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Ⅵ. 가야의 성립
  • 2. 가야의 건국 설화
  • 1) 가락국 수로왕 신화

1) 가락국 수로왕 신화

 우선 수로왕 신화는 김해지역에 하나의 통합된 정치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전하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이 기록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가지의 전승이 복합되어 그 성격을 속단할 수는 없으나, 전통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전설의 성격상 개개의 호구수나 편년 기록, 강역 범위 등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수로왕 誕降 전에 九干이 거느리는 아직 이름도 없는 촌락의 전체 호구수가 100호 75,000인이었다고 하였다.≪三國志≫魏書 韓傳에 辰弁韓의 大國은 4, 5천 家이고 마한의 대국은 만여 가였다고 하였으니 1호당 구성원수가 5명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비추어 1국당 25,000인 또는 50,000인 정도가 될 수 있었다고 볼 때, 가락국의 인구 75,000인이 터무니없는 숫자는 아니라고 하겠으나 어느 시대의 상황을 전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더욱이 1호당 750인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으나,「1백 호」는 혹시「1만 호」의 誤刻이 아닐지 모르겠다.

 수로가 後漢 建武 18년(42)에 천강하였다는 것도 그 연대를 신빙할 근거가 부족하고, 다만 기원 전후한 시기의 이 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는 것과 연관하여 대략의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연대에 대한 문제는 건국시기와 관련하여 뒤에서 좀더 자세히 논급할 예정이다.

 또한 가락국을 포함한 이른바「6加耶」의 강역을 동쪽은 黃山江, 서남은 滄海, 서북은 地理山, 동북은 伽耶山, 남쪽은 國尾라고 하였다. 이를 확대해석하여 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가 아니라 3세기 정도에 가야연맹을 결성한 中始祖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710)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317쪽. 연맹 결성의 시기와 계보관계의 여부를 수로왕 신화의 내용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역시 이는 건국 직후의 강역이 아니라 가야연맹이 대체로 어느 정도의 범위를 차지하고 있었던가에 대한 후대 인식의 한 증거일 뿐이다.

 그러나 我刀干·汝刀干 등 9간의 무리가 龜旨峰에 모여 龜旨歌를 부르자 하늘에서 金卵 6개가 내려오고, 이것이 我刀家에서 변화하여 동자로 되자 9간 등의 무리가 이 중 한 사람을 추대하여 수로왕으로 삼았다는 줄거리는 일정한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 줄거리에서 추론해낼 수 있는 의미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수로왕 신화에서는 수로왕보다「9간」의 이름과 그들의 행위가 신화 초두에 먼저 나오는데, 이 점이 고조선 또는 고구려 계통의 天神이 먼저 나오는 정복형 신화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9간은 김해지역에 산재하던 소단위 세력집단들인 9村의 酋長들로서, 그들은 수로 강림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재지세력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일반적인 영웅 신화처럼 수로왕 신화의 기본적인 내용은 최고통치권자 또는 귀족계급의 대표자인「王」의 출현을 알리는 것인데, 9간 등이 불렀다는「구지가」는 集團降雨呪術 또는 祈雨祭의 변종으로서 원시농경사회에 일반적인 것이므로 구지가는 전체 신화구조 속에서 다른 것보다 오래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신화의 내용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자 그 힘에 의하여 비 대신에 수로왕이 내려왔다. 그렇다면 봄의 특정한 날에 9간을 비롯한 200∼300인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共同祭儀를 벌이는 협동체제는 하늘에서 들려온 수상한 목소리에 따라 처음으로 연출된 것이라기보다 수로왕의 출현 이전부터 이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셋째로 수로왕 출현 장면의 묘사에 의거해 볼 때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금빛 알이 6개 들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깨어 수로왕이 나왔다고 하였으니, 곧 고조선 및 고구려 계통 신화와 같은 天降 및 卵生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가락국 지배계층의 神聖 수식 관념이 한반도 북방 계통의 민족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나 그 천강 난생의 神異性이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다.

 넷째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수로왕이 9간과 같은 재지세력의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당시에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이주민이거나 또는 이주민으로서의 명분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신화적 요소가 많이 탈색된≪삼국사기≫김유신전에 나오는 가야 개국전설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수로라는 사람이 龜峯에 올라 駕洛 9村을 바라보고 그 땅에 가서 개국하여 가야라고 이름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이 경우에는 이주민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로 천강의 명분을 지니는 수로를 9간들이 합의하여 왕으로 추대하였으므로, 결국 재지세력들의 합의에 의하여 누군가를 선출함으로써 왕권이 창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왕은 천강한 이후 金卵 상태로 我刀의 집으로 옮겨지고 그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므로 재지세력의 대표격인 아도간과 어떤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추대를 토대로 수로왕은 가락국을 건국하여 9간이 다스리던 전체지역을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다스렸다.

 그러므로 수로왕 신화는 김해지방에 이미 소단위 재지 권력집단들의 연맹체인「9촌연맹」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각각의 지배자인 9간이 합의하여 이주민 계통의 수로왕을 추대함으로써 가락국이라는 소국이 출현하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시조 탄생 및 건국 신화라 할 수 있다. 그들이 하나로 통합된 정치체제를 이룬 후 수로왕이 또다른 이주민 계통의 세력으로 보이는 脫解의 도전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소국 결성의 계기는 내부적인 요인보다 당시의 시대상황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6卵 즉 6인이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요소로서 설화의 원형을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신화의 전체 구조에서 수로왕 탄강의 요소에 비하여 나머지 5卵은 내용상으로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이 부가되어 있을 뿐이며, 논리적으로 볼 때 김해에서 천강의 명분을 얻어서 다른 지역으로 간 사람들이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통치 명분을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초기의≪高麗史≫地理志 및≪世宗實錄地理志≫金海條에 기록된 수로왕 신화에는 금란이 1개로 되어 있어「6가야」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신화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6난의 요소는 후대의 조작이든지 아니면 어느 시기엔가 가락국이 주도하여 이른바「6가야연맹」을 형성하였던 후대의 경험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6가야연맹설의 문제점은 앞에서 상술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또한≪가락국기≫의 수로왕 신화는 다른 신화들과는 달리 가락국 건국 이후에 阿踰陀國 공주 許黃玉과의 신이한 결혼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아유타국의 소재지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가설들이 분분한 상태이다. 아유타국이 인도·태국·중국·일본의 어느 곳에 있었는지, 또는 실제로 허왕후가 그 중의 한 곳에서 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역사상의 우연한 일이 실지로 벌어졌던 것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신화의 신비성을 더하기 위해 누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리적 지식을 더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중의 어느 나라에서 허왕후가 실지로 왔다고 해도, 그것이 가야의 역사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은 흔적은 없다. 다만 허왕후가 배에 錦繡綾羅·衣裳疋段·金銀珠玉·瓊玖服玩器 등의 물건을 많이 싣고 왔다고 하였고 이를 뒤에 다시「漢肆雜物」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는 해운을 이용하여 가야지역에 와서 漢系 문물을 교역하던 낙랑 상선의 도래와 관련된 염문일 수도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