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2. 가야사의 범위
  • 2) 변한 및 임나와의 관계

2) 변한 및 임나와의 관계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가야사의 범위를 약간 확대해 볼 때, 이것과≪삼국지≫의 변한 및≪일본서기≫의 임나와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생긴다. 변한과 임나는 그 용어가 가리키는 지역 범위와 시기가 가야와 일정하게 중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변한」또는「弁辰」은≪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에서 韓族을 정치상황에 따라 馬韓·辰韓·弁韓의 셋으로 구분한 것 중의 하나이고, 弁辰狗邪國을 비롯한 彌離彌凍國·接塗國·古資彌凍國·古淳是國·半路國·樂奴國·彌烏邪馬國·走漕馬國·安邪國·瀆盧國 등 12소국을 통칭하여 쓰이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김해의 구야국 즉 가야국이 2∼3세기 당시에 변한이라는 정치체에 속하여 있고 그 정치체는 가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소국의 연맹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魏志≫韓傳에서는 마한과 달리 변한에 대해서는 그를 대표하는 맹주국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여 놓지 않아서 변한과 가야의 관계를 더이상 추정하기 어렵다.

 그러나≪삼국사기≫新羅本紀의 초기 기록에는 설화자료를 편년체로 편찬하는 과정의 한계성 때문에 사료상의 문제점은 있다 하여도, 赫居世王 19년(기원전 19) 정월조에「卞韓」이 와서 항복하였다는 상징적인 기사와 婆娑王 23년(102) 8월조에「金官國」首露王이 분쟁을 중재하였다는 설화기사를 제외하고는 이 낙동강 유역의 세력을 모두「加耶」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신라 초기에 신라의 서쪽에 인접하여 있던 세력의 대표를 加耶라고 여기던 후세 인식의 반영이며, 앞에서 언급한 파사왕 23년조에서는 금관국 즉 가야의 수로왕이 신라왕의 초대를 받아 사로국 주변의 音汁伐國과 悉直谷國의 분쟁을 중재하였다고 하므로, 가야의 맹주적 위치에서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三國志≫魏書 韓傳의 기록으로 보아, 마한의 진왕이 마한과 변한 12국을 대표하는 공식 칭호에는 마한系 2국의 臣智와 함께 변한系인 安邪國과 狗邪國의 신지들이 聯名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니, 변한에서 구야국의 중요성을 가늠하여 볼 수 있다.

 그러므로≪삼국지≫와≪삼국사기≫의 기사들을 종합해 볼 때, 1∼3세기의 낙동강유역에는 10여 국으로 구성된 변한소국연맹이 있었으며 그 실질적인 대표 즉 맹주국은 김해의 가야(구야국)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야 중심의 변한소국연맹은 혹은 三韓史의 일부로서 또는 더 세분하여 각 소국마다 따로 다룰 수 있지만, 신라에게 멸망되는 6세기 이전까지 이 지역 전체의 독립적 역사를 종합한다는 관점에서는 모두 아울러서 가야사에 포함시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용례로서「任那」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 임나와 가야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기 전에 우선「임나」를 가리키는 借字인「任那·彌摩那」등의 出典 및 사용빈도를 정리하여 보면<표 3>과 같다.

借字(頻度) 初見出典 最頻出典 出典(使用頻度)
任那(237) 廣開土王陵碑 日本書紀 廣開土王陵碑(1), 眞鏡大師塔碑(1), 三國史記 强首傳(1), 宋書 倭國傳(4), 南齊書 倭國傳(1), 梁書 倭傳(1), 南史 倭國傳(5), 通典 新羅傳(1), 新撰姓氏錄(7),
日本書紀(215)-崇神紀(2), 垂仁紀(2), 應神紀(2), 雄略紀(6), 顯宗紀(4), 繼體紀(12), 宣化紀(3), 欽明紀(133), 敏達紀(9), 崇峻紀(4), 推古紀(29), 舒明紀(1), 皇極紀(1), 孝德紀(7)-
彌摩那(1) 日本書紀 日本書紀 日本書紀 垂仁紀(1)
彌麻奈(2) 新撰姓氏錄 新撰姓氏錄 新撰姓氏錄(2)
御間名(1) 新撰姓氏錄(1)
三間名(2) 新撰姓氏錄(2)

