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Ⅵ. 가야의 성립
  • 3. 가야 제국의 성립
  • 2) 성립 시기

2) 성립 시기

 초기 가야 제국의 성립 과정을 보여 주는 기록으로는 앞서 검토하였던≪駕洛國記≫와≪三國志≫魏書 韓傳밖에 없으므로 이것과 고고학자료들을 토대로 그 중 하나인 가락국 즉 弁辰狗邪國과 그를 비롯한 가야소국들의 성립 시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앞에서≪가락국기≫소재 수로왕 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9간으로 상징되는 김해지역의 소단위 재지집단들이 자체 의사에 의하여 수로왕을 추대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어 가락국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수로왕 신화에 보이는 가락국 개국 연대인 後漢 建武 18년(42)은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가락국기≫의 개국기원 연대는 그 말미에 인용된≪開皇曆≫등에 의거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가락국 왕력이 포함되었을 이 책의 편년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왕력과 밀접한 관계 아래 정해졌으리라고 보인다. 가야 왕력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대목은 수로왕의 수명 및 재위 연대가 42년부터 199년까지 158년간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수로왕이 昔脫解(57∼79)의 신라왕위 획득 전에 그와 경쟁을 벌였다는 설화 및 수로왕이 婆娑尼師今代(79∼112)에 音汁伐國과 悉直谷國 사이의 영토분쟁을 중재했다는 설화 등을 충족시키기 위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수로왕이 그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다는 설화로 인하여 그의 즉위 연대가 이에 따라 상향 조정된 듯하다.

 그런데≪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5세기 전반 신라 訥祗王 때의 인물인 朴堤上이 열전에는 2세기 전후한 시기에 재위한 婆娑尼師今의 5世孫으로 되어있고, 열전에서 박제상의 祖父라는 阿道葛文王이 신라본기에서는 逸聖尼師今 15년(148)에 갈문왕으로 봉해진 기사가 나오므로, 박제상의 가계에 문제가 없다면 신라본기 초기 왕력 편년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712)金哲埈,<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歷史學報≫17·18, 1962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106쪽. 그러므로 신라본기를 중심으로 한≪삼국사기≫초기 기록의 편년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라고 하겠으며, 그와 밀접한 연관 아래 작성된≪가락국기≫의 가야 왕력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하겠다. 다만≪삼국사기≫초기 기록들의 대부분의 기사들은 연대를 다소 인하시켜야 할 필요성이 인정되는 반면에 이를 더욱 인상시켜야 할 필요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헌사료만으로 가야의 개국 연대를 추구한다고 할 때,≪가락국기≫의 後漢 建武 18년 즉 42년은 가야 기원 추정의 상한선일 뿐이고 실제는 그보다 더욱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

 가락국의 존재는 3세기 중엽 이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삼국지≫위서 한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곳에 변진 12국의 하나로서「狗邪國」즉 가야국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 景初中(237∼239)에 魏 明帝가 樂浪·帶方太守를 통하여 諸韓國臣智에게 邑君·邑長의 印綬를 주는 과정과 관련하여 파악된 것으로 본다면, 그 중의 하나인 구야국의 성립은 3세기 전반을 하한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하겠다. 다만 3세기 전반의 구야국은 당시의 辰王의 공식 칭호에 聯名되는 등 이미 변진 12국 중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보이므로 국가세력의 정상적인 발전과정을 감안할 때 구야국의 성립 시기는 늦어도 2세기 후반 이전으로 올려 보아야 할 것이다.

 가야의 시초에 대한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살펴볼 때 기원전 1세기경의 창원 茶戶里 1호묘를 필두로 하여 김해지역 良洞里 등지의 토광목관·목곽묘와 김해패총 등의 철기문화 유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가락국은 이러한 문화 발전을 토대로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고학적 견지로는 어느 정도의 시기를 가락국 성립기로 인정할 수 있을까.

 영남지역의 분묘 유적들을 시기별로 정리해 볼 때 기원전 1세기 전반의 시기는 토기의 근본적인 변화없이 외래의 세형동검 관계유물이 그에 추가되었을 뿐이고, 목관의 규모나 유물의 성격에서 기술이나 부의 축적이 충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영남지방에 외래문화가 이주해 들어옴으로써 구야국과 같은 정치세력이 나타날 수 있는 문화기반이 성립된 시기로 의미를 축소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반면에 2세기 후반이 되면 목관의 규모가 커져서 대형 목곽묘가 나타나고 전반적으로 유물의 양이 많아진 상태에서 有蓋臺附長頸壺(直口壺)·火爐形土器·短頸壺 등의 신식 와질토기가 나타나며, 철도자·철부·철낫 등의 농공구뿐만 아니라 철검·철모·철촉 등의 다량의 철제 무기와 함께 環頭大刀가 새로이 등장하니, 이 정도면 단위정치체로서의 소국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그 이전 시기의 회색타날문토기 제조기술 및 철기 제조기술의 보편화를 계기로 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국가의 무력독점적 성격을 감안해 볼 때 철제 무기의 증가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목곽의 시초 형식이 나타나고 부장유물에서 철제 무기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시기를 찾아보면 조금 더 올려잡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가락국의 개국 연대는 대략 2세기대로 한정할 수 있는데, 가락국은≪三國志≫魏書 韓傳에「弁辰狗邪國」의 이름으로 나타나며 이는「변진 12국」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나머지 변진 소국들의 성립과정 및 시기도 가락국의 경우와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