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2. 가야사의 범위
  • 1) 가야의 명칭과 6가야

1) 가야의 명칭과 6가야

 가야사는 그 본기의 立傳이 史書에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가리키는 명칭도 사료의 계통에 따라 일정치 않기 때문에, 그 연구의 대상을 어느 문헌에 근거하여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라는 기본적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므로 우선「가야」·「가라」라는 명칭의 기원을 살펴 보고, 그를 가리키는 借字들의 종류와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야」·「가라」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를 그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뾰죽한 모자의 지칭인「가나」에서 나왔다든가, 南方 잠語의 개간한 평야를 가리키는 말인「가라」(kala)와 같은 것이라든가, 또는 가나라(邊國), 가람(江), 겨레(姓·一族), 구루(城邑) 등의 어휘가 변한 것이라든가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에서도 퉁구스어와 만주어 등의 알타이 諸語에서 一族을 가리키는 가라(xala·kala)가 가야(kaya)를 거쳐 겨레(ky re)로 음운 변화해 왔다는 연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편이나701)崔鶴根,≪國語方言硏究≫(서울大 出版部, 1968), 6쪽.
―――,≪韓國語 系統論에 關한 硏究≫(明文堂, 1988), 225쪽.
더 이상 알 수 없다.

 지명·국명으로서의「가야」·「가라」를 가리키는 借字의 용례로는「狗邪·拘邪·加耶·伽耶·伽倻·加羅·伽羅·迦羅·呵囉·柯羅·加良·伽落·駕洛」등의 10여 종이 있어서, 이들의 출전 및 사용빈도를 정리해 보면<표 1>과 같다.

 <표 1>에서 보면「가야」에 대한 문헌사료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차자는「加羅」(47회)이고, 그 다음으로「加耶」(31회)·「伽倻」(28회)와「駕洛」(15회)·「伽耶」(14회) 등이 있으며, 기타의 것은 1, 2회만 나오는 예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가야」의 차자로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狗邪」(≪삼국지≫)와「加羅」(<광개토왕릉비>)이고, 그 다음으로「加耶」·「伽耶」·「駕洛」(모두≪삼국사기≫)이 나오며, 마지막으로「伽倻」(≪고려사≫지리지)가 나타난다.

借字(頻度) 初見出典 最頻出典 出典(使用頻度)
狗邪(2) 三國志 三國志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韓(1)·倭人(1)
拘邪(1) 三國志 三國志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1)
加耶(31) 三國史記 三國史記 三國史記 新羅本紀(19)·樂志(2)·地理志(3)·列傳(4),
高麗史 地理志(2), 東國輿地勝覽(1)
伽耶(14) 三國史記 三國遺事 三國史記 地理志(1),
三國遺事 王曆(1)·五伽耶(8)·駕洛國記(4),
伽倻(28) 高麗史 東覽 高麗史 地理志(3), 東國輿地勝覽(25)
加羅(47) 廣開土王陵碑 日本書紀 廣開土王陵碑(1), 宋書 倭國傳(3), 南史 倭國傳(3),
南齊書 加羅國傳(2)·倭國傳(1), 通典 新羅傳(1),
日本書紀(29), 新撰姓氏錄(1),
三國史記 新羅本紀(2)·樂志(2)·列傳(2)
伽羅(1) 梁書 梁書 梁書 倭傳(1)
迦羅(2) 隋書 隋書·北史 隋書 新羅傳(1), 北史 新羅傳(1)
呵囉(1) 三國遺事 三國遺事 三國遺事 魚山佛影(1)
柯羅(3) 日本書紀 日本書紀 日本書紀(3)
加良(2) 三國史記 三國史記 三國史記 新羅本紀(1)·强首傳(1)
伽落(1) 三國史記 三國史記 三國史記 地理志(1)
駕洛(15) 三國史記 三國遺事 三國史記 金庾信傳(1),
三國遺事 王曆(1)·五伽耶(1)·第四脫解王(1)·駕洛國記(5),
東國輿地勝覽(6)

