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구조
  • 4) 골품제사회의 권력구조
  • (2) 외위제―지방촌락사회의 계층구조―

(2) 외위제―지방촌락사회의 계층구조―

 앞에서 보았듯이 사로국의 정복과정에서 그에 의해 병합된 각 지역의 유력 首長層은 왕경으로 옮겨져 6부에 편제되었다. 하지만 전국에 걸쳐 지역 세포망을 구성하고 있던 村의 수장층들은 대부분 그대로 재지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외위는 바로 이들에게 주어진 관등이었다. 외위제의 제정 및 완성 시기는 경위제와 거의 같은 6세기 전반경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즉 下干支 이하 阿尺에 이르는 하위 5개 관등은 법흥왕 11년(524)에 만들어진<蔚珍 鳳坪 新羅碑>에 모두 나타나 있고, 540년대 말경으로 짐작되는<丹陽 赤城碑>에는 撰干支가, 그리고 진흥왕 22년(561)에 만들어진<昌寧 眞興王 巡狩碑>에는 述干 등 상위 관등이 등장하고 있어 늦어도 이 때쯤에는 11관등으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비간군 외위가 6세기 초에 먼저 성립되고 뒤이어 6세기 중반경에 간군 외위가 성립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653)朱甫暾, 앞의 글(1990), 262∼268쪽. 이와는 달리 逸聖尼師今 5년(138)경에 干·一尺·一伐·彼日·阿尺의 5등관제로 성립되었다가 법흥왕 7년(520)경에 干位에 上干·選干·貴干·高干·述干·嶽干 등이 설치되어 11관등제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다(李仁哲, 앞의 책, 135쪽 참조).

 외위 관등은 크게 간군 계열 7개 관등과 비간군 계열 4개 관등으로 되어 있다. 이 11개 관등은 그 제1관등인 嶽干이 경위 제7관등인 一吉湌에 대응하면서 차례로 경위 17등 체계에 맞추어 편성되었는데, 다만 이 가운데서 악간은 실제로 문헌 및 금석문 자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 그 실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엇갈린 견해가 나오고 있다.654)李鍾旭,<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歷史學報≫64, 1974), 56∼65쪽.
三池賢一, 앞의 글(1971), 28∼29쪽.
武田幸男, 앞의 글(1977), 108쪽.
한편 그 다음가는 述干·高干·貴干·撰(選)干·上干·干(下干) 등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금석문이나 문헌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 중 술간은 유력한 村主層에게 부여한 관등인 듯하다.≪삼국사기≫권 1, 祗摩尼師今조에는 先王인 婆娑王이 韓岐部의 伊湌 許婁에게「酒多」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酒多」는 뒤에 角干(일명 舒弗邯)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는「술한」으로 訓讀할 수 있어655)李宇泰,<新羅의 村과 村主>(≪韓國史論≫7, 서울大, 1981), 114쪽. 그 명칭의 연원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외위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정비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중 간군 계열 관등을 명칭상 借音표기 관등(述干·撰干)과 借訓표기 관등(嶽干·高干·貴干·上干·下干)으로 대별하여, 전자가 먼저 성립되고 후자는 훨씬 뒤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656)徐毅植, 앞의 책, 50∼51쪽.

 그런데 외위 관등 중 비간군 계열에 속하는 一伐·一尺·彼日(波旦)·阿尺이 경위 관등의 一伐干(이벌찬)·一尺干(伊尺湌, 이찬)·波珍干(파진찬)·阿尺干(아찬)과 명칭상 서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 흥미를 끈다. 즉 국왕 직속의 최고위 관등 명칭이 지방 수장층인 干 아래의 臣僚層에 해당하는 관등 명칭과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왕이 기층사회의 수장층인 간과 기본적으로 같은 성격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657)徐毅植, 위의 책, 12∼14쪽. 다만 이들 경위 관등 명칭이 외위 명칭에서 기원한 것인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다.

 외위제는 어디까지나 경위제와 別個의 관등체계이고, 설령 외위 관등을 갖고 있더라도 관직을 받을 수는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외위를 받은 재지세력가들은 村主·軍師·公兄 등의 직책을 받아 중앙에서 파견된 幢主 혹은 道使·邏頭와 같은 행정관을 도와서 촌락민으로부터 조세 및 力役을 징발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바꿔 말하면 외위제는 지방통치의 말단에서 행정관과 촌락민을 연결시켜 주던 행정고리의 역할을 수행했다.658)權悳永,<新羅 外位制의 成立과 그 機能>(≪韓國史硏究≫50·51, 1985), 93∼103쪽.

 외위제의 기능은 이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골품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지방민의 신분제로서도 기능했다. 외위 관등을 기준으로 하여 지방민의 신분 계층을 구분해 보면 대체로 세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즉 최상위 계층은 촌주로 대표되는 干群 관등을 가진 유력자들로, 이들은 지방민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계층이다. 두번째 계층은 非干群 관등을 가진 계층으로, 이들은 간군 계층과 일반 촌락민을 연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최하위 계층은 외위를 받지 못한 일반 촌락민이었다.659)權悳永, 위의 글, 103∼109쪽.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이 막바지 고비에 이른 7세기 중반경에는 軍功을 세운 軍師 등 지방세력가들에게 선별적으로 외위 대신 경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일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고구려·백제로부터 항복해 온 관인층에게 경위를 주었다. 그러던 중 문무왕 14년(674)을 기하여 모든 지방세력가들에게 외위 대신 경위를 부여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경위 일원화의 방침에 따라 마침내 외위제는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세력가의 새로운 신분개념으로 대체된 것이 眞村主·次村主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660)權悳永, 위의 글, 109∼110쪽. 그 자세한 내막은 잘 알 수 없는 실정이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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