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Ⅵ. 가야의 성립
  • 1. 가야의 풍토와 지리

1. 가야의 풍토와 지리

 가야 계통 소국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지역이 늘 일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오랫 동안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낙동강 및 그 지류인 남강유역 일대의 땅이었다. 그 경계는 크게 보아 서쪽으로 소백산맥의 지리산·덕유산 등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으로 迦智山·琵瑟山 등으로 둘러싸였으며, 남쪽으로는 남해에 면하였다. 외부와의 교통 여건으로 보아 서쪽 및 북쪽으로는 지세가 험하여 거의 막혀있는 형세이며, 동쪽으로는 산세가 있다 해도 드문드문 뚫려 있는 형편이다.

 가야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하여 강변 및 해안을 따라 골고루 평야가 발달하였으나 곳곳에 나지막한 지맥이 뻗어 있어 광활한 평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지리적인 조건에 따라 둘로 나눈다면 낙동강 하류지역을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와 낙동강·남강 상류지역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지대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은 해상교통 및 농업기반의 면에서 서로간에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해운 입지조건의 면에서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김해지역이다.≪三國志≫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무렵에 낙랑에서 배가 출발하여 서해·남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데 狗邪韓國에 들렀다가 해협을 건너 倭地로 향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김해지역의 입지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擇里志≫에서 동해는 바람이 높고 물결이 험해서 서남해의 선박이 잘 닿지 않는 데 비해, 서남해는 물결이 완만하여 전라·경상으로부터 한양·개성·황해·평안까지 商賈가 이어지며 낙동강 입구에서는 강줄기를 따라 상주·진주까지 배가 미치니, 경상도에서는 그러한 南北海陸之利를 김해가 모두 관장한다고 말하고 있다.707)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生利. 이와 같은 상황이 고대의 조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면 당시에도 김해는 정치적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한반도 서북지방과 경상 내륙지방 및 왜지 등을 연결하는 해운의 구심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김해만큼은 미치지 못하지만 부산·양산·밀양도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고, 그 서쪽의 창원·마산·고성·사천의 경우 내륙 수로는 없어도 서남해의 해상교역에는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함안은 직접 해안에 면해 있지는 않아도 그들 배후의 육상교통 요지에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이후 4세기 무렵까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에서의 활발한 교역상은 고고학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물상으로 보아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王莽錢, 김해 良洞里 토광묘의 後漢代 尙方鏡, 창원 茶戶里 목관묘에서 나온 前漢代 星雲鏡·五銖錢·琴形帶鉤·小銅鐸, 창원 성산패총에서 나온 五銖錢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 또한 김해 池內洞 옹관묘에 부장된 야요이(彌生) 중기의 袋狀口緣土器나 김해 良洞里 목곽묘의 廣形銅矛, 김해 大成洞 목곽묘에서 나온 4세기경의 筒形銅器·巴形銅器·碧玉製紡錘車形石製品 등은 왜와의 교역 또는 이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이에 비하여 낙동강 상류지역을 비롯한 가야지역 내륙 산간지방은 해운 입지조건이 불리하다고 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 그와 다른 장점인 농경의 이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이 지역의 농경문화 전통은 유래가 깊어서 기원전 6∼5세기 이래 고령 良田洞, 산청 江樓里, 진양 大坪里 등지에서 지석묘·무문토기 단계의 농경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

 원래 한반도 남부지방은 여름철에 고온다우하고 벼의 생육기간이 넉넉하여 水稻作 농경의 최적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상 내륙 산간지방은 전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었다. 그 지역의 농업 입지조건이 매우 양호한 것이었음은 慶尙右道의 땅에 대한 조선 후기 農書 또는 地志의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伽倻川 유역의 성주·고령·합천과 지리산 동쪽의 진주 등은 가장 비옥한 땅으로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한반도에서 가장 많고 농업용수가 풍부해서 旱災를 겪지 않았으며, 안음·거창·함양·산음 등도 상당히 비옥하였다고 한다.708)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生利·山水 및 八道總論 慶尙道.
徐有榘,≪林園經濟志≫本利志 권 3, 東國土品 八域可居地.
조선 후기의 상황이긴 하지만 토지가 비옥하다는 척도로 보아 경상우도 중에서도 내륙 산간지방에 대한 언급은 이렇게 장황한 반면에, 그보다는 평야가 넓은 경남 해안지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즉 이 지역에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지 않은 것은 일정한 한계성이라 하겠으나, 별다른 수리기구가 없는 전근대적인 농업기술하에서는 범람이 잦은 큰 강변의 평야는 농경에 불리하고, 오히려 계곡 사이의 물을 쓸 수 있는 산 밑의 좁은 들이 농업 입지조건의 측면에서 훨씬 더 안정적이고 유리하였던 것이다.709)丁若鏞,≪與猶堂全書≫5, 권 22 및 1集.

 한편 가야지역의 또 하나의 장점은 이 지역에 鐵産地가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생활 유적지에서 철기 제작의 부산물인 鐵滓가 나온 곳만 해도 김해 회현동·부원동 패총, 고성 패총 등이 있어서 고대 鐵産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초기≪世宗實錄地理志≫에는 김해 甘勿也村과 창원 夫乙無山의 沙鐵 생산을 기록하고 있다. 冶鐵址가 드러난 창원시 성산패총의 경우에 최하층에 무문토기 계통의 유물이 존재하고 그 바로 윗 면이 야철지로 추정되며 그 위의 패각층에서 오수전·김해토기 및 철도자 등의 유물이 나타나는 현상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는 철자원 개발 및 철기 제작기술의 보급에 따른 야철 그 자체가 이 지역의 발전 및 그에 따른 패총문화의 형성에 기본 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을 반영한다고 보겠다. 철산과 해운의 두 가지 이점이 연결되어 당시의 경남 해안지대에서는≪三國志≫魏書 韓傳 弁辰條에 보이듯이 鐵鋌을 돈처럼 쓰기도 하고 韓·濊·倭·二郡에 철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낙동강 상류지역의 경상 내륙 산간지방에는 아직 야철지가 발굴된 바 없으나 고령·거창·함양·산청·합천·삼가 등지의 高塚고분에서는 다량의 철제 무기와 갑주 등이 부장품으로서 출토되었다. 이는 그 지역에 존재하는 풍부한 鐵鑛자원의 존재와 연결시켜 보아야 할 듯하다. 후대의 자료로서≪世宗實錄地理志≫에 합천군 冶爐縣 心妙里의 鐵場과 산음현 馬淵洞山, 삼가현 毛台亦里 欖頂山의 철장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철산업 개발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야로현의 철장은 조선 초기 歲貢正鐵 9,500근을 내던 풍부한 것으로서 당시 한반도 3대 철산의 하나였으므로 가야지역내에서 그 철산지의 중요성은 컸을 것이다.

 위와 같이 정리하여 볼 때 가야지역은 질좋은 철광산이 산재한 낙동강변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그 하류지역의 김해·부산·양산 일대는 해운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합천·고령·성주 등의 상류지역 일대는 안정적이고 양호한 농업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경남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제한적이나마 창원·고성·사천 등의 해안지대는 해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산청·함양·거창 등의 산간지대는 농경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가야지역의 지리 및 풍토 여건은 양호하였으나 역사의 전개란 지리적인 요소와 함께 다른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되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金泰植>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