<표 3>「임나」借字의 출전 및 사용빈도표

 <표 3>에서 보면,「임나」또는「미마나」의 차자 243회 중에서 국내사료인<광개토왕릉비>·<眞鏡大師塔碑>와≪삼국사기≫强首傳의 3例와 중국사료인≪宋書≫倭國傳의 4例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측 사료의 용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임나」의 차자로서 처음 나오는<광개토왕릉비>의「任那加羅」702)廣開土王陵碑(王健群의 釋文) 永樂 10년(400) 庚子條.와<강수전>의「任那加良」703)≪三國史記≫권 46, 列傳 6, 强首.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그것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고,<진경대사탑비>의「任那」704)昌原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許興植,≪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1984), 257쪽.는 그것이「新金氏」또는「興武大王」과 관련되어 쓰였으므로 일단 그 위치를 김해로 추정해볼 수 있으나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한 사정은 任那와 加羅를 두 개의「國」으로 간주한≪송서≫왜국전에서도 다를 바 없으며,≪송서≫의 용례는 5세기의 倭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단「임나」의 뜻을≪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사료에서 어떻게 간주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일본서기≫崇神紀에 ‘任那者 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雞林之西南’이라는 기록이 나오고,≪신찬성씨록≫未定雜姓 右京條에 ‘三間名公 彌麻奈國主 牟留知王之後者’의 기록이 나온다. 숭신기에서 임나의 위치는 김해를 가리키는 듯하고,≪신찬성씨록≫에서 미마나국주「牟留知王」이「朱留知王」의 오기라면 이는 首露王을 가리킨다고 보아705)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341쪽. 여기서의「미마나」도 김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일본서기≫에서 사료의 신빙성이 인정되기 시작하는 繼體紀로부터 시작하여「任那」라는 용어가 133회나 나오는 欽明紀를 포함하여 孝德紀까지에서의「임나」는 좀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의 임나는 왜가 이를 총괄하여 지배 또는 경영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인식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한반도 남부의 신라나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소국들의 총칭 또는 그 지역 전체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 단적인 사례가 흠명기의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合十國’이라는 기사이다. 그리고 이 임나는 멸망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전 계체기나 흠명기 초년의 기사로 보아서는, 여기에다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의 4縣과 己汶·帶沙의 2地 및 㖨己呑·南加羅·卓淳의 3국 등을 더해야 할 시기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일본서기≫에서의「임나」는 대체로 5∼6세기 당시의 한반도 남부에서 신라나 백제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諸小國의 총칭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며, 이는 당시의 이들 제소국이 신라나 백제와 구분되는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한편≪삼국사기≫에서 법흥왕 9년(522)에 신라와 國婚을 하였다는「加耶」는≪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대비하여 보면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킴에 틀림없으므로, 이는 6세기 초 당시에 고령세력이 가야지역의 대표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또한≪삼국사기≫樂志의 于勒十二曲의 곡명에 上·下加羅都, 達已, 思勿, 勿慧, 上·下奇物, 居烈, 沙八兮 등 여러 지역의 郡樂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를 가야의 악사인 우륵이 모두 정리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가야 즉 고령 대가야의 맹주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와 왜 사이의 國書에서「百濟」나「百濟王」뒤에「加羅·安羅」또는「安羅王·加羅王」이 聯名되어야 하였던 것으로 보아,706)≪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3년 5월조 참조. 당시의 총칭 임나에서 대가야의 중요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일본서기≫와≪삼국사기≫의 기사들을 종합해 볼 때, 5∼6세기의 한반도 남부에는 신라나 백제와 구분되면서 10여 국으로 구성된 諸小國聯盟이 있었으며 그 실질적인 대표 즉 맹주국은 고령의 加耶(加羅國)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일본서기≫에서 5∼6세기 당시의 이 諸小國연맹 지역을 총칭하여 부르는「任那」라는 명칭을 써서 왜의 간섭이라는 관념이 담긴 任那史로 다룰 것이 아니라, 이 지역 전체의 前代부터의 역사와 구분하면서 종합한다는 관점에서 이 모두를 加耶史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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