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Ⅵ. 가야의 성립
  • 3. 가야 제국의 성립
  • 1) 성립 배경

1) 성립 배경

 한반도 남부의 경상도지역에 국한하여 볼 때 기원전 6∼5세기경부터 지석묘·홍도·무문토기 계통의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 정착 농경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차 富가 축적되고 읍락내의 신분 차이가 심화되어 거대한 지석묘를 축조할 수 있는 小君長세력들도 나타났고, 기원전 3∼2세기경에는 그들 사이에 우열의 차이가 나타나서 일부 지역에서는 충청·전라지역의 값비싼 청동기를 소량이나마 구입하여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기원전 1세기경에 위만조선의 유이민과 그들의 문화가 경상도지역에 직접 파급되어 오면서 발달한 청동기와 소박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사회통합 기반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유이민 이주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한반도 서북지방 문화의 직접적 자취가 대구·경주 등의 辰韓지역에 창원 등의 경남 해안지대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경상도지역의 기존 농경문화 기반도 상당한 것이어서 새로운 금속기 문화의 파급이 즉각적인 사회구조의 변동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고 보인다. 그 선진 제철기술 및 관련 문화양식은 先住세력들과의 상호연관 아래 점진적으로 토착화되면서 주변으로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후 1∼2세기경에는 지역에 따라 상당한 문화 축적을 이루어 경상도지방의 경주·김해 등지에 좀더 큰 단위의 고분 및 생활 유적을 영위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기존의 축적 기반을 토대로 삼아 당시 한반도 주변에서 가장 선진문화를 보유한 중국의 상업기지인 樂浪과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가지면서 발전을 도모하여 갔다고 보인다. 특히 해운 입지조건이 좋은 경남 해안지대의 세력들은 좀더 적극적인 낙랑과의 교역을 통하여 진한지역에 대한 상대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도모하였을 것이다.

 경상도지역 각 지방세력들이 이처럼 비슷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발전해 나간 결과 2∼3세기에 이르러서는 토기 양식 등의 유물에 보이는 문화성격이나 수준으로 보아 경남 해안지역과 대구·경주지역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대등한 문화기반 아래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은≪三國志≫魏書 東夷傳에서 辰·弁韓의 여러 문화요소가 거의 같다고 지적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당시 진·변한이 구분된 이유는 문화 성격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의 어떠한 차이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시야를 좁혀 2∼3세기경의 가야지역 즉 변한지역에 한정하여 유적의 분포 상황을 살펴볼 때 우선 주목되는 것은 생활 유적 및 고분 유적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유적들이 낙동강 하류 부근의 경남 해안지대에 집중되어 있고, 낙동강 상류 및 서부 경남의 내륙 산간지방에는 그 유적의 분포가 비교적 드물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변한지역 가운데에서도 주로 경남 해안지대의 활발한 발전상이 이 지역에 초기의 가야 제국들이 성립되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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