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1. 가야사 연구의 개관
  • 2) 임나 문제의 제학설
  • (1) 임나일본부설의 성격

(1) 임나일본부설의 성격

 가야사에 대한 근대 일본 학자들의 최초의 접근은 주로≪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관계 한반도 지명에 대한 고증 작업으로 나타났다. 가야관계 지명 비정은 가야사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서 필수적인 것이었으나, 그들의 연구는 처음부터「왜의 임나 지배」라는 선입견에 의하여 이루어져 객관적인 연구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먼저 津田左右吉은≪일본서기≫에 대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일 정도의 비판을 가하면서 합리적 설명을 추구한 사람으로서, 가야 전역에 대한 지명 비정을 했다.665)津田左右吉,<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硏究≫1, 1913;≪津田左右吉全集≫11, 1964). 그러나 그는 任那府 屬領을 찾아낸다는 측면에서 거의 모든 가야관계 지명을 경상남도 남해안 연변에 배열하다시피 하는 비합리적인 연구결과를 낳고 말았다.

 今西龍은 가야지방 전역에 대한 답사 및 고분·산성 등의 분포 조사에다가 문헌고증적 연구를 더하여 지표 조사보고서를 내놓고, 거기서 행한 지명비정에 점차 수정을 가하였다. 그 결과 가야 지명은 대개 낙동강의 서쪽, 섬진강의 동쪽으로 한정되어, 대체적인 역사 연구의 기초 작업은 이루어졌다.666)今西龍,<加羅疆域考>(≪史林≫4-3·4, 1919);≪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1937). 그의 일련의 연구는 지표답사와 문헌고증을 겸비하였다는 면에서 그 이전의 연구들에 비해 높이 평가할 점이 있지만, 그것이 당시 史觀의 한계성을 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鮎貝房之進은 방대한 문헌고증을 통하여 임나의 지명 비정 범위를 경남·경북 및 충남·전남까지 확장시켜서, 임나는 경주지방 부근과 부여·공주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 전역을 가리키게 되었다.667)鮎貝房之進,<日本書紀朝鮮關係地名攷>(≪雜攷≫7 上·下, 1937). 그것은≪일본서기≫에 왜의 한반도내 지배 영역이었다고 상정된「임나」의 범위를 넓혀잡기 위해 그가 문헌 비교 및 언어학적 추단을 거듭함으로써 얻어진 연구 결과였다고 여겨진다.

 일제시기의 한국 학자로서 李弘稙은 고대 한일관계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으나 임나관계 일본인명에 대하여 문헌고증적 연구를 하였다.668)李弘稙,<任那問題を中心とする欽明紀の整理>(≪靑丘學叢≫25, 1936). 또한 池內宏은≪일본서기≫에 대한 津田의 연구방법을 이어받아 엄격한 문헌사료 비판과 아울러 학문적 연구 차원의 고대 한일관계사를 정립해 보려고 모색하였다.669)池內宏,≪日本上代史の一硏究≫(近藤書店, 1947). 이러한 문헌고증 차원의 연구들은 개별적인 관계기사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들이나, 기본적으로 왜의 임나 지배를 전제로 한 것이면서 전체적인 체계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末松保和는 기존의 지명 고증을 비롯한 문헌고증 성과에 의존하면서 한국·중국·일본 등의 관계사료를 시대순에 따라 종합함으로써 고대 한일간 대외관계사의 틀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최초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이른바「南韓經營論」을 완성시켰으니,670)末松保和,≪任那興亡史≫(大八洲出版, 1949). 그 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三國志≫魏書 倭人傳에 ‘其北岸狗邪韓國’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 즉 임나가라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諸韓國에 辰王보다 큰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둘째로≪일본서기≫神功皇后 49년조의 7國 및 4邑 평정 기사로 보아, 369년에 왜는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남 일부를 귀복시켜 임나 지배체계를 성립시켰으며, 또한 그 西方 정복지 중에서 제주도를 백제에게 주어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시켰다.

 셋째로<광개토왕릉비>의 기사로 보아, 왜는 400년을 전후해서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하여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의 복속관계를 강화하였다.

 넷째로≪宋書≫에 나오는 倭五王의 對中通交 당시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가라뿐만 아니라 백제의 영유 내지 지배까지 송으로 하여금 인정시키려고 하였다.

