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1. 가야사 연구의 개관
  • 1) 가야사 연구의 전통

1) 가야사 연구의 전통

 고려 중기에 저술된≪三國史記≫에 加耶가 제외된 이래, 고대 수백 년간 경남 일대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존속했던 가야는 역사상 소외되고 잊혀진 나라가 되었다. 고려 후기의 저술인≪三國遺事≫에 文宗朝의 金官知州事가 편찬한≪駕洛國記≫가 수록되면서 가야사의 일부는 보존될 수 있게 되었으나, 이는 金官國의 후손인 김해 김씨와 경원(인주) 이씨가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에 상층 문벌귀족의 하나였던 것과 관련한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조선 초기에 여러 관찬사서가 편찬되었으나, 기존의 사서에 나와 있던 가야관계 사료들이 삼국의 역사 속에 편년체로 기록되었을 뿐이고, 조선 중기의 史略型 및 綱目體의 사찬사서들 속에서도 가야의 역사는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가야사 연구의 전통은 조선 후기의 실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三韓의 위치를 어디로 고증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17세기 초에 韓百謙이 삼한을 모두 한강 남쪽으로 보고 그 중에서 弁韓의 위치는 경상 서남 및 智異一帶이며 駕洛國이 그 곳에 있었다고 한 이후661)韓百謙,≪東國地理志≫, 後漢書 三韓傳·新羅 封疆 弁韓舊地.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의 설을 따르고 있다.

 19세기 초에 韓致奫은 가야 및 임나에 대한 중국 및 일본의 역대 사료들을 모아서 가야사 연구의 기초 자료를 종합하였으며,662)韓致奫,≪海東繹史≫권 16, 世紀 16, 諸小國 加羅·任那 및 권 41, 交聘志 9, 通日本始末. 韓鎭書는 가야·가락은 곧 金海府로서 弁辰狗邪國과 같으며, 任那·彌摩那는 곧 고령현으로서 弁辰彌烏邪馬國이라는 고증을 추가하였다.663)韓鎭書,≪海東繹史≫續 권 3, 地理考 3, 三韓 弁辰. 丁若鏞은 금관국은 弁辰 12國의 總王이었으며, 가야는 해운조건을 이용하여 발전함으로써 신라를 속국으로 할 수 있었다는 등의 견해를 보였다.664)丁若鏞,≪疆域考≫권 2, 弁辰別考.

 실학자들의 가야에 대한 연구가 그다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가야사 연구의 효시를 이루었고 그 이후의 연구에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다만 한백겸이나 정약용과 같이 가야사를 발전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려는 전통이 근대 이후 한동안 우리 손에 의하여 직접 계승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

 20세기에 들어 근대적 서술 방법에 의한 가야사 연구의 역사가 시작된 지 거의 100년을 헤아리고 있으나, 아직까지 가야사는 체계적으로 설명되지 못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은 가야에 대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에도 있고, 또한 연구 시각이 처음부터 잘못 설정되었다는 점에도 있다.

 가야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 동향에는 倭 또는 백제가 가야를 어떻게 지배하였는가에 관심을 두는 임나 문제 중심의 연구와 가야의 지역 세력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멸망하였는가에 주목하는 발전과정 중심의 연구가 있으나, 모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우선 기존 연구들의 성과를 제시하고 거기에 나타난 근본적인 연구 시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가야사를 재정립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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