<표 1>「가야」·「가라」借字의 출전 및 사용빈도표

 한편 그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출전을 중심으로「가야」가 가리키는 지명들을 살펴보면, 3세기 이전 시기를 주로 다룬≪삼국지≫·≪삼국유사≫의「狗邪」·「駕洛」은 모두 김해를 가리키고, 6세기 이후를 주로 다룬≪일본서기≫의「加羅」는 대부분 고령을 가리킨다. 또한≪삼국사기≫이후의「加耶·伽耶·伽倻」는「某가야」의 형태로 표기된 것을 제외하고는 김해 또는 고령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판단해 볼 때,「가야」라는 이름은 김해세력의 지칭으로 처음 사용되었으며, 어느 때부터인가는 고령의 세력이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였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가야사는 우선 이 두 지역을 포괄하여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볼 때「가야」의 차자로는 둘 중 하나만을 주로 가리키는 狗邪·駕洛·加羅 등은 적절치 않고, 둘을 모두 가리키는 加耶·伽耶·伽倻 중에서 택하는 편이 낫다. 그 중에서「加耶」가 가장 먼저 쓰이기 시작하였고 사용빈도도 높으며 한국고대사의 기본사료인≪삼국사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니, 이를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가야」라고만 하였을 때는 김해나 고령의 소국을 가리킨다고 해도,≪삼국사기≫金庾信傳이나≪일본서기≫에는「南加耶」또는「南加羅」가 나오고,≪삼국사기≫·≪고려사≫ 지리지나≪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지 관계기록과≪삼국유사≫五伽耶條 등에는「大加耶」·「古寧加耶」·「阿那加耶」·「小加耶」및「金官伽耶」·「星山伽耶」(碧珍伽倻)·「非火伽耶」등이 나타나고 있다(<표 2>참조). 이「某가야」형태의 기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某가야 사 료
三國史記
本紀·列傳
三國遺事
五 伽 耶
本朝史略
五 伽 耶
三國史記
地 理 志
高 麗 史
地 理 志
東國輿地
勝 覽
日 本
書 紀
남가야
금관가야
(金海市)
加耶
任那加良?
南加耶
*金官國
駕洛國
大駕洛
伽耶國
金官伽耶 *金官國
伽落國
伽耶
駕洛
伽倻
*金官國
駕洛
伽倻
*金官國
南加羅
대가야
(高靈邑)
加耶
加羅
大伽耶   大加耶 大伽倻 大伽倻 加羅
*伴跛
아라가야
(伽倻邑)
*阿羅國 阿羅伽耶
阿耶伽耶
阿羅伽倻 *阿尸良國
阿那加耶
*阿尸良國
阿那加耶
*阿尸良國
阿那伽倻
*安羅
고령가야
(咸昌邑)
  古寧伽耶 古寧伽倻 古寧加耶
古寧伽倻 古寧伽倻  
소가야
(固城邑)
  小伽耶     小加耶 小伽倻 *久嗟
*古嵯
성산가야
(星州邑)
  星山伽耶
碧珍伽耶
星山伽倻
碧珍伽倻
    星山伽倻
碧珍伽倻
*比自㶱
비화가야
(昌寧邑)
    非火伽耶        

<표 2>문헌사료에 나오는「某가야」의 분포표

표는「某가야」가 아닌 다른 형태의 국명

 <표 2>에서 보면≪삼국사기≫본기·열전 및≪일본서기≫등의 자료(≪삼국지≫위서 동이전 포함)에는 남가야를 제외하고는「모가야」라는 것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기타의「모가야」들은≪삼국유사≫·≪본조사략≫의 5가야조나≪삼국사기≫·≪고려사≫·≪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지 관계기사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일단「본기 계통의 기사」와「지리지 계통의 기사」를 분리하여 보되,≪삼국사기≫본기·열전의 지명 표기방식이 원전 편찬시기가 가장 앞선다고 보이는≪일본서기≫의 그것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본기 계통의 기사에 근거해 볼 때, 앞에서 본 駕洛·加耶·加羅國을 제외한「모가야」 계통 소국들이 존재하던 당시의 이름은 김해의 南加耶 또는 金官國 또는 南加羅國, 고령의 半路國 또는 伴跛國 또는 叛波國, 함안의 阿羅國 또는 安羅國, 고성의 古資彌凍國 또는 古嵯國(久嗟國), 창녕의 比自㶱國 등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자기 이름을 가진 채로 전기 또는 후기 가야연맹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름 자체가「모가야」는 아니었을 것이다.

 반면에≪삼국유사≫에는 고려 초에 정착된 전승자료인≪가락국기≫와 연관이 있는 5伽耶의 이름들이 나오고,≪本朝史略≫에는 고려 太祖 天福 5년 庚子(940)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는 기사도 나오며, 그 후의 지리지 관계기사에서는 이 5가야를 일부 인정하기도 하고 또는 인정치 않기도 하여 이들 某가야의 구성은 일정하지 않다. 게다가 星山加耶의 지역으로 추정되는 성산동 고분군이 있는 성주군 성주읍 일대는 본래 지명이 本彼縣으로서 신라 一利郡(고령군 성산면)의 領縣이었는데, 신라 중대 말기의 경덕왕이 이를 新安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星山郡의 영현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렇다면「성산가야」라는 국명은 후대의 명칭이로되 성산군 일대의 지역 중심이 京山府(성주읍)로 옮겨진 신라 말 고려 초 이후의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古寧加耶의 지역인 상주시 함창읍은 위치상 가야 계통의 일국으로 보기에는 너무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남가야를 제외한「모가야」라는 것들은 그들이 존재하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후대 즉 나말여초 이후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5가야에 남가야(금관국) 또는 대가야를 포함하여 일컫는 이른바「6가야연맹」이라는 명칭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데, 여기서「6」이라는 숫자는≪삼국유사≫五伽耶條와≪가락국기≫의 6卵 설화에 의해 생긴 개념이다. 그러나 후술하듯이≪삼국지≫에는 3세기 당시의 弁辰狗邪國을 포함한 변한 12국의 명칭이 나타나고,≪일본서기≫에는 6세기 당시의 加羅國을 포함한 10여 국의 명칭이 나타난다. 그러므로「6」의 숫자 및「6가야」의 명칭은 가야 계통의 여러 소국들이 정치적 연맹체를 이루고 있을 당시의 것으로 보기 어려우며, 구태여 논하자면 신라 6部 姓氏에의 대응 및 나말여초 本貫制의 성립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한 가야사에서 후대의 기록일망정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하겠으며, 후대의 인식에서 어떤 지역세력이 신라나 백제가 아닌 가야의 한 세력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가야」라는 세력이 언젠가 커다란 세력권을 영유한 적이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료상으로「가야」라는 이름이 김해나 고령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주변의 廣域을 가리킨 직접적 사례가 분명치 않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는 한 가야사에서 가야를 비롯한 모가야들의 지역까지 포괄하여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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