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1. 가야사 연구의 개관
  • 3) 가야관계의 제학설
  • (1) 문헌사학 계통의 가야사 연구

(1) 문헌사학 계통의 가야사 연구

 해방 이후 국내 학자들은 가야 자체의 발전과정에 주목하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나「임나일본부」라는 용어와≪일본서기≫라는 책 자체가 금기시되어 가야사에 대한 논의가 그리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1930년대 이래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해방 이후 출간된 국내 학자들의 가야사 관계 연구들은 낙동강 유역에 6가야연맹체가 520년간에 걸쳐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논하였는데, 그 연구자들 중에 安在鴻·崔南善·李丙燾 등이 있다. 다만 안재홍이나 최남선의 연구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를 뒤이어「가라」의 語源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이나 6가야의 위치 비정에 머물렀으나,689)安在鴻,<六加羅國 小考>(≪ 朝鮮上古史鑑≫上, 1947).
崔南善,≪朝鮮常識≫地理篇-加羅(1948;≪六堂崔南善全集≫2, 玄岩社, 1973).
이병도의 연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야의 발전과정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병도는≪삼국사기≫의 초기 기록과≪일본서기≫를 거의 배제하고≪三國志≫·≪三國遺事≫및≪삼국사기≫가야 멸망기사 등을 이용하여 가야관계의 짧막한 논문들을 몇 개 발표하였는데,690)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305∼350쪽).
그 요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해의 가락국이 부족국가로서 성립된 것은 기원전 2세기 이전의 일이며, 변진 소국들은 마한의 맹주인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변진의 일부 소국들은 진왕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6가야연맹체를 이루었는데, 그 최초의 맹주국은 고령의 대가야였다. 3세기 전반에 김해 금관가야(본가야)의 中始祖인 수로가 다시 6가야연맹을 결성하였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투항하였으며,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이처럼 이병도가 사료 계통에 따라 서로 상반된 사실을 전하고 있는 문헌기록들을 세밀히 고증하여, 가야사의 전개과정을 이만큼이나마 정리해낸 것은 중요한 업적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 다음으로 金哲埈은 고대사 개설서의 일부분에서 가야의 발전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였다.691)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1, 民族·國家史, 高麗大, 1964), 484∼487쪽. 즉 3세기경에 철기문화를 소유한 북방유이민 등의 파급으로 가야지역 각지에 김해 가락국을 비롯한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었고, 그 후 대가야와 금관가야가 그 중에서 가장 강성하게 되자 이 둘이 대등하게 결속되어 上下加耶聯盟을 이룩하였으나, 더 발전하여 하나의 고대왕권을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보았다. 이는 가야의 발전과정을 사회구조면까지 심화시켜 좀더 체계화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위의 성과들은 연구 관점을 올바로 하여 가야의 발전과정을 적극적으로 밝히려는 개척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 조사 및 연구가 충분치 못하였던 당시 학계상황의 제약으로 인하여, 가야사 연구의 기본적 한계성인 사료 부족을 극복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내지 못함으로써 가야사 발전의 기본 방향과 편년 등을 오도한 한계성이 있다고 하겠다.

 李基東은 가야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광범위하게 검토한 결과 상당히 정리된 인식체계를 보여 주었다.692)李基東,<加耶諸國의 興亡>(≪韓國史講座≫1, 古代篇, 一潮閣, 1982), 154∼164쪽. 즉 기원 1세기 이전에 성읍국가로서의 본가야가 김해에 성립되었으며, 3세기 중엽에는 변한 12나라가 있었다. 또한 4세기 이후 가야지역은 연맹왕국 수준으로 왕권이 성장하였으며, 처음에는 본가야가 가야 전체의 맹주로서 임나라고 불리웠으나, 그 후 대가야가 가야 제국의 맹주로 등장하게 되어 임나는 대가야를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千寬宇의 문헌적 연구 성과와 金廷鶴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대폭 수용하였기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기본 골격이 상당히 정리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개설서의 성격상 지명 비정 및 고고학 편년상의 세부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李永植은 대외전쟁의 규모와 양상으로 보아 4세기 말 이전의 가야 제국은 君長社會에 해당하며, 4세기 말 5세기 초 이후의 대가야·阿羅加耶와 같은 중심세력은 전쟁 규모가 1만 명 수준을 넘는 것으로 보아 도시국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693)李永植,<加耶諸國의 國家形成問題-「加耶聯盟說」의 再檢討와 戰爭記事分析을 중심으로->(≪白山學報≫32, 1985). 白承忠은≪삼국사기≫초기 기사와≪晋書≫등의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김해의 가야세력은 1∼2세기 무렵에 급속히 성장하다가 3세기 초에 거의 몰락하였으며, 4세기에는 이미 진한 즉 신라에 복속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694)白承忠,<1∼3세기 가야세력의 성격과 그 추이>(≪釜大史學≫13, 1989).
―――,<3∼4세기 한반도 남부지방의 제세력동향-초기가야세력권의 변화를 중심으로->(≪釜山史學≫19, 1990).
이들의 연구 결과는 기존설에서 사료적 가치에 대한 의문으로 인하여 이용하지 않던 文字資料들을 중시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사료해석 상의 무리한 점들이 노정되었으며 고고학 자료들이나≪삼국지≫와 같은 다른 사료와 배치되는 점이 나타났다.

 결국 순수하게 문헌적인 측면에서 가야의 발전과정을 다룬 연구들은 사료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여 가야의 발전추세 파악에 한계성을 드러내었으며, 이것은 가야사 연구에서 고고학자료의 활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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