한 느낌이 든다. 한편 진골귀족이 최고위 관등을 독점하는 배타적·독자적인 신분층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간군 관등이 어느 정도 분화된 시기의 현상으로 생각되며, 어쩌면 그 시기는 진골로서 관등을 가진 자에게 牙笏을 갖도록 한 교서가 나온 진덕여왕 4년(650) 4월 무렵으로 일단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645)徐毅植, 위의 책, 119쪽.≪삼국사기≫권 33, 志 2, 色服조에 의하면, 법흥왕 때의 制令에는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 太大角干까지 紫衣를 입은 자나 혹은 제9관등인 급찬 이상 제6관등인 아찬까지 緋衣를 입은 자는 모두 아홀을 갖도록 하였다.

 한편 관직은 관등의 규제를 받았다. 신라의 관직체제를 보면 중앙의 제1급 官府인 部·府의 경우, 제1등관으로서의 장관직인 令(집사부는 侍中, 位和府는 衿荷臣), 2등관으로서의 차관직인 卿(집사부는 侍郞, 병부는 大監), 3등관으로서의 대사, 4등관으로서의 사지 그리고 제5등관으로서의 史 등 5단계로 되어 있다. 이 5단계 조직은 神文王 5년(685)에 종전의 4단계 조직에 사지를 신설함으로 해서 완비되었는데, 그 중 특히 령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로 제한한 결과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6두품은 차관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5두품은 대사직에, 4두품은 史직에 한정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또한 6停·9誓幢을 비롯한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인 장군직(정원 36명, 경덕왕 때 3명 증원)도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었으며, 부지휘관인 大官大監(정원 62명)의 경우 6두품에게 개방되기는 했으나 그 보임 관등이 대나마 이상 4重阿湌까지로 되어 있는데 비해 진골은 대나마보다 하위인 사지 이상이면 보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지방장관직인 州의 都督도 보임 관등이 급찬∼이찬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 진골만이 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은 보이지 않으나, 이 역시 진골이 독점한 듯하다.646)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67쪽.
申瀅植,<新羅 軍主考>(≪白山學報≫19, 1975;≪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212쪽).
결국 6두품은 군직으로는 최고로 서북 일선지대인 황해도 平山에 그 본영을 두고 있는 浿江鎭典(782년 설치) 장관직인 頭上大監을 차지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지방관직으로는 도독 아래의 州助(일명 州輔)나 郡太守가 될 수 있는 데 불과했다. 실제로 6두품 출신으로 중앙의 執事部侍郞직과 패강진전 두상대감을 최후로 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사례가 종종 발견된다.647)李基東,<新羅 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앞의 책, 222∼224쪽).

 이처럼 골품제사회는 어디까지나 진골귀족 만능의 사회였다. 그 바로 밑의 6두품 신분은 얻기 어려운 신분이라는 뜻에서「得難」이라 불려지기도 했으나, 역시 관직 진출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삼국사기≫권 47, 薛罽頭傳에 의하면 설계두는 비록 衣冠子孫이기는 했으나 신라가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골품에 입각하여 진정 그 족속이 아니면 아무리 큰 재주와 뛰어난 功이 있더라도 주어진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음을 불만으로 여겨 진평왕 43년(621) 몰래 배를 타고 중국(唐)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薛氏가 대표적인 6두품 가문 중의 하나였던 점을 고려할 때 그는 6두품 출신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648)李基白, 앞의 책(1974), 39∼40쪽. 6두품 출신이 느끼는 불만과 좌절이 이와 같았다면 5두품 이하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 조정이 6두품 이하에게 제한된 관등 범위 안에서나마 특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은 사실이다. 소위 重位制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6두품에게는 重阿湌으로부터 4重阿湌에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을 터놓았고, 5두품에게는 重大奈麻로부터 9重大奈麻까지, 그리고 4두품에게는 일종의 특례로 重奈麻로부터 7重奈麻로까지 승진의 길을 터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649)三池賢一, 앞의 글(1971), 20∼21쪽. 그는 4두품 출신 國學 수학자에 대한 특전으로 마땅히 大舍(제12관등)에 적용해야 할 重位가 바로 그 위인 奈麻에 설정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만 나마 관등의 경우 그 중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4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은 대사인 만큼, 만약 4두품을 위해서 특진제도를 마련했다면 그것은 마땅히 대사에 적용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650)邊太燮, 앞의 글, 70∼76쪽. 한편 奈麻 중위제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는 혹 삼국통일 후 신라에 歸附한 옛 백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權悳永,<新羅 官等 阿湌·奈麻에 對한 考察>,≪國史館論叢≫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53∼55쪽 참조).

 또한 중위제의 제정 시기를 둘러싸고서도 학계에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삼국 통일전쟁 기간 중에 몇 차례 걸쳐 단행된 文武官 전원에 대한 한 등급 관작 승진조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중위제가 성립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651)李基東, 앞의 책, 134∼135쪽. 내물마립간 때로부터 진평왕대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설정되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후자에 의하면, 마립간시대에 이미 나마 중위제가 古拙한 형태로나마 시행되기 시작했고 그 뒤 그것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아찬 중위제가 새로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찬 중위제는 6두품이 독자적인 신분층으로 성립되어 있었던 진평왕 때 나타난 것으로, 이는 그 자체 비간층이 종전의 나마 중위제의 제약을 뛰어 넘어 간군 관등으로 진입하는 경향이 뚜렷해져 갔던 사정을 반영한다고 한다.652)徐毅植, 앞의 책, 162∼178쪽. 이같은 견해는 논리적으로는 성립될 수 있겠으나, 다만 중고시대의 사회 분위기와는 부합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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