 다섯째로≪南齊書≫加羅國傳의 기사로 보아 479년에는 加羅王 荷知가 南齊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일본의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하였으며,≪일본서기≫繼體天皇代의 기사로 보아 6세기 초에 일본은 백제에게 전남북 일대의 임나의 땅을 할양해 주기도 하고, 신라에게 남가라를 약탈당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여섯째로≪일본서기≫欽明天皇代의 기사들로 보아, 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했으나, 결국 562년에 신라가 任那官家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일곱째로 그 후에도 일본은 大和 2년(646)까지 신라에 대해 多多羅 등 4邑의「임나의 調」를 요구하여 받아내었다. 즉 왜는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비롯한 광역을 군사정벌하여 그 지배 아래 임나를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사 및 고고학의 연구 수준이 향상된 1960년대 이후에는 畿內 大和세력이 일본열도내에서 九州地方까지 힘을 뻗쳐 상대적 우세를 확보한 시기를 대체로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으며, 중앙집권세력이 열도내 각 지방세력에 대한 자치권을 통제하여 행정적인 지배체제를 정비한 것은 7세기 후반 정도에야 가능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구주까지도 세력을 미치지 못하는 야마토국이 그보다 멀리 떨어진 남한을 4세기부터 경영하였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또한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 지배를 하였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 고분 발굴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의 유물 문화가 5∼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671)崔鍾圭,<陶質土器 成立前夜와 展開>(≪ 韓國考古學報≫12, 1982), 227쪽.
金泰植,<後期加耶諸國의 성장기반 고찰>(≪釜山史學≫11, 1986), 26∼28쪽.
즉 일본에 의하여 지배당하였다는 증거는 그 문화유물에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末松의 문헌사료 해석이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 후 1970년대에 들어와 일본사학의 성숙에 따라 기존의 남한경영론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연구동향은 이른바「임나 지배」의 성격을 달리 추정해보기도 하고 그 기간을 축소해보기도 하였으나, 모든 관점은「임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山尾幸久는≪일본서기≫의 기사들을 재검토하고 백제사와의 관련성을 첨부하여, 왜국에 의한 임나 지배의 성격이 5세기 후반에는「직접 경영」이었고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왕을 사이에 낀「간접 경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672)山尾幸久,<任那に關する一試論>(≪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末松保和博士古稀記念會, 1978). 즉 우선 4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서 백제의 木羅斤資·木滿致가 임나를 일괄하여 직접 경영하였는데, 목만치가 백제 東城王 시대에 왜국으로 이주하였으므로, 그를 구성원으로 삼게 된 왜국은 임나 경영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계승하게 되었다. 둘째로 그 이후로 왜왕이 임나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安羅國(함안) 소속의 한 작은 성읍에 왜왕의 신하들이 체류하고 있는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태이고, 6세기 전반에 그 倭臣들을 사실상 움직이고 있던 자는 성주·고령의 가라 출신 사람과 왜인과의 혼혈아였다. 셋째로 6세기 전반의 임나제국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사실상 백제왕에 의해 행해졌으나, 왜국이 임나제국 지배체계의 처치에 대하여 역사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왕은 왜왕을 교섭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 결과는 왜왕권에 의한 임나 경영의 개시 시기를 5세기 후반 이후로 늦추고 임나경영의 계기 및 방식을 백제와 연관하여 본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5세기 후반 이전에는 백제가 가야지역을 지배하다가, 그에 관계하였던 백제 귀족이 왜국으로 망명한 결과 왜가 가야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다. 또한 540년대 欽明紀에 보이는「在安羅諸倭臣」의 존재를 통해서 왜국에 의한 직·간접의 경영이라고 평가하였으나, 그들의 행동양식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大山誠一은≪삼국사기≫와≪일본서기≫의 기사를 혼합하여, 가야지역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임나일본부의 성립과정을 논하려 하였다.673)大山誠一,<所謂「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 上·中·下(≪古代文化≫32-9·11·12, 京都;古代學協會, 1980). 즉 487년에 백제가 북부 가야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6세기 초에 신라가 남가라를 병합하자, 백제·신라에 의해 독립을 위협받던 加耶諸國과 在留日系人이 야마토국에 보호를 요청하므로, 532년에 近江毛野臣이라는 장군을 파견하여 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일본부는 야마토국에서 파견된 日本府卿과 현지의 日系人으로 임명된 日本府臣·日本府執事로 조직되어 단순한 야마토국의 출장기관이 아니라 가야 제국의 왕들과 합의체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 연구 결과는 임나일본부 성립의 시기를 6세기 전반으로 늦춰잡고 그 원인을 가야로부터의 요청에 구한 점에 특색이 있으며 그만큼 진전된 것이라 하겠다. 다만≪일본서기≫顯宗紀의 紀生磐 說話를 토대로 지명 고증을 잘못하여 487년에 백제가 북부 가야를 군사적으로 제압하였다고 본 점이나, 繼體紀 후반부 사료에 대한 무리한 편년 조작 등이 문제로 남는다.

 鈴木英夫는 임나 성립에 대한 大山說을 받아들이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다.674)鈴木英夫,<加耶·百濟と倭-「任那日本府」論->(≪朝鮮史硏究會論文集≫24, 1987). 즉 그는 기존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4∼5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금석문자료나 중국사료에서는 증명할 수 없고, 해당 시기의≪일본서기≫기재 내용도 신뢰할 것이 못되며,「임나일본부」는 가야 재지지배층의 요청에 의하여 성립되었고, 이는 530년에 왜왕권에서 근강모야신이 군사 집단을 이끌고 안라에 파견되어 활동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왜의 안라 진출은 그 이듬해인 531년에 백제의 안라 進駐에 의하여 종결되었으며, 백제가 가야의「맹주」의 지위를 장악하자「在安羅諸倭臣」은 백제왕의 통제에 복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鈴木의 연구에 의하면 임나일본부는 단 1년간 안라에 존속되었을 뿐이므로, 이것은 임나일본부의 존립 시기와 그 의의를 극도로 축약해서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일본서기≫소재 기사의 문맥으로 보아, 모야신의 성격은 점령군 장군이 아니라 단순한 외교사절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뿐이며, 531년 이후의「재안라제왜신」은 백제왕의 통제에 복속한 것이 아니라 안라왕의 통제에 복속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가야사에 대한 대외관계 중심의 연구, 특히 임나일본부설은 주로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으며, 그 연구성과가 성숙되어 감에 따라 왜에 의한 임나 지배의 기간과 성격을 점차 축소시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 시각이 기본적으로 가야사라기보다 가야피지배사에 놓여 있다는 한계성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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